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060. 속죄의파수꾼 (?)
* * *
마지막 수단. 일전에 계획이 실패하면 어떡할 거냐는 질문을 던졌던 민철에게, 한별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 만약에 실패하면요? 흐음…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애초에 실패할 수가 없는 계획이니까. ’
‘ 그래도 만약에 실패하면… 그러게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게 실패했을 때쯤이면 분명히 경찰하고도 엮이고 있을 테고… ’
‘ 어차피 인생 조진 건데, 그냥 화려하게 엎어버릴까요? 아예 학교에 불을 질러서 전부 죽이고 저도 죽는다거나. 마지막 수단이죠. ’
‘ 그럼 경민이가 자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저를 평생 기억해주지 않을까요? ’
학교를 테러하겠다는 이야기. 현실성이라곤 눈곱 만큼도 없는 개소리였다. 그녀의 태도를 보면 아무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목소리에서 성의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던 데다, 한별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실실 쪼개고 있었으니까.
누가 봐도 농담 같았기에 민철도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어넘겼다. 그때는 자신이 도와주겠다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 당연히 돌았죠. 안 돌게 생겼어요? 제가 정말 인생을 바쳐서,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한 사람이 저를 존나게 싫어한다는데. ”
“ 그래서 그냥 전부 끝내려구요. 혼자서는 힘든데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예전에 약속하셨잖아요. 도와주시겠다고. ”
하지만 지금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한별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그딴 미친 짓을 실행으로 옮기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는 거다.
“ 그래도 그건… 그건…! 아이다. 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되도 않는 소리 말고 퍼뜩 나온나…! ”
물론 민철은 필사적으로 말렸다. 여태까지 한별이 원한다면 뭐든지 저질렀지만 저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수도 없이 죽여 놓고 이제와서 가식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딱히 죄책감은 없었다. 은하를 직접 칼로 찔러 죽인 그녀에게 아직도 인간성이 남아 있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경민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시점에서, 그딴 것은 기대도 않았다. 하지만 한별이 죽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먹여 살릴 가족도 없는 민철이, 딱히 있을 곳도 없는 민철이, 굳이 살아야 되는 민철이, 여태 살아 왔던 이유가 한별이었다.
‘ 당신… 미쳤어…? 당신 지금…! 자기 딸이 어느 또라이 새끼한테 그딴 짓을 당하고 죽었는데 아빠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
‘ 자기 범죄 들킬까봐 경찰한테도 신고 안 하고 저딴 데다 묻었다는 거야…? 우리 속도 안 썩이고 공부도 잘하고 착한 애를…? ’
‘ 우리 한별이가 뭐를 그리 잘못했는데…? 뭐를 그리 잘못해서 미친 또라이 새끼한테 그딴 짓을 당하고 죽고 뒤져야 되는데…? ’
‘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다음에 제대로 장례식도 못하고 저딴 데다 묻혀야 되는 거냐고…!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
‘ 씨발 니가 사람이냐…? 쓰레기 새끼… 빨리 나가 뒤져…! 아니, 너는 죽어서 한별이 얼굴 볼 자격도 없어…! 평생 그따구로 살아…! ’
‘ 너같은 생 양아치 쓰레기 새끼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
자기 자식의 마지막도 제대로 지켜봐줄 수가 없는 업계에 진절머리가 나서, 손을 떼려던 민철이 아직도 손을 떼지 않은 이유였다.
‘ 다녀왔습니다! 아저씨, 제가 오늘 경민이랑 놀았는데요…
죽은 자신의 자식과 똑닮은 그녀의 미소를 지키고자, 쓰레기장에 태어난 천사의 미소를 지키고자, 구태여 쓰레기장에 남았다.
‘ 행님, 행님 아를 행님이 어떻게 하든 지 알 바가 아닐 지도 모르는데예… ’
‘ 까놓고 말해가, 쪼메난 아새끼 키워가 따먹어 봐야 얼마나 맛있겠심까. ’
‘ 그딴 짓하지 말고 퍼뜩 따라오이소. 제가 좋은 곳 알아놨심더. 행님 취향으로다가. ’
‘ 그니까 앞으론 괜히 아새끼 건들지 말고 갸들한테 가이소. 알겠지예? ’
자기 자식과 같은 그녀에게 손을 대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지켜냈다.
‘ 아저씨, 혹시 용돈… 가불… 안 돼요…? 오늘 경민이랑 놀다가 밥값이랑 차비까지 전부 써버려서… 헤헤… 안 돼요…? ”
이젠 자기 자식보다 자식 같은 그녀가, 돈을 펑펑 써도 괜찮도록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 하아… 아… 아저씨… 경민이가 오늘 다른 여자 애한테… 고백… 받았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
한별을 위해서 아직도 업계에 남아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비단 그런 사람은 민철 뿐만이 아니었다.
‘ 아조씨들, 어디 가는 거예요? ’
‘ 어… 아저씨들? 어… 낚시 가는데. ’
‘ 낚시가 모예요? ’
‘ 물고기 잡는 거다. 근데 그건 만다꼬 물어보는 긴데. 니도 따라올라꼬 그라나? ’
‘ 우웅… 네! 저도 아저씨들 따라갈래요! ’
한별이 어릴 때부터 그녀를 돌봐왔던, 민철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 한별아, 밥묵제이. ’
‘ 네, 아저씨! 갈게여! ’
‘ 오, 한별이 왔나. 자, 입 벌리그라! 아저씨가 고기 먹여주끄마! ’
‘ 이제 애 아니에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젓가락질도 잘할 수 있어요! 보세요! ’
‘ 아, 맞나. 이야, 한별이 다 컸네. ’
먹여살릴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 먹여살리고 싶은 가족을 만들어줬다.
‘ 아저씨들은 근데 왜 맨날 여기 있어요? 집에 안 가요? 가족들 걱정 안 해요? ’
‘ 잉? 아, 뭐… 걍 아저씨들은 여가 집보다 좋다. 가족들은… 글쎄… 없는데. ’
‘ 에… 그럼… 제가 가족할게요! 우리 집에 같이 살아요! 우리 집에 방 엄청 많아요! 아빠도 허락했어요! 이거 봐요! ’
‘ 폰? 뭐꼬, 진짜가… 허… 이아, 우리 행님… 쪼메 의외네… 딸래미가 부탁 한번한다고 우리 집도 챙겨주나… ’
‘ 부탁 한번 아니에요! 엄청 노력했어요! 저, 아저씨들이랑 노는 거 재밌으니까! 헤헤… ’
‘ 맞나… 푸흡… 고맙데이, 한별아. ’
딱히 있을 곳도 없는 이들에게, 안락한 집을 만들어 줬다.
‘ 아저씨… ’
‘ 오, 한별… 뭔데. 니 와그라노? ’
‘ 흐윽… 아빠가… ’
‘ 아따, 그 행님 요새 오락가락하더니… 즈그 딸래미를… 완전히 도라삣네… ’
‘ 근데 우짤꼬… 우리는 뭐 할 수 있는 게… ’
‘ 글타고 가만히 있을 끼가? 이 쪼메난 아가 우리한테 해준 게 얼마고. ’
‘ 일단 행님한테 따르는 척하면서… 뒤에서 우리가 한별이 좀 돌봐줘야제. ’
‘ 한별이 다 클 때까지 돈도 좀 모아주고. 아, 근데 한별이 우리랑 너무 연관되면 안 된 께, 좀 조심들 하그라. 알겠제? ’
딱히 살아야 되는 이유가 없어서 대충 살고 있는 그들에게, 반드시 살아야 되는 이유를 만들어 줬다.
한별에게 있어서 그들은 단순한 놀이 상대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한별은 살아가는 이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한별이 죽어서는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죽겠다고 말하는 한별을 말려야만 했다.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별이 인생을 바쳐서 사랑했던 경민도 실패했다면, 단순한 놀이 상대에 불과했던 그들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후우… 그니까 한별아, 니는… 꼭… 그걸 해야겠다는 말이제…? ”
“ 네, 알잖아요. 제가 어떤 년인지. ”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정말 모든 게 끝난 거다. 옛날과 많은 게 달라진 그녀였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고집. 집착. 원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가지고 이루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이루며,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낸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확실하게 입에 담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려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 하아… 알긋다. 내 혼자도로 부족하긋제? 아마 내 말고도 10명은 부를 수 있을 끼다. ”
“ 정말 다행이네요. 아무리 민철 아저씨가 있어도 학교 정도의 규모면 무리거든요. ”
그렇다면 최소한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여태까지 삶의 이유를 줬던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적어도 민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신경 쓰지도 않았다. 남들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거다.
“ 그래서 우리는 뭐하믄 되긋노. ”
민철이 복잡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한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일단 저는 지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니까 준비 단계는 사실상 아저씨들이 다한다고 보시면 돼요. ”
“ 경민이는 일단 바로 저를 경찰에 신고했을 테니 시간부터 벌어야겠죠. 마침 경민이가 망상 장애 진단받은 서류가 있어요. ”
“ 경찰한테 적당히 보호자라고 속이고 슬쩍 말해주면 알아서 가만히 있을 거예요. 보호자 얘기는 금방 뽀록나겠지만… ”
“ 망상 장애는 의외로 제가 조작한 게 아니라 진짜로 진단받은 거니까. 애초에, 여기 경찰서 사실상 그냥 유배지잖아요. ”
“ 의욕 없고 능력 없고 꿀 빨고 싶은 병신들,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처박아 놓은 거잖아요. 현장 갔다가 고대로 도망갈 겁쟁이들. ”
“ 그러니까 적당히 저런 자료 넘겨주면 진짜 이 악물고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그러는 동안 여러가지 물건들 준비해주세요. ”
“ 화염병, 휘발유… 있잖아요. 여러가지. 그러고 보니까 왕년에 화염병 좀 만들어본 아저씨 있다고 들었는데. ”
“ 일단 적당히 그렇게 준비하고 저희 집으로 와주세요. 저는 준비되는 동안… 조금 쉬고 있을게요. ”
한별이 그렇게 말하자 민철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별은 곧장 휴대폰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경민의 연락처만 저장된 휴대폰. 민철에게도 마지막 지시를 내렸으니 이제는 가지고 있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하아… ”
한별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안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질리지도 않는지, 경민의 사진을 바라보며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 후읏…! 경민아… 화요일에… 히끅…우, 으으… 히얏…! 만나러 갈게엣…! ”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살인마의 집안엔, 쾌락에 젖은 신음만이 하루 종일 울려퍼지고 있었다.
***
2018년 9월 17일 월요일. 창문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참새가 지저귀는 아침.
경민은 오랜만에 혼자서,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이 평화롭게 침대에서 눈을 떴다.
“ 후우… ”
하도 많은 일이 있다 보니 이제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게 되려 어색해진 걸까.
침대에서 일어난 경민은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한 표정으로 정수리를 긁적였다.
‘ 한별이는 지금쯤 잡혔으려나… ’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나 한별의 안부. 한별이 경찰에 체포된 건지 궁금했다.
어젯밤 경민은 한울 아파트에서 나와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민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담담했던 게 문제일까.
‘ 네…? 장난 전화요…? 아니, 장난 전화 아닌… 끊었네… ’
경찰은 장난 전화의 벌금에 대해서 설명하며 오히려 짜증을 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 아, 그… 방금 전화한 사람인데요… 장난 전화가 아니라 진짜로… 이거 좀 들어보세요. 그리고 한울 아파트에 와보시면… ’
결국 경민은 경찰서까지 찾아가서 직접 신고하고, 은하에게 받은 녹음 파일까지 경찰한테 들려줬다.
‘ 네…? 아니, 무슨 흥신소도 아니고… 신고를 안 받는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예요…? 가라구요…? ’
하지만 어째선지 경찰은 여전히 경민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이 신고를 안 받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경찰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일개 중학생에 불과한 경민이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결국 경민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여보세요? 아, 그… 제가 제보 좀 하려고 하는데요. 우선 메일 보냈는데 그거 녹음부터 들어보시겠어요? ’
경찰과 대화한 것을 몰래 녹음해서 온갖 신문사에도 제보했고, 다른 지역 경찰서에도 신고했다.
그러고 나니까 지쳐서 저녁도 안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방금 눈을 떴다.
‘ 벌써 월요일인가…’
한별이 어떻게 됐는지는 물론 궁금했지만 오늘은 월요일. 금요일에 무단 결석을 했던 덕분에 자칫 잘못하면 유급할 수가 있었다.
한별이 신경 쓰여서 학교에 가는 게 상당히 꺼려지긴 했지만 계속 결석하다가 유급하는 것은 훨씬 꺼러졌다.
‘ 일단 학교부터 가자… ’
우선 학교부터 가야겠다고 결정한 경민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부엌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별과 함께 가던 등굣길을, 오늘은 혼자서 걸었다.
‘ 뭔기… 허전하네… ’
한별과 함께하던 등굣길이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없으니까 괜히 한숨이 나올 만큼 허전하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부모님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다.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의 빈자리 같았다.
허전하긴 더럽게 허전한데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어차피 살인마니까. 어차피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부모니까.
물론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어쨌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이니까 갑자기 이렇게 멀어진 게 좋을 리가 없었다.
“ 에휴… ”
경민은 한편으론 담담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한 표정으로 교문을 지났다.
힘없이 계단을 오르고 드르륵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 야, 야… 쟤가 걔냐? 한별이 협박해서 사귀고 있다는 일남충… ”
“ 그거 때문에 한별이 충격받아서 오늘 결석한 거 아니냐… ”
“ 글고 보니까 예전에 한경민이 구했다는 성은하도 오늘 결석했다는데? ”
“ 구해줬다는 빌미로 존나 협박해서 따먹히고 트라우마 생겨서 정신과 간 거 아니냐? ”
교실에선 평소처럼 경민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과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담긴 갖은 악담이 들려오고 있었다.
온통 억측과 소문만 무성하고 근거는 전무한데도, 수많은 학생들 중에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샌드백으로 만들어 놓고 심심할 때마다 때리는 것에, 같은 반의 모든 이들이 동참한다.
함부로 나서면 똑같이 당하니까. 실제로는 대다수. 어쩌면 모든 이들이 경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거나 오히려 좋을지 모르는데도.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경민이라면 아마도 곧장 책상에 엎드려서 솔빈을 생각하며 울먹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은하 덕분에 자신의 모든 잘못을 속죄하고 어느 정도 자존감을 되찾은 경민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는 살벌한 표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누구를 협박해. 강한별이 나를 협박해서 사귀었던 거지. 제발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중립기어 박고 가만히 있자. ”
경민이 그렇게 말하자, 순간 교실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가만히 있던 경민이 처음으로 반격했다.
가만히 얻어맞던 샌드백이 갑자기 움직인 거다. 샌드백을 때리던 입장에선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샌드백 주제에 건방지다며 폭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 우욱… 씹… 야, 씨발 나 이 장면 애니에서 본 것 같다, 존나… 씹덕 찐따들이 상상하는 거 고대로 실천했노… ”
“ 뭐래, 병신이. 강한별이 뭐가 아쉬워서 니랑 사귀는데. 존나 얼굴 좀 생겼다고 세상 모든 여자들이 지 좋아하는 줄 아나보네. ”
경민이 전학왔던 날부터 그를 아니꼽게 봤던 남학생들이, 경민에게 다가와서 멱살을 붙잡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 놔. ”
“ 뭐라고? ”
“ 야, 놓으랜다. 좆밥 새끼가 진짜 우리가 가만히 있으니까 졸라 만만해 보이지? ”
여기서 쓸데없이 한마디 더했다간 싸움으로 번진다. 물론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주먹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괜히 그를 자극해봐야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밖에 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냥 무시하는 편이 현명했다.
‘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은하는 그런 나를 좋아한 게 아니야. 솔빈이도 똑같아. 걔들은 그런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고. ’
하지만 물러나서도 안 된다. 경민의 실제 가치는 아무도 모르지만 실제 가치가 어떻든 솔빈과 은하에게 있어서는 가치가 남달랐다.
‘ 헤헤… 오빠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오빠는 찌르지 않아요… ’
‘ 나같은 사람들에게… 빛이… 돼줄 수 있으니까… 오빠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
경민은 솔빈과 은하의 마음을, 그녀들의 자존심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편하자고 그들의 모욕에 침묵한다는 것은 그녀들의 모든 것을 부수는 거다.
‘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과도한 겸손은 나를 인정한 사람까지 낮추는 최악의 행동. ’
‘ 나를 욕하는 사람을 보고도 내가 편하자고 아가리를 닥치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까지 깡그리 병신 만드는 행동. ’
쓰레기 같은 자신을 사랑해준 마음에는 보답하고 싶었다. 해야만 한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게 최소한의 속죄였다.
그렇다고 주먹을 후려갈겨서 일을 크게 키울 수도 없었다. 암살자가 비수를 던지는 듯한 조용한 한방이 필요했다.
“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니까. ”
경민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키더니 은하에게 받은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볼륨을 최대치로 키워놓고.
‘ 후아… 하아… 하아…경민아…! 아우… 아앙…! 있잖아…! 너한테 관심 있는 년들… 히끅…! 대부분 내가 협박해서 죽였는데…! ’
‘ 읏… 우으으… 흐앙… 아아… 으읏…! 내가 뭘로 협박했는지 알아…? 내가 너라면 엄청… 궁금할 것 같은데… 히힛… 알려줄까…? ’
‘ 흐응…! 그냥 알려주는 건 재미 없고…! 후아…! 아, 그래… 우리 경민이가 가슴 만져줄 때마다…? 앙…! ’
‘ 헤헤… 그렇게 알고 싶었어…? 하우우… 아앗…! 하앙…! 아아… 좀 더어…! 아, 맞다… 그래… 알려주기로 했지… ’
‘ 너무 기분 좋아서… 머리가 새하얘서… 까먹었어… 헤헤헤헤… 1학년 때 고백한 애는… 도둑으로 몰아갔어…! ’
‘ 달평 마을 경찰하고 아는 사이니까… 사실 관계랑 상관 없이 사람 하나 범죄자 만들기 쉽거든… 으읏…! 그러니까 전학 갔어…! ’
‘ 2학년 때 너한테 고백한 애는… 애들한테 쓰레기라고 선동해서 왕따 만들었어! 그래도 버티길래 내가 직접 나서서… 때려줬어…! ’
‘ 3학년 때 너한테 고백한 애도! 전부 자기가 뭐를 잘못했냐고 시끄럽게 떠들길래… 우리 아빠 부하들 데리고 한번 더 패줬어…! ’
‘ 그러니까… 다들 알아서 도망갔지…! 히힛… 거, 거긴…! 후앗…! 그 다음은… 니가 이름도 확실히 기억하는 애들… 진별림…! ’
‘ 걔는… 경민아, 경민아, 거리면서… 필통을 뒤에다 꽂아 놓고 자위하는 동영상으로… 협박했어… 흐응… 아앙… 후앗…! ’
‘ 니 취향은 전부 알고 있어…! 뒤로 하는 건… 별로지…? 그래서 조금 협박해 주니까 지가 알아서 죽었어…! 병신 같아… 아앙…! ’
‘ 아, 참… 천솔빈도 내가 협박했는데에… 걔는 자기 아빠한테 강간당하는 동영상을 몰래 찍어서 협박해줬다…? 알고 있지…? ’
‘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를 거야… 내용이 뭔지 알아, 경민아…? 히힛… 모르겠지…? 그건 바로 바로… ’
‘ 천솔빈이 지금 나처럼… 앙… 아앙…! 신음 내면서… 자기 아빠한테 강간당하는 동영상… 이었어… 큭… 푸흡… 하하하하하핫…! ’
‘ 너무 그렇게 충격받지 마…! 정말로 좋아서 소리낸 게 아니라… 이건 일기장에 있잖아…! 내가 전부… 조작한 거라고…! 헤헤헤헤…! ’
경민이 높이 들어올린 휴대폰에서 한별의 신음과 모든 자백이 흘러나오며, 방금까지 실컷 떠들던 입들이 지퍼처럼 닫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하게 입을 닫진 않았다. 경민을 욕하던 입을 닫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타겟이 바뀌었다.
“ 야, 저거 뭐냐… 글고 보니까 제일 첨에 말한 게 강한별 아니었음? 관상은 거짓말 안 한다니까… 걔 관상이 있잖아… ”
“ 맞네, 맞네… 강한별이 전부 조작한 거였네… 와, 진짜 소름이다… 나 강한별 볼때마다 어쩐지 눈빛이 조금 쎄하더라… ”
할말이 없어진 남학생이 뻘쭘한 표정으로 멱살을 놓음에 따라, 이번에는 모든 학생들이 한별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단숨에 모든 여론이 경민 쪽으로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경민을 욕하던 이들이 모두.
하지만 같은 반에 있는 이들 중에 진심으로 한별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학생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만약에 진심으로 한별의 잘못을 지적하고 싶었다면, 가장 먼저 어리석은 자신의 행동부터 비판하고 사과했을 테니까.
그들은 그냥 물어뜯고 싶은 사람이 하나 필요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단지 물어뜯을 사람이 바뀐 것에 불과했다.
“ 뭐냐, 그럼 한경민 얼굴 보고 벌린 거야? 강한별 존나 개걸레년이었노. 씨발 우리가 대달라면 걍 공짜로 대주는 거 아니냐? ”
“ 강한별 신음 존나 꼴리네. 진짜 강한별 빨통 볼때마다 존나 박고 싶었는데. ”
“ 아니, 니들은 말을 무슨 그따구로 하냐… 대화 내용 존나 천박하네, 씨발… ”
“ 아가리 닫어, 씨발. 존나 고고한 척하네. 강한별이 대준다고 하면 개처럼 박을 거면서. ”
모든 여론이 자신의 편으로 돌아서도, 경민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진절머리가 났다.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나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자 태도가 바뀌는 것은 역겨웠다.
“ 야, 야… 그럼 결국 경민이 아무런 잘못도 안 한 거 아니야? ”
“ 아니, 어제까진 한경민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경민이로 바뀌었네. 태세 전환 보소. ”
당연히 생각이 바뀔 수는 있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입밖으로 내뱉었던 말까지 손바닥 뒤집듯이 뻔뻔하게 뒤집는 것에는.
“ 아잇, 씻팔… 아무 잘못 없다는데 그럼 당연히 바뀌어야지… 그럼 경민이 걍 잘생긴 찐따라는 거잖어. 존나 남친감 1순위 아님? ”
“ 여태까지 말도 안 되는 개쌉소리 듣고도 욕 참은 거 보면 성격도 존나 착한 듯? 방금 말한 거 솔직히 존나 멋졌다… ”
자신이 잘못했던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는 것은 근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 경민아, 아무런 잘못도 안 했는데 애들이 자꾸 욕하니까 많이 힘들었지? 그러게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으이구… ”
“ 경민아, 경민아… 애들 전부 너 욕할 때도 나는 하나도 안 했다? 나 존나 착하지? 혹시 전화번호 줄 수 있어? ”
“ 와, 쟤 진짜 미친년인가… 어제까지 관상 쎄하다고 별 지랄을 다 하더니… 그래서 경민아, 언제 같이 놀래? 누나가 내준다. ”
얼굴은 예뻤다. 몸매도 좋았다. 외견만 보면 그녀들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보단 은하가 훨씬 좋았다.
“ 아니, 됐어… ”
모든 상황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데, 경민은 오히려 방금보다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책상에 엎드렸다.
비록 지금은 아니라곤 하나 옛날에 자신이 좋아했던 여성을 욕먹이고 얻은 좋은 이미지가,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보험금을 받아서 빚을 갚은 것은 좋으나 그게 자기 부모의 보험금이었을때의 기분.
“ 진짜 목소리 존나 좋긴 하다… 목소리만 들어도 임신할 것 같음… ”
“ 미친년… 경민이한테 들리겠다. ”
“ 들리라고 하는 거야… 경민이도 남자잖어?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침 조례가 시작되고 한별에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 담임 교사에게 넘어갔다.
“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일단 이건 선생님이 경찰에 신고할게. 그리고… ”
당연하게도 경민과 한별에 관련된 소문은 단숨에 학교 전체에 퍼졌고, 점심을 먹으러 복도로 나오자 모든 학생들이 쳐다봤다.
“ 경민아, 매점 갈래? 내가 사줄게! 그나저나 이제라도 누명 벗어서 다행이다… 진짜 강한별 쓰레기 같은 년 떄문에 고생했어… ”
“ 강한별 진짜 쓰레기 같더라… 와, 진짜 어떻게 그딴 발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애들도 진짜 너무하다… 사실 확인도 없이… ”
경민에게 다가오기 꺼려하던 여학생들이 전부 주저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야, 야. 한경민. 너 혹시 롤하냐? 오늘 애들하고 옆반 애들이랑 붙기로 했는데 우리 반팀 한명 모자라거든. 혹시 같이 할래? ”
“ 그나저나 남자끼리니까 몰래 물어보는 건데… 솔직히 강한별 떡감 어땠냐? 혹시 주변에 남는 애 없냐? 내가 설거지해준다. ”
콩고물을 받아먹고 싶은 남학생들도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 글쎄… 나는… 모르겠다… 그냥… 갈게… ”
경민은 누가 무슨 얘기를 꺼내든 성의없게 얼버무리면서 넘겼다.
“ 와, 씨… 진짜 한경민 개새끼 존나 더럽게 비싼 척하노. ”
“ 존나 띠껍긴 하다. 여태까지 찌그러져 있다가 여론 바뀌니까 바로 사람이 바뀌는 꼬라지 보소. 우디르급 태세 전환. ”
그러다 보니 안 좋은 소리도 들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한별과 함께 있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별은 살인을 저질렀고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한별이 훨씬 낫게 느껴졌다. 그녀는 최소한 진심을 다했으니까.
애초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는 한별이나 그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 후우… ”
점심을 먹은 경민은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을 찾아가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수업을 마친 다음에는 미친 듯이 울려대는 휴대폰을 무시하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 반톡 초대됐네. 여태까지 안 하더니… 갑자기 연락은 또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나한테 관심도 없더니… ’
경민은 휴대폰을 그대로 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쓸쓸하네… ’
휴대폰은 예전보다 많이 울리는데 마음은 예전보다 훨씬 쓸쓸했다.
귀찮게 들러붙으며 자신을 사랑해주던 별림이 없었다. 틈만 나면 애교를 부리며 자신을 사랑해주던 솔빈이 없었다.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던 한별이 없었다. 시각과 청각을 잃고도 자신을 사랑해주던 은하가 없었다.
주변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가지는 것을 좋아하는지 구분이 안 가는 인간들밖엔.
‘ 그냥…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
한별의 통화 내용을 그냥 못들은 척하고 넘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외로웠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오늘은 왠지 그냥 안겨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만 아니면 누구라도 좋았다.
격렬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으로 돌아누운 순간이었다.
“ 엉…? 저게 뭐야… ”
못보던 물건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상자였다. 경민이 가져다 놓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가져다 놓은 거다. 또한 경민이 집을 비운 동안 문은 잠겨 있었으니 문을 열고 왔다는 소리가 된다.
갑자기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목적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집안에 들어왔던 거다.
어쩌면 아직 집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경민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서 집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 집안엔… 아무도 없는데… ’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물건도 없었다. 적어도 절도로 잡혀가는 대가를 감수할 만큼의 물건은.
아무래도 경민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경민은 정수리를 긁적이며 방안으로 돌아왔다.
‘ 일단 상자부터 볼까… ’
양손으로 상자를 들어보니 상자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무겁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미친 듯이 가벼웠다.
어쩌면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상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상자는 흔히 있을 법한 상품 이름 같은 것도 없이 너무나도 깔끔했다.
상자에 붙인 테이프도 무슨 기계를 사용한 것처럼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뭐가 들어 있는지, 정말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나는 인물은 한별.
주변에서 이딴 이유 모를, 목적 모를 이상한 짓을 저지를 만한 인간은 한별밖에 없었다.
‘ 꺼림칙하지만… ’
꺼림칙하지만 열어볼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경민은 상자를 열었다.
“ 엉… ”
하지만 특별한 물건은 없었다. 안에는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경민과 별림의 사진. 경민과 솔빈의 사진. 경민과 한별의 사진. 경민과 은하의 사진.
경민과 연관된 모든 여학생의 모습이 각각 다른 사진에 찍혀 있었다. 하지만 딱히 그녀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없었다.
한별은 오랫동안 함께했으니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별림은 인상 자체가 옅어서 본의 아니게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솔빈과 은하에 대해서는 함께 찍은 적이 없다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가 있었다.
솔빈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서 한별에게 몰린 적이 있었다. 은하와 있었을 때는 한가롭게 사진이나 찍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애초에, 사진의 구도만 봐도 허락받고 찍은 듯한느낌이 아니라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 몰래… 찍은 건데… 누구지…? ’
사진엔 한별도 있었으니 아무래도 한별일 가능성은 낮아졌다. 애초에, 한별이 굳이 이런 짓을 해서 얻을 게 없었다.
이런 물건을 놔둔 이의 정체도, 이런 짓을 하는 목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민은 고개를 갸웃거다가 이내 편지를 펼쳤다.
깔끔하고 귀여운 글씨체. 아무래도 남성보단 여성이 떠오르는 글씨체였다. 이윽고 내용을 읽은 경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 한성 분교… 명윤설…? ”
학교는 알고 있었다. 경민과 한별이 졸업한 초등학교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윤설이라는 이름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 초등학교 동창…? 근데 갑자기 연락한 목적이 뭐지…? ”
“한별이는 그렇다 치고 다른 애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
‘ 사진은 언제, 어떻게 찍은 거야?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있고? ’
‘ 생각해보니까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다는 거네…? ’
아직 내용은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꺼림칙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경민은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는 경민을 알고 있는 것부터 찝찝했다.
상대는 사실상 경민에 관련된 모든 것을 줄줄이 꿰고 있는 듯했다.
정작 경민은 윤설이란 작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녀의 모든 행동을 한별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한별이 이상으로… 그냥… 무시할까… ’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했던 걸까. 경민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내용도 읽어보지 않은 편지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고는 아침에 물을 마셨던 컵으로 물을 한잔 마시고 침대에 드러누워서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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