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016. 광명의파수꾼 (下)
* * *
***
폭풍우가 몰아치는 새벽. 창백한 가로등이 솔빈을 비추며 깜빡거렸다.
솔빈은 상처를 가린 붕대를 부여잡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 죽고 싶구나… 변소 밖으로… 천사가 추락해… 죽고 싶구나… 죽고 싶구나… 더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
오늘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재떨이로서, 허벅지에 담뱃불을 지져지며 충실히 그 임무를 수행해냈다.
샌드백으로서, 화가 풀릴 만큼 유리그릇에, 각목에, 고무호스에, 얻어맞았다.
‘ 아흑…! 아빠…! 경찰은 제가 그런 게… 히끅…!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
고무호스에 한 번. 내성이라도 생긴 건지, 드디어 감각이 미쳐버린 건지, 제법 견딜 만했다.
‘ 끄으윽…! 제발… 그만…! 반항 안 할게요…! 제가 벗을게요…! ’
각목에 한 번. 두피라도 찢겼는지 머리에서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살아는 있었다.
‘ 버, 벗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때려주… 아…! ’
유리그릇에 한 번. 여전히 살아는 있었는데 중간에 기절이라도 했었는지 기억이 뭔가 어정쩡했다.
토막 난 시체처럼 이리저리 흩어져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아… 빠… ’
이윽고 깨진 유리 파편에서 뒹굴며, 아버지에게 강간당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생겼다.
가족의 성욕을 해소해준 거라며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보려 해봐도.
누군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윤간을 당한 것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정말 지겹도록 얻어맞았고 정말 지겹도록 더럽혀졌고 정말 지겹도록 정신이 나갔다.
‘ 죽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 ’
유리 파편에 베였던 피부는 점점 걸레짝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슬슬 죽으려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찾고 있는 것은 병원이 아니었다.
물론 경찰서도 아니었다. 바로 동네에 딱 하나 있는 작은 마트였다.
‘ 어디였더라… 아… ’
마트에 도착했을 때쯤. 그녀의 모습은 비 오는 날에 무덤에서 기어 나온 좀비 같았다.
맹렬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 우산도 쓰지 않고 걸어 온 탓이었다.
점원이 깜짝 놀라서 졸도해서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어서… 오세요. ”
하지만 점원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곧장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 저, 저… ”
“ 소주는 저쪽에 있습니다. ”
솔빈이 말을 걸려고 하자 점원은 단박에 끊으며 술이 잔뜩 진열된 곳을 가리켰다.
마트에서 일하는 그는 정말 본의 아니게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동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1년 전만 울해도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솔빈의 기구한 사연도 알고 있었다.
“ 사장님, 점마 저거 진짜 걍 냅둬도 되는 겁니까? ”
“ 뭐. ”
“ 아니, 씨바… 저거,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거 아입니까? 제가 보기엔 살아 있는 게 기적 같은데… ”
“ 걍 내비두라… 내도 어제 들은 긴데, 점마 집에 조폭이 들락날락 거린다더라. ”
“ 조폭이예…? 그럼 점마 아빠가 조폭이란 겁니까? ”
“ 내도 모르지. 근데 확실한 건 그다지 연관되지 않는 게 편할 거란 기다. 점마 구한다꼬 점마가 돈을 준다 카드나? ”
“ 그건 아인데… 그래도 불쌍하다 아입니까. ”
“ 우리나라는 남을 도우려면 니가 고소를 당할 건 각오해야 되는 거 알고 있제? ”
“ 예, 걍 아가리 닫고 있겠심더… ”
물론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솔빈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괜히 나섰다가 폭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서로에게 끊임없이 폭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었다.
“ 저, 저… ”
“ 아, 네… 담배도 사는 거죠? 담배는 늘 사던 걸로 사가면 되나요? ”
“ 네, 네… ”
솔빈이 카운터에 술병을 올리자, 점원은 익숙하단 듯이 담배도 올렸다.
누가 봐도 성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도 신분증은 검사하지 않았다.
근처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사장도 못 본 척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 18, 900원입니다. ”
“ 도, 돈이… ”
화폐의 가치를 잃었을 만큼 빗물이 흥건하고,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한 지폐를 건네도 묵묵히 받았다.
“ 아, 괜찮습니다. 은행 가면 바꿔 주죠, 사장님? ”
“ 엉…? 아… 그렇지… ”
자신들은 솔빈을 도왔다며. 남들과 똑같은 방관자는 아니라고. 죄책감을 떨쳐냈다.
“ 봉투에 담아서 드릴까요? ”
“ 네, 네… 다, 담아… 주세요… ”
솔빈은 이내 술병과 담배를 가득 담은 검은 비닐봉지를 받을 수 있었다.
솔빈은 골목길을 지나서 공원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가 지친 솔빈은 쓰러지듯이 정자에 주저앉았다.
빗물에 흠뻑 젖은 교복이 차가웠다. 돌풍이 휘몰아치자 손발이 더욱이 얼어붙었다.
아버지한테 혼나기 싫어서 열심히 뛰었더니 체력도 바닥났다.
결국 잠깐만 쉬자고 생각한 솔빈은 정자에 올라가서 드러눕더니, 고슴도치처럼 전신을 웅크렸다.
생기를 잃은 듯한 공허한 시선으로, 습관처럼 주변을 관찰했다.
“ 솔빈아? ”
감각이 사라져가는 손발을 옷자락으로 간신히 녹이고 있었더니, 문득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상냥했다. 어딘가 따뜻했다. 방금까지 차가웠던 손발이 난로라도 켠 듯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론, 점심으로 먹었던 게 올라올 듯한 역겨움도 느껴졌다. 솔빈이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경민이 있었다.
“ 솔빈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해? ”
경민은 쓰고 있던 우산을 접더니, 태연히 웃으며 정자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벌벌 떨었다.
경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재빠르게 움직여,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몰래 확인했다.
그러자 당황한 솔빈이 비닐봉지를 끌어안아, 내용물을 다급히 감추고선 말했다.
“ 아버지 심부름…! 저, 저는… 술… 어, 엄청 싫어요… ”
“ 아, 그래? 딱히 나는 아무런 말도… ”
“ 그, 그리구… 이, 이젠… 저한테 신경 쓰지 말았으면… 조, 좋겠어요… ”
갑자기 거리를 두는 솔빈의 행동에, 경민은 정수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잠깐 천둥이 번쩍여서, 아주 잠깐 그녀의 모습이 보였을 때.
“ 에…? ”
경민은 얼어붙었다. 어두워서 여태까지 못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 솔빈아, 다쳤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경민은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서 황급히 솔빈의 상처를 살폈다.
솔빈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경민이 착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경민의 손길이 어깨에 닿는 순간, 문득 안 좋은 소문이 떠올랐다.
‘ 야, 너는 경민이가 너한테 잘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 ’
‘ 모, 모르겠는… 데요… ’
‘ 어째서 너한테 잘해주는지, 솔직히 너도 궁금하지? ’
‘ 겨, 경민 선배는… 차, 착하니까… 그런 것 같은데… ’
‘ 풉… 푸흡… 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너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
‘ 그, 그게 무슨… 의미죠…? ’
‘ 경민이한테 넘어간 여학생이 몇 명이라고 생각해? ’
‘ 그, 글쎄요… ’
‘ 겉으로 티를 안 내는 사람을 생각하면… 전교생이라고 봐도 무방해. ’
‘ 저, 전교생이요…? 아, 아무리 그래도… 전교생은… ’
‘ 믿든 말든 자유지만… 경민이는 우리 학교 여자애들 전부 한 번씩 먹어봤거든. ’
‘ 저, 저… 표현이… 겨, 경민 선배를 나쁘게 말하는 건… 저도… ’
‘ 닥치고 들어. 알기 쉽게 말하자면 경민이는 모든 히로인을 공략한 거야. 단 한 명의 히로인을 빼놓고. 그리고 그 단 한 명은… ’
‘ 네…? 그, 그럼 설마… ’
‘ 그래, 바로 너야. 경민이가 너한테 잘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 너만 먹어보면 우리 학교 여자는 전부 먹은 거니까. ’
‘ 마, 말도 안… 돼요… 그, 착한… 겨, 경민… 선배가… ’
‘ 그럼 생각해봐. 경민이가 너한테 잘해줄 이유가 뭐가 있는지. 돈? 얼굴? 아니면 그냥 단순히 착해서? ’
‘ 겨, 경민 선배는… 착한데… ’
‘ 그럼 어째서 낮에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녔을까? ’
‘ 네…? 아… ’
‘ 이제 알겠지? 경민이한테 너는 그냥… 먹어 보고 싶은 음식 중에 하나야. 너도 괜히 감정 낭비하지 말고 그냥 피하는 게 어때? ’
솔빈은 갑자기 경민의 손길이 정말 한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토가 나올 것만 같이 역겨워서, 한시라도 빨리 경민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다.
솔빈은 공원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민의 손길을 뿌리쳤다.
“ 솔빈아? ”
“ 집… 가야… 돼요… 아빠한테… 맞아요… ”
솔빈의 이야기를 들은 경민은 주먹을 움켜쥐고 이빨을 빠득빠득 갈았다.
경민의 강렬한 시선에 겁을 먹은 솔빈은 움찔거리더니 거리를 벌렸다.
“ 도, 도대체… 저한테…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도대체 저한테 뭐를 바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
경민은 고개를 숙이고 정수리를 긁적이다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 솔빈아, 우리 집에서 살지 않을래? ”
굉장히 생뚱맞은 이야기. 더러운 속셈이 훤히 보였다.
솔빈은 말문이 막혀서 싸늘한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거렸다.
경민은 솔빈의 냉담한 반응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수습했다.
“ 아, 아니… 그러니까… 나, 나 사실 게이니까 안심… 아니, 무슨 소리야… 개수작 부릴 생각 없으니까… ”
솔빈은 멍하니 경민의 이야기를 듣다가 냉소를 흘리더니 이야기를 끊었다.
“ 당신의 목적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어째서 저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
“ 제가 당신한테 반해서 다리라도 벌리면, 날름 따먹고 버릴 생각인가요…? ”
“ 누가 누가 많이 따먹는지 겨루는 천하제일 창남 대회라도 열었나요…? 저만 따먹으면 이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솔빈의 혓바닥은 마치 방금 사서 포장을 뜯은 식칼의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원한이 서린 독기를 입안에 가득히 머금고, 표독스러운 독살을 미친 듯이 뇌까렸다.
솔빈의 이야기에 논리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한 쌍욕에 가까웠다.
얼른 꺼지라고 말하는 듯이, 가까이 오지 말라며 가시를 세웠다.
그러나 경민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솔빈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솔빈의 가시를 보란 듯이 피하고 있었다.
“ 있잖아요… 선배… 제가 이 마을에서 어떤 위치인지… 선배는 알아요…? ”
“ 지금 저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제가 이따구로 다녀도, 남들은 저한테 아무런 관심도 안 가져요… ”
“ 심지어 경찰도 저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그렇다면… 선배가 저한테 관심을 가질 만한 합당한 이유는 뭘까요? ”
“ 바로 제가 말한 이유예요…! 당신은 단순히 저처럼 만만한 찐따년을 먹버하고 싶은 게 전부잖아요…? ”
“ 어때요… 빡치세요…? 그럼 어디 한번 저한테 쌍욕 좀 해보세요. 이제 어차피 저는 눈치 깠고 이젠 글러 먹은 거잖아요. ”
“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아예 복날에 개 패듯이 패서 스트레스라도 좀 풀어보죠…? ”
“ 왜죠? 어째서 저를 안 때리는 거죠?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거죠…? ”
“ 여자들 다리 벌리려고 온갖 가식을 떠는 게 일상이라, 이제는 그게 당신의 본모습처럼 느껴지시나요…? ”
“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얼른 제 앞에서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세요! ”
솔빈은 이미 정신이 나간 듯, 충혈된 눈알을 마구 부라리며 폭언을 퍼부었다.
하지만 경민은 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은 미량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
“ 에…? ”
경민은 그저, 솔빈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솔빈의 눈동자는,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에 금이 가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솔빈은 다시 피해망상에 찌든 혓바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인내심은 인정해요. 전교생을 따먹으려면 역시 인내심은 필수 덕목이죠. 안 그래요? ”
“ 그래도 씨발 당신은 여전히 존나게 비열한 개새끼예요…! 사건을 해결하고 싶은 연기, 저를 구하고 싶은 연기…! ”
“ 위선으로 칠갑한 페르소나를 덮어쓰고, 지들끼리 좆같은 연기나 펼쳐대며 죄책감을 덜고 싶은 게 전부죠…! ”
“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당신들이 보기엔, 지금 저를 보고 있는 당신이 보기엔, 그냥 미친 정신병 환자가 지껄이는 개쌉소리 같죠? ”
“ 증거 드릴까요? 지금 제가 놓인 이 상황이 가장 명확한 증거예요. 알아요? ”
“ 아, 그래. 맞다. 제가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인생 얘기나 한번 해볼까요? ”
“ 2005년 6월 24일 출생. 유치원생 시절까진 평범하게 살았죠. 아니, 존나 잘살았죠. 아파트 두 개. ”
“ 근데… 당시에 같이 살던 큰아버지가 투자를 잘못해서, 아파트 하나를 통째로 말아드셨어요. 그리고 잠적했죠. ”
“ 그래도 괜찮아요! 아직 아파트가 하나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아이쿠, 이런! 갑자기 외삼촌이 나타나서 사업으로 날려먹었네요? ”
“ 괜찮아요, 아직 괜찮아요! 우리 할아버진 부자셨거든요! 저한테 물려준다고 하셨던 땅도 많아요! ”
“ 그런데 짜잔! 여태까지 잠수 타다가 할아버지 장례식이 돼서야 나타난 큰아버지가 고모라는 년과 작당해서 할머니를 꼬시고… ”
“ 어라라? 분명히 제 것, 저희 가족 것이었을 땅이 갑자기 남의 땅이 됐어요! 놀랍죠? 이게 마법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마법이죠? ”
“ 이거라면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아직 빚은 없잖아요? 근데 갑자기 외할머니가 씹창 나셨더라구요? ”
“ 하반신 마비! 대단해요! 외할아버지 유산을 깡그리 외삼촌한테 넘겨서 날린 주제에, 간병은 우리 엄마! ”
“ 병원비 수천만 원은 그대로 엄마가! 그리고 외삼촌과 잠깐 살 때, 보증금도 외삼촌이 깡그리 털어서 날려 먹었죠! 와우! ”
“ 정말 호구 같은 가족이죠? 정말 믿기지 않죠? 네, 저도 믿기지 않아요! 이런 가족이 소설이 아니라 무려 현실에 있다는 게! ”
“ 소설이면 정말 좋겠네요? 그래두 아직은 희망이 있어요! 아직은 가족이 힘을 합치면 그래도 살 만해요! ”
“ 아, 엄마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해 버리기 전까진요. ”
“ 그후, 아버지는 맨날 저를 때리고 욕하셨어요. 술병으로 대가리 때리기? 허, 그건 씨발 뭣도 모르는 애들 장난이죠. ”
“ 푸흡… 사람들 상상력은 고작 그거밖에 안 되나요? 정말 학대를 당한 사람한테 그건 데미지도 안 들어오는 건데. ”
“ 그거 가지고 어디서 학대라고 말하고 다녔다간, 정말 학대당한 사람들이 식칼로 한 번씩 찔러서 죽여도 무죄예요. 병신들. ”
“ 저는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으로 한번씩 맞아봤어요. 고막도 양쪽 다 한 번씩은 찢겨 봐야 하지 않겠어요? ”
“ 게다가 방금 저는 아버지랑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한테 돌림빵을 당하고 왔거든요. 제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와우. 대단하죠? ”
“ 정말 그것뿐이라면, 그나마 돈이라도 있으면 낫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아빤 배워먹은 게 없는 병신 머저리 새끼라서요. ”
“ 술집 년 자식한테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깡그리 긁어모아서 때려 박고, 사채 써서 지금 살고 있는 달평 마을에 왔죠. ”
“ 후우… 본론에서 조금 벗어났네요. 슬슬 말해보죠. 저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 제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대해서. ”
“ 뭐, 뻔뻔하게 제가 무언가 요구할 입장은 아니긴 해요. 근데 그럼 아예 앞으로는 칼에 찔려도 경찰 부르지 말기로 하죠? 어때요? ”
“ 제가 학대를 부정했다느니, 뭐라느니…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그걸 어떤 모습으로 말했는지 알고는 계세요? ”
“ 전신을 벌벌 떨고, 상처를 가까스로 숨기고, 눈물 콧물 질질 짜다가, 간신히 아가리를 벌려서 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어요. ”
“ 학대를 부정한 건 맞아요. 암요, 그렇구 말구요. 근데 씨발 솔직히 따놓고 말해서 누가 대놓고 말하겠어요? ”
“ 그걸 말하면 아빠가 사라져요? 나중에 안 맞는다는 보장이라도 있어요? 아니, 무슨 사형이라도 되나요? 꼬레아에서? ”
“ 끽 해봐야, 격리 조치. 나중에 저희 아빠가 울딸 보고 싶어요, 하면… 네, 알겠어요! 그럼 풀어드릴게요! 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
“ 애초에, 초등학생이 도대체 뭐를 알고 있겠어요. 함부로 반항하면 아프다는 것밖엔 아무것도 몰라요. ”
“ 실수로 생긴 상처라고 말하도록 세뇌를 받은 나머지, 이젠 정말 제 실수인가, 하는 착각도 들어요. ”
“ 물론 지금 저를 보고 있는 당신은 평생 모를 거예요. 그리고 경찰도 모를 거예요. 아무도 모르겠죠. ”
“ 평생을 평온한 가정에서 평온하게 자라면서 평온하게 공부하고 평온하게 뛰놀고 평온하게 감성도 조금씩 팔아보고. ”
“ 그러니까 저같은 병신 머저리 씹새끼의 심리는 모르겠죠. 제가 아빠가 싫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요? ”
“ 너는 진짜 병신이냐. 왜 그리 부모 욕을 처하면서 처 질질 짜고 있는 거냐. ”
“ 물론 나는 니새끼 같이 안 자라고 평온하게 자라서 니 심정 좆도 이해 못한다. ”
“ 느그 애비는 콘돔 안 쓰고 도대체 뭐 한 거냐. 그게 죄라면 죄다. 병신년아. ”
“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이거 봐요, 당신이 저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
“ 애써 얼굴 아죽 비틀어 만든 티 팍팍 나는 가면 밑에 보이는 추악한 본성. 진심. 현실. ”
“ 후우… 가불기 대단해요. 힘든 티를 내지 않으면 멀쩡하게 잘살아놓고 왜 지랄이냐. ”
“ 힘든 티를 조금이라도 내면, 씨발 왜 힘든 티를 내냐. 너만 힘드냐. 전부 힘들다. ”
“ 그렇게 남들한테 관심 많고 간섭도 많이 하면서 어찌 그리 나같은 사람한텐 한없이 무관심한지 몰라요. ”
“ 결국 학대를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니까… 본인들은 충분히 죄책감을 덜었으니까… 그러니까 관심을 껐잖아요. ”
“ 제가 얼마나 좆같이 살았는지, 제가 얼마나 개같이 비명을 질렀는지, 제가 얼마나 악착같이 이빨을 빠득빠득 갈면서 버텼는지… ”
“ 당신은 전혀 몰라요. 당신은 관심도 안 가질 거예요. 당신들은 충분히 죄책감을 덜었잖아요? 아, 물론 저는 허락을 안 했지만. ”
솔빈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상태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면서 흐느끼더니, 이내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경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술병이 굴러서 떨어지는 소리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듯이,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솔빈한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솔빈은 여전히 경민의 손길을 뿌리치고, 온기라곤 전혀 없는 시선과 단호한 턱선으로 입을 열었다.
“ 당신이 저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죠? 그럼 무슨 대단한 영웅 같아요? ”
“ 저같은 병신년 수준에 맞춰서 위선으로 어울려 주고 있으면, 무슨 도덕적 우월감 들어서 기분 좋았나요? ”
“ 그딴 좆같은 행동에 오르가즘 느껴요? 아, 그럼 아예 강간도 해보는 건 어때요? 저를 강간하는 것쯤은 쉽잖아요. ”
“ 신고는 안 해요. 아니, 해도 관심도 없을걸요. 죄책감? 제가 이렇게 욕을 지껄였는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나요? ”
“ 설령 당신의 마음이 전부 진짜였어도… 이미 늦은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예요. ”
“ 그리고 당신들이 시험공부 좆같다고 한가롭게 한탄 할 떄, 저는 머리카락 쥐어뜯기고 강간당하면서 살려달라 빌고 있겠죠. ”
솔빈이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경민이 똑바로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경민은 무언가 확고하게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 정말로 강간…! ’
솔빈의 동공이 극한까지 확장됐다. 그녀는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목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입술을 벌벌 떨고 마구 뒷걸음질을 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깨진 술병의 파편을 잡고 경민한테 겨누었다.
“ 오, 오지 마세요…! 하, 하지 마세요… 더 이상은… 저… 못 견디겠… 히끅…! 자, 잘못했…? ”
솔빈이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찔끔 흘린 순간. 경민은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 에…? ”
솔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민은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이제 전부 깨달았는데…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
“ 무슨… 의미죠… 그것보다 이것 좀 놔주시면… ”
“ 좋아해. 사귀자. ”
“ 네…? 무, 무슨… ”
순식간에 이상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 나도 몰랐어. 내 행동이 정말, 나도 이해가 안 되더라. 니가 뭔데? 니가 뭔데 내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거지? ”
“ 그런데 이제 알았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던 것 같아. 이렇게 말하면… 방금처럼 창남이니, 뭐니 그런 소리 들을라나… ”
“ 솔직히 너도 내가 너를 어째서 좋아하는지 의문이 들 거야. ”
“ 자랑으로 들릴지 어떨진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많은 여학생들한테 고백을 받았잖아. ”
“ 그런데 전부 차고 너한테 이러고 있는 이유가, 너도 궁금할 거 아니야. ”
“ 흐음… 말이 꼬여서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있잖아, 옛날부터 그게 궁금했어. ”
“ 우리 반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아이와, 우리 반에서 고백만 5번은 받는 나의 차이. ”
“ 솔직히 별반 다르지 않았거든. 나도 애들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했고, 걔도 애들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했어. ”
“ 사회성? 글쎄, 나도 어디서 사회성 좋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찐따 소리는 정말 많이 들어봤는데. ”
“ 사실상 걔랑 나의 차이는 없어. 그런데 어떻게 대우가 그렇게 다를 수 있는 건지 정말 의문이었어. ”
“ 굳이 차이가 있다면… 얼굴. 수저. 사람의 인품과는 사실 별로 상관 없는 부분들이, 아주 약간 달랐다고 생각해. ”
“ 딱히 그 친구를 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 친구는 잘생겼다기에도 무리가 있었고 잘산다기에도 무리가 있었으니까. ”
“ 잘난 척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잘생겼다는 소리도 그냥저냥 들어봤고… 잘산다는 소리도 그냥저냥 들어봤으니까. ”
“ 보통은 그게 뭐가 문제냐, 그냥 그걸 누리면 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텐데 나는 그런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 ”
“ 아, 사람들은 내 성품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물고 있는 수저와 내 얼굴을 좋아하는 거구나. ”
“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그걸 빼면 정말 좆도 없는 쓰레기구나. 나한테 그것들이 없다면. 나도 똑같은 취급이구나. ”
“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한테 좋다고 들이대는 애들한테 신물이 나더라. 정말 더럽고 역겹게 느껴졌어. ”
“ 그래서 그런 부류의 애들은 모조리 피하게 됐어. 그리고 나는 마침내 너를 만난 거야. ”
“ 처음은 정말 단순한 호기심. 그리고 우연히, 너만큼은 나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 ”
“ 그래서… 좋아졌어. 그러니까… 뭐냐… 우리… 사귈래? ”
“ 지금은 내가 못 미더울 수도 있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진 몰라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면… ”
“ 나를 못 믿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고백을 거절해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생각이야. ”
솔빈은 멍하니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들을 떠올렸다.
솔빈을 도우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적잖이 있었다. 하지만 솔빈은 모두 내쳤다.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돕고 싶은 게 아니었다.
신고자는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솔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솔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상이 심각해서 잠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는 곧장 귀가 조치. 누가 봐도 학대인데 의사는 침묵했다.
그렇다. 그건 솔빈을 위한 게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동에, 우연히 솔빈이 포함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경민은 무언가 달랐다. 그는 정말 진심을 담아서 말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추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경민의 손길이 따스했다.
어제 들었던 소문이 무색하게, 경민이 자꾸 상냥하게만 보였다.
솔빈은 경민의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어서, 경민한테 안겼다. 그러자 경민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저는요… 유치원에서… 부모님이 저를 아끼고 계신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전혀 아니더라구요… ”
“ 방치. 폭행. 폭언. 강간. 정말… 지옥 같았어요… 그리고 남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요…! ”
“ 상식적으로, 이상하잖아요…? 가족이 저한테 관심이 없는데… 혈육이 전부 저를 버렸는데… ”
“ 그런데 남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당신이 저한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
“ 방금 고백… 정말 진심이에요…? 저요, 강간당했다구요…? 더럽다니까요…? ”
“ 얼굴도 별로 안 예쁘고… 피부도 별로 안 좋구… 몸에 흉터도 많아요… ”
“ 성격도 전혀 안 밝고… 저랑 얘기해봐서 아시겠지만… 저 같은 거랑 얘기해봤자, 재미도 하나도 없다구요…? ”
“ 그런데도… 저를 좋아한다구요…? 저랑 사귀시겠다구요…? 당신이요…? ”
“ 저같은 정신병 환자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면… 욕먹을 게 뻔한데도요…? ”
경민은 그녀를 잠시 떼어놓고 솔빈과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솔빈은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손목의 검붉은 바코드를 가렸다.
경민은 올곧은 눈빛으로 솔빈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 그딴 새끼 있으면 씨발 내가 전부 죽일 거야. 그리고 너희 아빠는… 걱정 마, 내가 전부 처리할게. ”
솔빈은 울음을 참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다시금 경민에게 안겨서, 목놓아 울었다.
‘ 죽고 싶지 않아… 아니, 죽기… 싫어… ’
방금까지 정말 죽고 싶었을 텐데.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았다. 죽기 싫었다.
‘ 살고 싶어…! ’
살고 싶었다. 반드시 살고 싶었다. 영원히 살고 싶었다.
솔빈도 며칠 전부터 경민에게 호감은 느끼고 있었다.
경민은 계속해서 그녀한테 말을 걸며 이것저것 신경 써주지 않았던가.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할수록,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할수록, 그 호감은 미친 듯이 증폭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별에게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절망하고 있었다. 정말 자신의 아군은 아무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방금 경민의 눈빛으로, 그건 결단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경민이 있다면 불행의 고리를 얼마든지 끊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 그럼 고백은… 받았다고 생각해도… ”
“ 네… 물론이죠…! ”
솔빈은 활짝 웃었다. 힘들다는 게 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겠다는데, 그게 싫을 리가 없었다.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경민은 쑥스럽다는 듯이 정수리를 긁적였다.
“ 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주, 죽지 않도록…? ”
“ 주, 죽는다니… 농담도… 하하하하… ”
“ 농담… 아닌데… ”
“ 아… 그… 당연하지. 너는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그딴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죽지 않도록. ”
경민의 품에 안긴 솔빈은 광기 어린 미소를 띠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사랑해요… 오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