소설리스트

〈 400화 〉 400화 좋은 소식 (400/425)

〈 400화 〉 400화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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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석이 남강석을 시켜, 태명 대신 신재윤의 목줄을 잡게 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애송이를 신경쓰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남강석을 끼워 넣은 것이 이형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남강석에게 맡긴 이상 태명은 신재윤에게서 손을 떼야 한다.

남강석이 자기가 해결했다고 말했음에도 태명이 나선다는 건 남강석을 전혀 믿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남강석만 아니었다면 훨씬 쉽고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NTV 출연 정지를 두고 협박했을 거다.

그러나 남강석에게 신재윤 처리를 부탁하는 바람에 쉽고 강력한 패를 손에 쥐고도 전혀 쓰지를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며칠 전 K2미디어가 신재윤에게 자사 걸그룹 프로듀싱을 맡겼다고 하니, 남강석이 신재윤의 배경이 된 모양새가 되어 한층 더 곤란해졌다.

‘일을 쉽게 하려다가 우리 손을 스스로 묶은 꼴이 되었어.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에게 본때를 보여준다고 회장이나 되는 인물을 함부로 끌어들인 게 실수였어.’

KM과 남강석이 10대 재벌가 직계인 송윤석에게나 비웃음거리지 대한민국 국민의 99%에게는 결코 밉보이고 싶지 않은 거물이다.

그래서 오민정을 등에 업은 신재윤에게 확실한 힘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남강석을 끌어들인 건데, 이제 이쪽이 그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차, 내가 여기서 한탄할 때가 아니지. 얼른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는 해도, 소 잃었다고 외양간을 망가진 채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형문은 태명백화점 그룹을 이끄는 실세답게 마음을 다잡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태명 실망이야. 똑똑한 사람 많은 대기업이라 참신한 걸 기대했는데, 너무 상투적이잖아. 상상력이 너무 빈약해. ”

태명 백화점 이형문 실장과 박병식 피디가 나눈 통화록이 내 손에 들려 있다.

시간을 보니 저들이 통화한 지 30분 만에 나에게 온 거다.

요주의 인물이라고, 어느새 더 이스트에서 이형문 박병식 폰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단다.

영화에서나 보던 해킹, 도청 같은 걸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백 년간 존재를 숨겨 온 저력을 엿본 것 같았다.

“상투적인 게 아니라 정석이야. 정석이 정석인 이유는 가장 성공률이 높고 확실해서야. 우리가 너무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 정석이 안 통하는 거지.”

누나 입에서 상식 소리가 나오다니!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럴 수가! 누나가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거야? 그랬던 거야?”

“얘는, 내가 무슨 우주인인 줄 아니.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여자야.”

누나가 생각하는 평범이 우리가 아는 평범과는 약 254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우주인이란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일어난 김에 농담을 더 던지고 싶었으나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 뻘쭘하게 엉거주춤 제자리에 앉았다.

“임상욱, 유성, 전현우는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감시는 계속하고 있는데, 걔들 한눈 안 팔고 마리안느 앨범작업, 컴백준비에 열중하고 있어. 술도 안 마시고 여자도 안 만나. 잡념을 일로 떨치려나 봐.”

무슨 잡념이길래 그 좋아하는 여자를 안 만나는 건지.......절대 알고 싶지 않아.

“임상욱이 요즘 외박 안 하고 집에 꼬박꼬박 들어가서 박병식이 불만이 많아.”

부연설명이 없어도 왜 박병식이 불만이 많은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박병식과 임상욱 부인은 불륜관계.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지속한 관계이다.

“박병식 이거 레알 개새끼네!”

“맞아. 내가 봐도 개새...아니지. 바른 말 고운 말. 너도! 너울이 앞에서 말조심해야지.”

“아차차. 너울아, 아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감정이 격해져 임산부와 태아 앞에서 입에 담으면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주의한다고 하는데, 가끔 나도 모르게 이런다.

누나 배에 뽀뽀하며 너울이에게 사과하자, 누나가 잘했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 X­파일 기사건, 원래는 박병식이 전부터 준비한 계획이었어. 그걸 이형문이 알고 이번에 쓴 거야. 박병식은 새별너울이 연습생 동행코너에 출연할 때 쓸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럼 너랑 엮여서 새별너울도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새별너울이 아이돌 메이킹에 출연하는 건 대략 5주쯤 후로 예정되어 있다.

컴백 직전이거나 컴백 날이랑 엇비슷하다.

만약 이번 X­파일 기사 한 달 후에 터졌으면 막 컴백한 새별너울에게 분명 피해가 갔을 거다.

“박병식 무서운 자슥. 피디라 방송과 언론의 속성을 너무 잘 알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어차피 맞았을 매, 일찍 때려준 이형문한테 고마울 정도야.”

“꼭 그런 건 아니지. 만약 이형문 없고 박병식만 있었으면 기사 나오지도 못하게 우리가 막았겠지. 이번에는 이형문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몰라서 당한 거고.”

“듣고 보니 그러네.”

“아무튼, 너 방송에 내보내려고 박병식이 써클엔터에 부탁해 어드바이저로 끌어들인 거였잖아. 이 기사건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때부터 전부 계획되었던 거야.”

누나는 더 이스트와 어둠을 통해 알아낸 이번 일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부 계획적이었다.

써클엔터는 아이돌 메이킹 우승이 아니라 연습생 인지도를 높이고 써클엔터 차기 걸그룹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참가한다고 나에게도 밝혔었다.

그러면서, 아이돌 메이킹에서 써클엔터의 명성을 지키고 차기 걸그룹에 들어갈 만한 인재를 찾아달라며 나에게 어드바이저를 부탁했다.

그러나 써클엔터의 속마음은 일반인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는 아이돌 메이킹 연습생들에게 애초부터 기대가 없었다.

써클엔터는 자사 여연생들에게 아주 만족하고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오로지 차기 걸그룹 센터로 찍어놓은 강주희의 인지도와 인기를 높이기 위해 참가를 결정했다.

그래서 일반인 오디션 때 제이크 프로듀서와 오경환 신인개발 팀장이 전혀 의욕이 없었던 것이다.

드래프트 때 써클엔터가 고의로 내가 추천한 인물을 피해서 뽑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것 또한 사실이었다.

전부 박병식의 사주었다.

방송은 피디 놀음.

박병식은 편집과 분량으로 써클엔터가 누굴 뽑든 스타로 만들 자신이 있었고, 써클엔터도 악마의 재능이라 불리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는 박병식을 믿었다.

비록 나에게 어드바이저 비로 5백, 수진이 보상금으로 5억을 냈지만, 인기 프로에서 푸쉬를 받을 수 있다면 써클엔터 아니어도 5억 5백 정도는 기꺼이 포기할 기획사가 수두룩하다.

왜냐하면, 기획사는 아이돌 홍보를 위해 그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 리얼리티를 예로 들면 제작비를 최소로 잡아도 회당 5천이다.

너튭에 올라오는 기획사에서 만드는 자사 컨텐츠를 말하는 게 아니다.

티비에 방영되는 아이돌 리얼리티를 말하는 걸 말하는 거다.

잘 만드는 제작진을 쓰고 퀄리티를 어느 정도 뽑으려면 회당 제작비가 1억을 훌쩍 넘는다.

보통 6회분이니 최소로 잡아도 3억, 어느 정도 퀄리티 있게 뽑으려면 6~7억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제작비는 전부 기획사가 부담한다.

방송국 기획이 아니라, 기획사가 기획, 제작해서 방송시간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에 들어가는 돈이 이렇게 많다.

홍보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고, 팬서비스에 가까운 아이돌 리얼리티에도 이런 돈을 쓰는데, 5억 5백 포기하고 인기 오디션 프로에서 광푸쉬를 받는다는 건 거저나 다름없다.

나 같았어도 박병식을 택했을 것이다.

써클엔터는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놓칠 수 없었던 김유라만 박병식의 양해를 얻어 선발한 후 나머지는 전부 내가 추천한 연생을 피해서 뽑았다.

누굴 뽑든 박병식이 띄어주겠다고 약속했고, 박병식은 약속을 지켰다.

써클엔터에 뽑힌 연생들은 분량과 서사의 은총을 받아 인기가 오르고 있다.

박병식은 만약을 대비해 연습생 평가서라는 언제든지 터트릴 수 있는 폭탄을 나에게 심어 놓고, 내가 그를 반대하거나 반항하면 1차로 편집으로 나를 비호감으로 만들고, 2차는 기사로 결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내 인기가 박병식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고,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살 수 있는 내 직설적인 발언을 여과없이 내보냈음에도 팩트폭행이라고 오히려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기사가 터졌으니, 기대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고 아주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혹평한 연생 팬들이 전부 내 안티가 되었고, 방송이 처음이라 방송용 멘트 할 줄 모르는 초짜에서 무자비한 팩트폭력배로 내 이미지와 캐릭터가 바뀌었다.

“박병식, 나랑 둘이 있을 때, 내가 몇 마디 하면 꼼짝 못 하길래, 피디 직함 빼면 별 볼 일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곰의 탈을 쓴 여우였네.”

“여우니까 방송을 자극적으로 잘 만드는 거지. 오디션 프로로 막장 드라마를 어찌나 잘 만드는지, 박병식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보는데도 재밌어. 분할 정도야. 정말 악마의 재능이라니까.”

나 출연한다고 아이돌 메이킹 시청하다가 푹 빠진 사람이 몇 있다.

누나도 그중 하나다.

누나는 오디션이 아니라 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꼬박꼬박 챙겨보는데, 특별히 응원하는 연생은 없다.

트레이너인 누나의 직업병 때문이다.

누나는 무대, 연습장면이 나오면 연생들 부족한 부분이 계속 눈에 들어와서, 지적하고 혼내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시청한다고 한다.

“그나저나, 임상욱 부인이랑 박병식은 둘이 그렇게 좋으면 이혼하고 재혼해서 마음 편히 살지, 왜 계속 불륜관계로 지내는지 이해가 안 되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둘 사이에 애까지 있으면서.”

“박병식 전화 도청하고 감시하면서 알게 된 건데, 박병식이나 여자나 둘 다 이혼할 생각 추호도 없어. 불륜이 스릴 있고, 더 불타오른다면서 옛날에 둘이 연애할 때보다 지금이 더 좋대.”

“똑같은 인간들끼리 만난 거구나. 임상욱은 누구 탓할 입장이 안 되고, 박병식 와이프만 불쌍하게 됐네. 박병식네는 애가 없으니 다행인 건가 불행인 건가, 헷갈리네.”

“하나도 안 불쌍해. 박병식 와이프는 문화센터 노래 강사와 종종 즐겁게 지내거든.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박병식 와이프가 박병식보다 더 일찍 바람피웠어. 상대 여러 번 바꿔가면서.”

“아니, 우리나라가 무슨 불륜의 왕국이야?! 여기도 불륜, 저기도 불륜. 왜 이렇게 불륜이 많아! 대체 나라가 어찌 되려고....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정말 걱정된다. 걱정돼.”

너무 많은 불륜에 분개하자, 누나는 상습적으로 혼외정사를 일삼는 악당을 말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부인 말고도 9명이나 임신시킨 악당은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얌전히 두 손을 들었다.

“항복”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가 총을 쏘고,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를 부는 것처럼, 누나가 손가락 하나만으로 나를 항복시키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후~하고 불었다.

비서실장.

모든 기업에서 인정하는 요직이다.

이름은 똑같은 비서실장이라도 대우는 회사에 따라 제각각이다.

대표가 얼마나 믿고 신뢰하냐에 따라 부장 대우를 받는 이도 있고, 임원급의 대우를 받는 사람도 있다.

그룹 총수를 보좌했던 어느 비서실장은 그룹 부회장급 대우를 받기도 했다.

송윤석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이형문은 계열사 사장급의 대우를 받는다.

그를 보좌하는 비서가 있으며, 회사에서 차와 기사도 제공한다.

밤 10시.

경기도 일산의 전원주택단지.

최근 유행한 타운하우스가 아닌, 마치 미국에서 볼 법한 커다란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는 고급 주택 단지다.

단지 내 어느 집 앞에 고급승용차가 멈춰 섰다.

기사가 얼른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자, 이형문이 차에서 내렸다.

기사는 대문을 지나 정원 걷는 이형문의 등을 향해 인사하고는 차를 몰고 떠났다.

창가에 불이 켜진 걸 봐서 집에 누군가 있는 게 분명했으나, 현관을 들어서는 그를 맞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운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이렇게 산 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형문은 샤워하고 진열장에서 스카치위스키를 꺼내 유리잔 반 정도를 따랐다.

그리고는 그의 방으로 돌아가 오디오를 켜고 FM 클래식 채널에 맞췄다.

스피커에서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온다.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가 있는 안락의자로 향했다.

형문은 위스키 잔을 안락의자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위스키를 음미하며 음악에 빠진다.

하루 중 가장 기분 좋고 편안한 시간.

이대로 잠드는 것이 형문이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다.

그러나 안락하고 편안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느 직장인이라면 가끔은 일부러 전화를 피하기도하겠으나, 그는 송윤석이 언제 연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단 한 통도 전화를 놓칠 수 없었다.

[MODILUV 대표 권혜진]

발신인의 이름을 보는 순간 이형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MODILUV는 인터넷 쇼핑몰이다.

결코, 태명 백화점의 실세인 이형문이 직접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정도로 큰 업체가 아니다.

많고 많은 중소 여성 의류 쇼핑몰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백화점에 입주한 업체도 아닌 쇼핑몰 사장 전화번호가 그의 폰에 저장된 이유는 권혜진이 그의 처제이기 때문이다.

처제에게 온 전화에 그의 인상이 일그러진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모르는,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이.

<무슨 일이지?=""/>

이형문이 차갑게 전화를 받았으나, 저쪽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로웠다.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너무="" 딱딱한="" 거="" 아냐?="" 나랑="" 잘="" 때="" 형부="" 거기보다="" 더="" 딱딱하잖아.=""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옛날=""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이형문은 혜진에게 쌓인 원한 너무 많아서, 이 정도 비꼼은 화도 안 난다.

<용건이나 말해=""/>

<칫, 재미없어.="" 형부="" 옛날에는="" 참="" 재밌는="" 사람이었는데="" 변해도="" 너무="" 변했어.="" 이러니="" 언니가="" 맨날="" 흉보지.=""/>

부인도 처제랑 여러 의미로 똑같은 여자다

자매가 쌍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 열 받게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서 그녀들을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저주하고 원망하는 여자들.

<일 없으면="" 끊어.=""/>

<미주./>

미주는 혜진의 둘째 딸.

미주의 이름이 나오자 정말로 종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었던 형문이 손이 멈췄다.

의무감이 아니다.

연락을 거의 끊고 살았던 혜진인데, 미주에게 무슨 일이 있길래 그에게 연락했는지 순전히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속으로 나쁜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물었다.

<미주가 왜?=""/>

<미주 큰일="" 났어.="" 도와줘.=""/>

<무슨 일인데?=""/>

<친구랑 싸웠어=""/>

<그래서?/>

<미주랑 싸운="" 애=""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어.=""/>

<여자애가 손으로="" 때려서="" 손목이="" 부러질="" 리가="" 없고,="" 대걸레="" 자루로="" 때리기라도="" 한="" 건가?=""/>

<때리긴 뭘="" 때려.="" 말다툼하다가="" 저쪽="" 애가="" 먼저="" 달려든="" 거고="" 미주는="" 떨쳐낸="" 거야.="" 그런데=""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다가="" 잘못해서="" 부러진="" 방어한="" 거라고.=""/>

미주가 고3인데 친구랑 싸웠다고 했으니 다친 애도 고3.

수능이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중요한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으니, 다친 애 부모가 얼마나 화가 났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저쪽 부모가="" 미주="" 가만="" 안="" 두겠다고="" 날뛰고="" 있어.="" 웬만하면="" 나도="" 오빠한테="" 전화하고="" 싶지="" 않은데,="" 하필="" 다친="" 애="" 아빠가="" 검사고,="" 엄마는="" 변호사라=""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

아무리 검사라도 같은 반 애들끼리 싸우다가 다친 것으로 감옥에 보내진 못한다.

그러나 조사 핑계로 경찰서 들락날락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학생인 미주가 경찰 조사를 받는다는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고, 학교 측을 압박해 미주 생기부에 학교폭력 가해자하고 기재하기라도 하면 대학은 끝장이다.

<크큭, 검사="" 아빠에="" 변호사="" 엄마라.="" 아주="" 제대로="" 걸렸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인데="" 전화해서="" 농담부터="" 할="" 여유는="" 있나="" 보군.=""/>

형문은 혜진이 어지간히 그에게 부탁하기 싫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형문이 혜진을 증오하듯, 혜진도 형문을 경멸하니까.

소중한 딸의 미래가 걸린 심각한 상황이라 형문에게 연락하긴 했으나, 차마 바로 말 못 하고 장난투로 시간을 끈 것이다.

혜진의 불행은 그의 행복.

그는 위스키 한 모금을 넘기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도와줘. 미주="" 구해줘.=""/>

<왜 나지?="" 네가="" 아는="" 그="" 많은="" 남자="" 중에="" 검사=""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

<한심하군./>

이래서 형문한테 전화하기 싫었다.

그러나 혜진이 아는 사람 중에 검사를 구슬릴만한 사람이 형문 말고는 없었다.

<나는 얼마든지="" 비웃어도="" 좋으니="" 미주는="" 도와줘.="" 오빠="" 나는="" 싫어하는="" 거="" 알아.="" 이해해.="" 하지만="" 아니잖아.="" 안="" 본="" 지="" 오래되긴="" 했어도="" 미주="" 어렸을="" 때="" 많이="" 이뻐했잖아.=""/>

<착각이 심하군.="" 권민주,="" 권미주,="" 그리고="" 이채린,="" 이채은,="" 이채원.="" 전부="" 역겨워.=""/>

<이형문. 욕하려면="" 나만="" 욕해.="" 애들한테는="" 하지="" 마!="" 애들은="" 죄="" 없어.=""/>

<어떤 남자라도="" 전부="" 자기="" 자식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남의="" 자식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나처럼="" 돼.="" 단="" 한="" 명이라도="" 내="" 자식이="" 있었다면,="" 다른="" 애들에게도="" 최소한의="" 측은지심은=""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니지.="" 다섯="" 명="" 너희="" 두="" 자매가="" 나를="" 농락한="" 더러운="" 증거일="" 뿐이야.=""/>

형문이 한 집에 사는 채린, 채은, 채원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언니 혜수에게 들어 알았으나, 설마 싫어하고 증오할 줄은 몰랐다.

혜진은 형문에게 도움을 받는 걸 포기했다.

그래도 이대로 끊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래 우리가="" 너="" 등쳐먹으려고="" 너한테="" 꽃뱀="" 짓="" 했어.="" 인정해.="" 그런데="" 넌="" 우리="" 원망할="" 자격="" 없어.="" 원망하려면="" 니="" 좆을="" 원망해.="" 내가="" 조금="" 유혹했다고="" 곧바로="" 발정나서="" 달려든="" 건="" 너니까.=""/>

<아아, 맞는="" 말이야.="" 그래서="" 니="" 언니년이랑="" 애새끼들을="" 셋이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까지="" 보내주고="" 있는="" 거야.="" 하지만,="" 너와="" 딸년들은="" 내="" 알="" 바="" 아냐.="" 너도="" 원망하려면="" 나="" 말고="" 네="" 언니,="" 아니지="" 민주보다="" 6개월="" 먼저="" 생긴="" 채린이를="" 원망해.="" 민주가="" 생겼으면="" 부인은="" 언니가="" 아니라="" 네가="" 됐을="" 테고,="" 그럼="" 권민주,="" 권미주는="" 이민주,="" 이미주가="" 반대로="" 이채린,="" 이채은,="" 이채원은="" 권채린,="" 권채은,="" 권채원이="" 되었을="" 테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혜진은 한마디 대꾸도 못 했다.

현재는 정신차리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해도, 어렸을 때 미래 생각 안 하고 헤프게 놀기만 했던 탓에 돌아온 그녀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혜진이 씩씩거리자 형문은 신재윤 기사 건이 계획대로 안 풀려서 꿉꿉했던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한마디 더="" 하면="" 회사="" 일이="" 잘="" 안="" 풀려서="" 종일="" 기분이="" 좋았는데,="" 미주="" 얘기를="" 들으니="" 다="" 풀렸어.="" 덕분에="" 편히="" 수="" 있겠어.=""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마워.=""/>

전화를 끊기 전에 감사인사도 잊지 않았다.

일이 계획대로 안 풀려 찝찝한 하루였으나, 마무리는 무척 상쾌했다.

형문은 안락의자에서 음악을 들으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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