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076. 혼돈의파수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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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2일 일요일. 자정을 넘긴 새벽. 경민은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윤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 하아… 누나… ”
그들은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배달을 부탁한 다음,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사실상 윤설에게 감금을 당하고 있던 탓에 주변의 지리를 몰랐던 경민은, 그냥 멍하니 그녀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렇게 어느덧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끝낸 이후, 윤설은 같이 술을 마시자며 경민을 졸랐다.
아무래도 그녀는 경민이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끝내 경민은 그다지 마시고 싶지도 않았던 술을 진탕 들이켰다.
술에 취하면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는 유령들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나름 고도의 계산이 섞여 있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고작 한 잔 마신 윤설은 잔뜩 취해 버렸고, 정작 윤설 때문에 두 병도 넘게 마신 경민은 이상할 정도로 멀쩡했다.
“ 누나, 일어나요…! 집에 가야죠… ”
덕분에 경민은 맨정신으로 윤설의 만취 텐션에 맞춰주다가, 이제는 아예 길거리에 뻗어 있는 윤설을 흔들어 깨우고 있있다.
‘ 차라리 내가 취했으면… 아니, 근데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한 거지? ’
‘ 옛날에 맥주를 보리차로 착각해서 잘못 마시고 기절했던 기억밖에 없는데… ’’
하지만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는지 그녀는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에헤헤… 갱민아아… 내가 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제…? 응…? ”
오히려 팔자 좋게 드러누워서 몸부림을 치며 태평하게 잠꼬대나 지껄이고 있었다.
“ 진짜, 진짜, 진짜… 내가 진짜 엄청나게 사랑한데이… 에헤헤… ”
경민은 그녀의 애교 섞인 귀여운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다가도, 이내 표정을 굳히며 정수리를 긁적였다.
‘ 제대로 취했네. 깨우는 건 무리겠다. ’
윤설을 등에 업고 집에 돌아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육덕진 몸매에 비해서 의외로 체중이 제법 가벼웠다.
또한 평소에 워낙 열심히 일하느라 피곤에 찌들어 살았던 윤설이었다. 웬만하면 그냥 이대로 계속 자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 사실 그것보다는… ’
무엇보다 괜히 윤설을 깨웠다가 밤새도록 허리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윤설이 싫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욕이 발정기 짐승보다 강한 덕분에, 매일 밤마다 복상사 직전까지 그녀한테 강간당하는 신세였다.
처음에는 경민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가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녀한테 주도권을 빼앗긴 채로 살려달라고 빌어댔다.
‘ 어우… 상상만 해도 쪼그라드네… ’
차라리 그녀를 등에 업고 집까지 뛰어가는 게 훨씬 체력 소모가 적었다.
다만 경민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
경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근처에 있던 벤치에 윤설을 앉혔다. 그녀의 옆에 앉은 다음 그녀를 무릎 위에 살짝 눕혔다.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잠결에도 애교를 부리고 있었만, 경민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 데다가 다른 사람한테 방해받지 않고 싶다는 윤설의 고집으로 휴대폰은 집에 두고 나왔다.
지갑은 있었지만 늦은 시간에 인적이 드문 거리라서 택시도 보이지 않았고 휴대폰을 빌릴 만한 사람도 딱히 안 보였다.
술은 윤설이 대신 사서 어렵지 않게 마실 수가 있었지만, 경민이 윤설과 함께 숙박 업소를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 아니, 이러다가 진짜로 길바닥에서 노숙하겠는데… 명윤설이 길에서 노숙하고 있는 꼴을 봤다면 도대체 누가 믿을까… ’
‘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집에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인지 모르겠네. 마치 누군가 정확하게 맞춰놓은 것처럼. 운명인가? ’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더니,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윤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안녕, 경민아. 오랜만이네. ”
경민은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가 들려 왔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윽고 보이는 것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 에…? 누구… 세요…? ”
경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윤설의 목소리를 들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여성이 눈앞에 있었다.
애초에 윤설이 눈앞에서 자고 있는데 다른 데서 윤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부터 이상한 소리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놀라서 고개를 돌릴 만큼 목소리가 닮았다. 말투는 조금 달라도 억양이나 목소리는 완전히 똑같았다.
“ 뭐야, 이제는 아예 모르는 척이야? 그래, 뭐… 내가 워낙 안 좋게 소문 나긴 했지. 광천 고등학교 애들도 전부 알더라. ”
“ 내가 창년이라고. 자기도 한번 사먹어 봤다고. 니들도 사먹어 보라고. 좆같은데 뭐라 말을 못하겠더라. ”
“ 너희들한테는 나같은 인간이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럽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하고 싶었어. ”
경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소녀는 아무래도 경민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언급한 이야기 중에 조금 익숙한 단어는 있었다.
‘ 광천… 고등학교… ’
광천 고등학교. 윤설이 졸업한 학교이자 츠카사가 윤설에게서 영력을 받은 다음에 찾아오라고 말했던 약속 장소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도 심상치 않은 일에 엮였을 확률이 높았다.
‘ 내가 기억을 잃은 게 고등학교 때니까… 정말 단순히 교통사고만 일어났을까? ’
‘ 정작 나는 나를 쳤다는 사람의 얼굴도 못봤는데 말이지… ’
‘ 어른 선에서 해결해서 모르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해… ’
‘ 이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는 몰라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얘기는 해볼까. ’
가능하다면 그녀에게서 광천 고등학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경민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어… 죄송한데… 그… 잠깐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더니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경민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윤설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 아, 저기… 그… ”
경민이 운을 떼자 백발의 소녀는 곧장 표정을 바꾸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경민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이었다.
“ 죄송한데… 그… 뭐냐… 제가 그쪽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요… 정말로 저는 그쪽이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요. ”
“ 제가 1년 전에 사고를 당해서 기억이… 뭐랄까… 지금 중학생 때의 기억은 있는데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없거든요. ”
“ 윤설 누나는 고등학교 얘기만 꺼내면 이상하게 자꾸 피하시고… ”
“ 그래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그쪽은 뭔가 알고 계신 것 같더라구요? ”
“ 그래서 고등학교 때 제가 어땠는지… 윤설 누나는 어땠는지… 그쪽은 누군지… ”
“ 뭐, 대충 그런 이야기가 조금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백발의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민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이내 피식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 흐음… 그렇구나아… 기억 상실증이라… 나는 백설화야. 그리고 믿을지 말지는 자유지만 나는 네 여자친구였어. ”
“ 네가 나한테 고백했고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서 사귀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네가 나보고 헤어지자고 말하더라. ”
“ 나는 너를 여전히 좋아해서 너한테 정말 미친 듯이 매달렸지만 너는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차버리더라. ”
“ 그리고 하루도 안 돼서 지금 거기 있는 명윤설이랑 사귀더니 갑자기 자퇴했지. 아마 1학년 때였을 거야. 재작년이네. ”
경민은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예측했다.
하지만 설마 사귀는 사이였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차고 바로 윤설이랑 사귀었다는 것도.
‘ 잠깐… ’
설화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더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저번에… 윤설 누나가 나랑 사귄다고 발표하고 논란이 됐었잖아. ’
‘ 그리고 윤설 누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사귀었다는 말로 무마했었지. ’
‘ 나는 그게 당연히 그냥 논란을 덮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
‘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게 거짓말이면 뭔가 이상하잖아. ’
‘ 같은 광천 고등학교 출신 중에 하나라도 입을 열면 바로 들통날 텐데? ’
‘ 다같이 입을 닫았나? 당장 인터넷만 봐도 윤설 누나가 성공한 게 아니꼬운 사람들이 한 트럭이던데. ’
‘ 전부 돈으로 덮었다? 정의심에 넘치는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었을 텐데? 그럼 사람을 고용해서 겁줬다? ’
‘ 그럼 익명의 힘을 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무리 돈이 최고라도 윤설 누나가 그것까지 잡기는 어려울 텐데… ’
‘ 설령 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난하게 넘어간 건… 사실상 거짓말이 아니니까 가만히 있었다고 밖에는… ’
‘ 그럼 나는 광천 고등학교에서 윤설 누나랑 사귀었고… 윤설 누나랑 사귀면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
퍼즐은 처음에는 맞추기 어려워도 갈수록 조각도 줄어들고, 그림도 눈에 보여서 점점 맞추기 쉬워진다.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뇌리를 스치는 기억의 파편을 맞추면 맞출수록, 왠지 모르게 점점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 윤설 누나…! 또, 또…! 꿈에서… 흐윽…! 츠카사… 그 사람이… 저를…! ’
‘ 에휴… 우리 갱민이… 불쌍해가 우야노… 자, 갱민아… 내한테 안기그라. ‘
‘ 어릴 때처럼 감금하고… 괴롭히고… 강제로…! 우으윽…! 끄으으윽…! ’
‘ 개안타… 누나야가 머리 쓰다듬어주께. 응? 그니까 그만 울어라… ’
‘ 하지만…! 솔빈이도… 한별이도… 결국… 제가… 츠카사는 전부 알고 있었는데…! 똑바로 말만 해줬어도 막을 수 있었는데! ’
‘ 그래, 니 맘 다 안다… 많이 힘들었제? 이제 공부나 취직같은 쓸데 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고마 걍 푹 쉬라. 닌 충분히 노력했다이가? ’
‘ 하지만… 그럼… ’
‘ 먹고 사는 건 걱정 마라. 내가 니 먹여 살릴 끼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내한테 말만 해라. 좀더 내한테 의존해도 된다. ’
‘ 그치만… 그럼… 누나는요…? 이런 한심한 새끼한테… 왜 그렇게까지… 엄마도… 아빠도… 저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데…! ’
‘ 야가 지금 뭐라노… 비록 갸들은 못 구했겠지만… 내는 구했다이가? ’
‘ 제가… 누나를요…? ’
‘ 니 없었으면 난 진작에 뒤짔다. 니가 사람 하나 구했단 소리다. ’
‘ 제가 무슨… 농담도… ’
‘ 니가 내 전부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이유, 내가 죽지 않는 이유, 내가 살아 있는 이유, 내 존재의 가치… 그게 바로 니다. ’
‘ 제가요…? 진짜요…? ’
‘ 아까부터 계속 글타 안 카나. 니 죽으믄 나도 나가 뒤질 끼다. 니가 원하믄 사람도 죽일 수 있다. 내는 니를 사랑하니까… ’
‘ 푸흡…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고 아껴 주는 사람은… 누나밖에 없네요… 하하… ’
‘ 그, 글나? 하하… 쪼메… 쑥스럽네… 그, 그래서 그런데… 혹시 내랑… ’
‘ 누나랑… 뭐요…? ’
‘ 그… 뭐라캐야 되지… 그러니까… 우리… 사귀까…? ’
‘ 네…? 그치만 저는… 설화 누나랑… 설화 누나가 저를… ’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윤설의 품안에 안긴 채로 그녀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 설이 누나, 설거지랑 청소 전부 해뒀어요! 밥은 씻고 오시면 제가 차려둘게요! 아, 그리고… 이번에 제가 검정고시 치는데… ’
‘ 제가 공부를 못하잖아요… 근데 인터넷 보니까 또 그리 문제가 어려운 것 같진 않아서 학원 다니는 건 영 돈낭비 같고… ’
‘ 설이 누나 공부 되게 잘했잖아요! 혹시 누나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
‘ 돼요? 진짜? 하하… 감사합니다… 이야… 누나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설이 누나 없었으면 저는…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
‘ 그나저나 이번에 포커 대회 나가신다고 하셨죠? 2020년 8월 20일… 이던가? 오랜만에 저랑 연습하실래요, 누나? ’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윤설을 맞이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뒤죽박죽. 머리가 복잡해서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윤설과 함께 살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경민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식은땀을 닦아내더니 손끝을 덜덜 떨었다.
‘ 조금만… 조금만… ’
앞으로 한걸음. 앞으로 한걸음만 나아갈 수 있다면 전부 떠오를 것만 같았다.
“ 듣고 있어? ”
“ 네…? 아, 네… ”
하지만 설화의 말에 머릿속을 떠돌던 희미한 기억들은, 불에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단번에 불씨가 사그라들었다.
“ 후우… 저기, 설화 누나…? 잠깐… 생각 좀 정리해도 괜찮을까요? ”
“ 별로 상관은 없어. 어차피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
힘이 빠진 경민은 설화에게 차마 성질을 내지는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등을 기대고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 내가 설화 누나… 랑 사귀다가 윤설 누나한테 고백을 받아서… 설화 누나를 차고 윤설 누나랑 사귀었다는 건가… ’
‘ 재작년에 내가 학교를 자퇴하고 윤설 누나랑 살면서 작년부터 검정 고시를 공부했고… 거기까지는 대충 감이 잡혀… ’
‘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윤설 누나랑 나랑… 절대 그렇게 사이가 나쁘진 않아 보였는데… ’
‘ 어째서 나는 갑자기 기억을 잃었고… 거기엔 윤설 누나가 없었고…올해까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
‘ 어째서 누나는 처음 만났을 때는 모르는 척을 했으며, 어째서 그걸 나한테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거지…? ’
‘ 포커 대회는 8월 20일… 대략 2박 3일 일정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에 돌아올 때쯤엔… 넉넉하게 잡으면 24일쯤인가. ’
‘ 츠카사 누나 여권 발급 날짜가… 2020년 8월 16일… 2020년 검정 고시 일정이… 8월 22일… 뭔가… 겹쳐… ’
‘ 안승민이 강일 중학교 사건의 기사를 적은 게… 아, 8월 13일. 그리고 분명 기사가 수정된 날짜는 9월 13일… ’
‘ 한달이 지나서야 수정할 만한 게 도대체 뭐가 있겠어. 강일 중학교는 윤설 누나의 사유지니까… ’
‘ 아무리 금수저라도 부모 돈으로 건물을 사게 냅두진 않았을 거고… 포커 대회 우승 후에 그걸 샀다고 생각하면… ’
‘ 2020년 8월 13일, 안승민이 강일 중학교 사건 기사 작성. 2020년 8월 16일 츠카사 누나가 여권 발급. ’
‘ 2020년 8월 16일 언저리 쯤에 츠카사 누나가 한국으로 입국… 2020년 8월 20일 쯤에 포커 대회… ’
‘ 2020년 8월 22일에 나는 검정고시를 치러갔고… 윤설 누나는 2020년 8월 24일 쯤에 우승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
‘ 8월 24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강일 중학교 건물을 경매에서 낙찰받았고 9월 13일에 안승민이 기사 수정… ’
‘ 뭔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데… 연관이 있는 건가…? 아니, 무조건 연관 있기는 하겠지… 아직 감이 안 잡히지만… ’
온통 의문이었다. 설화라면 전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설화에게 시선을 옮긴 순간, 설화는 경민의 손을 잡았다.
“ 에…? 지금 뭐하시는… ”
경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손을 잡는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면 어느 정도 감은 잡혔다.
그리고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고 있는 게 맞다면 여러모로 일이 성가시게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 볼지도 모르니까 입에 담기 전에 의사를 전달하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한 경민은 그녀의 손길소 거칠게 뿌리쳤다.
“ 그… 죄송해요. 누나도 아시죠? 윤설 누나랑 제가 어떤 관계인지… ”
그러자 설화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봐도 다소 상처를 받은 듯했다.
경민도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오히려 상처를 받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던 걸까. 설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경민의 소매를 붙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경민아, 나는… 아직도 니가 좋아. 니가 곁에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거든. 한때는 조금 바보같은 생각도 했었지만… ”
“ 너는 내가 억지를 부려도… 뭐든지 활짝 웃으면서 들어주고… 내가 힘들어 하면 언제나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
“ 그래서 나는… 니가 정말로 좋았어… 너를 정말로 사랑했어… 아니, 지금도 사랑해. 평생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 근데 니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그렇게 말해서… 명윤설이랑 사귀어서… 엄청 슬펐어… 죽고 싶었어…! ”
“ 왜… 왜 하필 명윤설이야…?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윤설이야…? 하다 못해 다른 사람도 많았잖아…! ”
“ 왜 하필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 버린 명윤설인 건데…? 도대체 왜…! ”
설화는 경민의 품에 안겨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리고 소리 죽여 흐느끼면서 호소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으니 떨쳐내기도 어려웠는지, 결국 경민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 헤헤… 옛날부터 엄청 좋아했어… 니가 이렇게 머리 쓰담쓰담 해주는 거… ”
그러자 그녀는 세상을 가진 것처럼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경민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경민이 손을 멈추고, 경민의 무릎 위에 있던 윤설과 얼굴이 마주치자 단숨에 기분이 나빠졌던 걸까.
그녀는 갑자기 이빨을 빠득빠득 갈더니 경민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 너랑 헤어지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명윤설 씨발년 때문에 수능 성적도 조졌고, 우리 엄마도 죽었어… ”
“ 친척들은 갑자기 전부 나를 모르는 척하기 시작했고, 기껏 공무원 합격했더니 씨발 갑자기 나를 해고했어… ”
“ 명윤설이 뭐했냐고…? 그래, 그렇게 보이겠지… 나를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았으니까… 그거 뺴고 다했으니까… ”
“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고 그것보다 잔인하게 천천히 나를 말려죽였어… 안 그래도 너랑 헤어져서 힘들었는데… ”
“ 대학도 못가… 알바도 못해… 취업도 못해… 애미 등골도 못빨아… 그럼 그냥… 나는 뒤져야 되는 거야… ”
“ 근데 씨발…! 세상에 그따구로 살다가 뒤지고 싶은 병신이 어딨댜고…! 몸이라도 팔아서 살아야 될 거 아니야…! ”
“ 하하… 정말 기분 더럽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의지로 첫경험을 다른 남자한테 바친다는 게… 하하… “
“ 하지만 너를 다시 보려면… 명윤설한테 복수하려면… 그렇게라도 살아야 되니까… 어금니 악물고 버텼어. ”
경민은 설화의 눈을 바라봤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면 윤설은 쓰레기였다.
애초에 윤설은 숨기는 게 많았다. 무슨 사실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민은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윤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의미는 알았을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이제 충분히 알았을 터다.
그런데도 설화는 포기하지 않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경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드디어 너를 만났어…! 경민아, 우리 정말 좋았잖아… 응…? 옛날엔 비록 내가 조금… 철도 없고… ”
“ 그, 그래서… 너한테 조금 함부로 했을지도 몰라… 하, 하지만… 앞으론 안 그럴게…? 너한테 정말 잘해줄게…! ”
“ 이제 더 이상 몸도 안 팔고… 그, 그래… 집안일 같은 거 내가 전부 다할게! 만약에 애 낳으면 친자 검사해도 괜찮아…! ”
“ 그리고 니 애가 아니면… 내가 칼로 찔러서 죽여 버릴게…! 그냥 니가 키우기 싫어도, 내가 죽여 버릴게…! ”
“ 아니면 내가 실수로 임신할 때마다 전부 낙태해 버릴게! 어차피 요즘은 낙태해도 합법이잖아! 헤헤… ”
“ 밥도 많이 안 먹을게… 생활비도 적게 쓸 거야… 무, 뭄론 나한테만…! 너한테는 니가 원하는 만큼 펑펑 쓸 거야…! ”
“ 그러니까… 응…? 다시 나랑 사귀자…? 나, 나는 비록 명윤설처럼 돈은 없지만… 저 씨발 성격 개더러운 씹새끼… ”
“ 분명히 너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을 거 아니야…? 씨발 꼴에 돈 좀 만졌다고 감히 너를…! 근데 나는 절대 안 그럴 거야…! ”
“ 요, 요새 설거지니 뭐니 말 많은데… 진짜 그런 거 아니야…! 나 진짜로 너 사랑해…! 니가 거지라도 좋아…! ”
“ 네 발가락… 네 손가락… 그냥 네 모든 게 사랑스러워…! 너한테 잔뜩 귀여움받고 싶어… 사랑받고 싶어…! ”
“ 돈은 니가 전부 관리하고 나한테 한 푼도 주지 않아도 좋아… 밖에도 안 나가고 애완 동물처럼 집에서 얌전히 기다릴게… ”
“ 그냥 다시 옛날처럼… 너한테 안겨서 사랑받고 싶은 게… 전부야… 그게… 그냥 그게… 전부야… 그러니까… 사귀자…? ”
경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윤설의 잘못과는 별개로 그녀가 훨씬 가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악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호감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그게 전부였다.
다만 다른 것들이, 모든 게 문재였다. 애초에 한번 윤설을 고른 이상, 이번 시간선에서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 어차피 나중에 시간을 되돌릴 거야. 설화 누나랑 사귀는 메리트는 아무것도 없어. ’
‘ 메리트 이전에,…윤설 누나랑 사귀고 있는데 어떻게 설화 누나랑… ’
‘ 아니, 근데… 설화 누나랑 사귀던 중에 윤설 누나를 사귀고 찼다면… 오히려 그게 바람… 아닌가…? ’
‘ 아니, 아니… 근데 지금은 정말 설화 누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윤설 누나가 나쁘다는데 솔직히 모르겠고… ’
‘ 윤설 누나를 고른다는 게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
‘ 적어도 여기서 설화 누나의 고백을 받는 게 틀리다는 건 확실해. ’
‘ 미안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지만… 결국 내가 쓰레기 같았던 게 문제지만… 하지만 여기선 어쩔 수 없어. ’
‘ 거절하는 선택지밖에 없어. 대신, 과거로 돌아가서 문제점이 뭔지 확인해 보고 내가 전부 바로잡는 거야.
‘ 솔빈이, 한별이, 윤설 누나, 츠카사 누나… 4명 뿐만 아니라 별림이도, 은하도, 설화 누나, 안승민 등등 전부. ’
경민은 조심스럽게 설화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설화는 활짝 웃으며 경민의 품안에 안겼다.
그녀의 눈빛에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기대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상을 손에 넣은 것만 같았다.
“ 헤헤… 경민아… 사랑해… 앞으로 정말 잘할게… 이때까지 정말로 힘들었어… 너한테도 차이고… 엄마도 죽어 버리고… ”
“ 하지만… 이제 됐어… 니가 있으면 이젠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이거면 만족헤… 헤헤… 나… 잘 버텼어… 칭찬해줘… ”
경민이 자신의 고백을 받아줬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경민은 천처히 그녀를 떼어놓으며 표정을 굳히고 이렇게 말했다.
“ 그러니까… 음… 죄송해요, 누나. 그… 안 될… 것 같아요. ”
설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서 경민을 바라봤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경민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도저히 장난같지 않았다.
설화는 헛웃음틀 터뜨리더니 뒷걸음질을 치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내가… 더러워서 그래…? 몸팔다 온 년이라 싫어…? 그치만 나는… 그건 전부 너를 위해서… 너를 만나려면…! ”
“ 아니요. 더럽지 않아요. 화류계에서 일하셨던 것도 저는 그리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아요. ”
“ 그럼… 내가 돈이 없어서…? 그, 그럼… 좀 더 열심히 일할게… 내가… 돈 많이 벌어오면 나랑 사귈 거야… ?”
“ 아니요. 돈은 문제가 아니에요. 누나가 노숙자라도 상관은 없어요. ”
“ 그럼 도대체… 뭐가 문젠데…! 원래 너랑 사귀고 있던 사람은 난데…! 이렇게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
설화는 어금니를 악물고, 경민의 무릎을 배고 새근새근 자는 윤설을 바라봤다. 전부 윤설이 있어서 그런 거다.
윤설이 있어서 인생을 망쳤다. 인생을 망친 것도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경민만 있으면 그리 망친 인생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 누나는 싫어하지 않아요. 하지만…아무도 안 사귀고 있다면 몰라도… 지금은 윤설 누나랑 사귀고 있으니까… ”
설화는 고개를 격렬히 내저으며 새하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경민이 입에 담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가슴을 깊숙이 찔러서 숨통을 틀어막는 듯했다. 이명이 고막을 찢었다. 칼날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었다.
설화의 눈동자는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에 금이 가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설화는 자기 합리화를 하듯이 혓바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니야… 아니야… 이상해… 아니야… 거짓말이야… 장난이야… 아니라고… ”
설화에게 있어서 경민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남아서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
윤설은 아니었다. 윤설은 가장 힘든 시절, 자신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인생을 망쳐 버린 장본인이었다. 쓰레기였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 장본인과 함께 결혼해서 살겠다고 말했다.
“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아니야… 아니야… 이상해… 아니잖아…?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설화는 초점이 어긋난 시선으로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해서 중얼거리다가,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 누, 누나…! 일단 진정하고… ”
경민은 화들짝 놀라면서 설화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전부 윤설이 문제였다. 윤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문제였다. 윤설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만 한다면 전부 해결되는 거다.
“ 명윤설이 없으면… 되는 거지? 명윤설을 죽여서 니가 재산을 전부 받고… 나를 감옥에서 꺼내면 해피 엔딩인 거지? ”
설화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말한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변했다.
경민도 공기의 괴리를 피부로 직접 느끼고 그녀를 경계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눈에 보이는 근거라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살기가 느껴졌다. 영화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살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 손님 중에서 워낙 또라이들이 많다 보니까 혹시 몰라서 가지고 다니거든. ”
설화는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손에 들고 있던 가죽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설화가 꺼낸 것은 호신용으로 보이는 나이프였다.
경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윤설을 죽이려는 것이다.
“ 자, 잠깐만요…! 이, 일단 진정하고… ”
경민은 진정하라고 말했지만 상식적으로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진정하고 대화를 나누려는 쪽이 오히려 미친 거다.
“ 헤… 헤헤… 조금만 기다려, 경민아… 내가 명윤설한테서 구해줄게…! ”
평정심을 잃은 설화는 나이프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곧장 윤설한테 달려들었다.
윤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민은 그런 윤설을 자신의 무릎에 눕혀두고 있었다.
함꼐 피하기는 완전히 글러먹었다. 윤설 혹은 경민. 어느 한쪽은 무조건 칼에 찔려야만 하는 거다.
경민은 칼에 찔려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때는 츠카사한테 죽었지만 그건 경민이 자고 있는 동안 죽인 것이었다.
칼에 찔리는 느낌이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얼마나 아플까. 그렇게 생각하면 겁이 나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 에…? ”
무서웠다. 두려웠다. 하지만 어느샌가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으로 그녀의 칼날을 막았다.
“ 아아아아아아아악! 끄으으윽…! ”
날카로운 칼날이 손바닥을 관통하고 선혈이 허공에 흩날렸다.
설화는 두뇌가 눈앞의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건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끄윽…! 그러… 지 마세요…! 이, 이거… 엄청… 아프네요… 하하… ”
하지만 경민이 손바닥을 부들부들 떨면서 애써 미소 짓고 그렇게 말한 순간. 모든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윤설의 안면을 썰었을 터인 칼날은 어째선지 경민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설화는 힘이 풀렸는지 황급히 나이프를 뽑아서 내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아서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 꺄아아아아아악! 왜, 왜…!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경민아, 경민아…! 왜… 도대체 왜애애…! ”
설화는 부모님을 잃어 버린 어린 애처럼 흐느끼면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경민의 손바닥에 손수건을 묶으면서 지혈했다.
“ 히끅…! 주, 죽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애…! 미안해… 미안해…! 안 돼…! 안 돼…! 죽으면 안 돼애…! ”
설화는 미친 듯이 사과했고 경민은 쓰게 웃으며 정수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손바닥은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직접 눈으로 피를 마주한 이상, 어느 정도 냉정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서야 동등한 위치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대로 그녀와 조금만 대화를 나누면 충분히 좋게 끝낼 수가 있었다.
‘ 겨울에 소나기…? ’
하지만 경민의 희망을 부수듯이, 하늘에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일단 비를 피해야… ’
그리고 무수히 많은 빗방울은 벤치에 누워 있던 윤설의 얼굴을 때렸다.
경민의 비명과 설화의 비명. 마지막으로 소나기. 잠을 깨지 않는 게 이상했다.
“ 갑자기 뭐꼬… 갱민아… 무슨 일 있… 에…? ”
윤설은 몸을 움찔거리면서 천천히 눈을 뜨더니 부스스 일어났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설화의 근처에는 선혈이 묻은 나이프가 있었고, 손수건을 감싼 경민의 손바닥에선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그… 누, 누나…? 일어나셨어요…? 일단은 진정하고… 아야… ”
칼에 찔린 거다. 설화가 경민을 나이프로 찔러 버린 거다. 손바닥을 쑤셔 버린 거다.
“ 하… 씨발년이 진짜… 니 도랐제…? 아직 정신 몬차맀제…? ”
여태까지 수십 년도 넘게 경민을 괴롭히고 괴롭혔던 설화였다. 그런데 다시 한번 경민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윤설을 마주한 설화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뭐? 돌아? 내가? 그래, 돌았다. 돌았음 어쩔 건데, 썅년아. 애초에, 내가 지금 씨발 누구 땜에 돌았는진 알아? ”
설화의 말을 신호탄으로, 윤설을 눈알을 부라리며 설화한테 달려들었다.
경민이는 그녀를 뜯어말렸지만 아무리 경민의 목소리라도 지금의 윤설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 애미 뒤진 년이 씨발 진짜 뒤질라꼬 환장했제? 쓰레기 같은 창년 새끼가 감히 갱민이한테…! ”
윤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여태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난폭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윤설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설화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성질을 내는 건지.
“ 씨발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좆같은 년아! 도대체 경민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데…? 얼마나 세뇌한 거냐고! ”
“ 푸흡… 세뇌는 무슨 세뇌? 세뇌는 니가 했지, 씨발아! 니새끼 씨발 갱민이한테 가스라이팅 해댄 거 내가 씨발 모르겠나? ”
“ 하… 가스라이팅? 그건 니가 했겠지…! 경민이는 내 거야…! 경민이는 나랑 사귀고 있었다고…! 나를 귀여워 해줬다고…! ”
“ 지랄하노, 빙시가… 창년이면 창년답게 자살치라, 알긋나? 그게 효도다. 아… 븅신 같은 창년들은 효도할 애미도 없제? ”
“ 말빨 딸리면 패드립 치는 건 느그 가문 전통이냐? 서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니가 뺏어갔잖아, 병신 저능아 새끼야! ”
“ 저능아 새끼…? 내가 뺏어가…? 서로 사랑해…? 니가…? 다른 새끼도 아이고 니가…? 내가 니를 모르나…? ”
“ 그럼 씨발 니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내가 도대체 뭘 했는데…! 내가 도대체 뭐를 잘못했다고 그렇게 괴롭힌 건데…! ”
그녀들의 혓바닥은 마치 방금 사서 포장을 뜯은 식칼의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원한이 서린 독기를 입안에 가득히 머금고 표독스러운 독살을 미친 듯이 뇌까렸다.
충혈된 눈알을 부라리며 서로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 하, 그래… 니는 모르겠제… 맞다, 니는 원래 그런 가시나제? 니한텐 더 이상 할 말 없다… 걍 처디지삐라, 빙신 새끼야. ”
윤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멱살을 잡고 천천히 주먹을 들어올렸다.
츠카사는 일전에 나이프를 콘크리트 벽에 던져서 부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대적했던 게 윤설이었다.
츠카사와 대적하고 경민을 힘으로 압도한 윤설이었다. 신체 능력은 확실했다.
고작 설화한테 밀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 할 말 없으면 어쩔 건데… 니는 여기서 뒤져, 씨발아…! 꺼지라고! ”
설화가 손바닥으로 밀치자 윤설은 단숨에 나가떨어져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설화는 바닥에 있던 나이프를 다시 주웠다.
“ 머꼬…? 씨발 쾌락에 미친 남정네들한테 돈 받고 허리나 흔드는 개병신 창년 새끼가 힘이 와 이리 쎈데…? ”
“ 니새끼 덕분에 밤새도록 흔들었으니까! 애초에 씨발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년이 나한테 힘으로 이길 거라 생각했냐? ”
윤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화한테 절대 힘으로 밀릴 리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힘으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민은 직감적으로 윤설이 밀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 설마… ’
츠카사는 말랐다. 누가 봐도 고생 따위는 평생 해본 적이 없는 몸이었다.
어린 시절에 밖에 나가 뛰어놀아본 적도 없는 것처럼, 피부도 과하게 하얗다.
하지만 윤설이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보다 빠르게 윤설의 뒤를 잡는,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묘기를 선보였다.
자그마한 체격에 맞지 않는 괴력과 체력을 선보였다. 전부 영력 덕분인 거다. 영력이 있어서 그렇게 힘이 셌던 거다.
‘ 윤설 누나도… ’
그러니까 영력이 없는 윤설은 어지간한 일반인보다 못한 힘을 가진 가련한 여자 아이에 불과한 거다.
첫만남 때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정신이 멀쩡했던 이유도.
이번에 술을 고작 한잔 마시고 바로 뻗어 버린 이유도.
전부 영력 덕분인 거다. 경민이 지키지 않으면 윤설은 여기서 죽는 거다.
“ 뒤져라, 씨발년아…! ”
“ 이런 씨발…! ”
또한 윤설을 지키려면 경민은 반드시 칼에 찔릴 필요가 있었다. 머리를 뒤덮는 복잡한 생각들에 타이밍이 늦어 버렸으니까.
이번엔 어디가 찔릴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손바닥으론 안 끝난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죽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죽기 싫었다. 죽고 싶을 리가 없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만 찔려도 눈물이 찔끔 나오고 비명이 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더한 고통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윤설이 죽으면 설화는 경민의 곁에 남을 것이다. 윤설의 유산만 있으면 평생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윤설이 아니라도 츠카사가 있었다. 경민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츠카사가 있었다.
경민이 곁에 남아 주겠다고 말을 바꾼다면 기뻐할 것이다.
윤설의 유산을 전부 탕진해서 츠카사의 유산을 뜯어서 보충하면 되는 거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깡그리 죽어도 여자는 많았다. 경민의 입장에서 여자를 꼬시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대단한 화술이 없어도 막대한 돈이 있고 출중한 얼굴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평생 봉사할 사람이 줄을 서겠지.
어찌 보면 지극히 이성적으로, 어찌 보면 이딴 식으로 쓰레기 같이, 그렇게 따져 보자면 윤설을 구할 메리트 따윈 없었다.
‘ 그냥 가만히 있어, 병신아. 가만히 있는 게 이득이야. 잘못하면 뒤진다고. 뒤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
‘ 우리처럼 되는 거야. 어차피 너 때문에 뒤진 사람 졸라 많아. 이제와서 한 두 명이 더 죽는다고 별반 다를 것도 없어. ’
‘ 어차피 이렇게 깡그리 뒤진 마당에, 씨발 이제와서 착한 척하면서 지랄 떠는 것보다 떵떵 거리면서 사는 쪽이 낫지 않아? ’
‘ 뒤진 년들도 니가 그렇게 살길 바라고 있을 거야. 뒤진 사람이 바라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의 행복이라잖아? ’
‘ 시간을 되돌려봤자 사람은 안 변해. 너는 너야. 걍 여전한 쓰레기라고. 다른 년들도 마찬가지야. 걔들이 변할 것 같아? ’
‘ 지금 같은 시간이 몇번 반복됐을까? 왜 그렇게 반복됐을까? 쟤들이 고작 시간 되돌린다고 변할 만한 위인이 아니니까. ’
영력 때문에 시야에 보이는, 구천을 떠도는 악령들도 경민을 비웃듯이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 히익…! 놔…! 이거 놓으라고, 씨발년아! 난 너 싫어…! 싫어…! 놓으라고…! 나는 씨발 죽기 싫다고…! 도윤 아저씨! 살려주세요! ‘
‘ 싫어… 싫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죽기 싫어…! 꺼져… 저리 꺼지라고…! ’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일전에 한번 그딴 추태를 보인 적이 있었다. 그게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었다.
결과도 알고 있다. 그걸 전부 알고도 그딴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과를 모른다고 해도, 지금의 경민은 그 선택지를 고를 수가 없었다.
‘ 언제까지 그딴 식으로 살래. ’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만 있으면 모든 실수를 바로잡을 수가 있는데, 다시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츠카사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수명을 바쳐서 시간을 되돌렸는데, 윤설에게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럴 수는 없었다.
‘ 내가 안 움직이면 진짜 끝장이야. 칼에 찔려 죽으나, 전부 끝장나서 죽으나, 결국 전부 똑같아. 그렇다면 차라리…! ’
침을 꿀꺽 삼키며 각오를 다진 경민은 곧장 달려들었다.
이빨을 빠득빠득 갈아대는 윤설과 그녀를 나이프로 찔러 죽이려는 설화의 사이에.
분명히 늦었을 터였다. 이전 같았으면 늦었을 터였다. 그대로 윤설은 나이프레 찔려서 죽어 버렸을 것이다.
설령 운동 선수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갑자기 달려드는 사람의 칼을. 하필이면 소나기가 쏟아져서 미끄러운 와중에.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칼이 살갗을 뚫고 장기를 찢는 선명한 감촉에, 설화의 동공이 극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윤설을 찔렀다면, 윤설에게 복수했다면 분명히 해맑게 활짝 웃었을 텐데.
“ 우욱…! 케흑…! 끄으으그극…! ”
고막을 찌르는 비병에, 빗물로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뒷걸음질을 치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원망하는 상대를 향해서 찔러넣은 칼날은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왜, 왜, 왜, 왜, 왜, 도대체 왜애애애애애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정신이 나가 버린 설화는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쥐어뜯고,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성대가 찢어지도록 비명을 내질렀다.
“ 에…? ”
윤설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직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단순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경민이 자신을 지키려다가 나이프에 찔렸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윤설은 전부 부정하고 있었다.
시각이 보여주는 현실을 부정하고 후각이 말해주는 비린내를 부정했다.
고막을 때린 비명을 부정하고 입가에 튀었던 회맛을 부정했다.
하지만 나이프에 찔린 경민이 윤설의 품안으로 쓰러지는 순간.
“ 누, 누나… 괜찮… 아요…? ”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경민이 애써 웃으면서 윤설한테 괜찮냐고 묻는 순간.
경민을 바라보던 윤설의 동공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도하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경민이 칼에 찔렸다. 복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 구급차를 부르지 않으면 경민은 죽는다.
경민이 죽는 것은 싫었다. 경민이 죽으면 살아가는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서,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리고 방금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시야가 어째선지 점점 흐릿해져서, 코앞에 있는 휴대폰 화면도 보이지를 않았다.
“ 아… 욱…! 우아…! ”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전화를 걸어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경민은 죽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겨울 소나기에, 겨울 바람에,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하지만 어쨰선지 가슴은 따스했다. 경민의 선혈이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어서 뜨거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주잡고 있는 두 손은 차가워졌고 고통스러운 신음도 점점 흐릿해졌다.
“ 아… 우… 으…! ”
경민은 자신을 지켜줬는데. 경민은 자신을 구해줬는데. 경민한테 보답하겠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다짐했는데.
결국에는 아무것도 못했다.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무력감. 이대로 경민이 죽는다는 절망감. 눈물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 니 내 딸 맞나? 이기, 이기, 점수가 씨발 이기 뭐꼬? 니가 사람이가? 니는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꼬, 쓰레기 같은 새끼야! ’
‘ 마, 절로 끄지라. 두번 다시 내 눈에 띄면 처직이 삔데이. 알긋제? 니는 이제부터 내 자식도 아이다, 똘개이 새끼야. ’
‘ 학교에서 씨발 무슨 짓을 하고 댕기면 선생이 내보고 그딴 소릴 하긋노. 처음부터 딸년한테 기대한 내가 빙시다, 빙시. ’
‘ 쯧… 한심하게 이게 뭐니. 생활비는 적당히 보내줄 테니까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마렴. 너는 이제 우리 가족이 아니니까. 알겠지? ’
아무것도 못했다. 옜날처럼 다시 아무것도 못했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같은 시간을 수없이 반복했는데도.
‘ 느그 사촌 언니는 스울대 나와가꼬 대기업 취직했다카는데, 니는 씨발 미안하지도 않나? ’
‘ 으휴, 니가 그렇지. 엄마가 도대체 뭐를 그리 못해줬니? 부모한테 아무것도 못받고 자란 애들도 너보단 잘하더라. ’
여전히 그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랑하는 사람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쓰레기였다.
‘ 옷을 못입혔어, 밥을 못먹였어, 아니면 집이 없어? 학원도 비싼 데로 보냈고 니가 그리 머리가 나쁜 애도 아니잖아? ’
‘ 그게 제일 쓰레기 같아. 엄마 아빠가 너한테 얼마를 투자했는지 알아? 그럼 니가 투자받은 만큼은 보답해야지. ’
노력은 해봤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경민을 지키고자. 하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노력 따윈 의미가 없었다.
‘ 명윤설. 너는 엄마 아빠를 원망한 적이 혹시 한번이라도 있니? 없어? 하지만 엄마 아빠는 너를 계속 원망한 거 알아? ’
‘ 낙태할걸. 후회했어. 돈만 진짜 뒤질 듯이 먹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니가 쓰레기랑 다를 게 도대체 뭐니? ’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 아무리 쓰레기 같은 회사라도 그 만큼 투자받았으면 너보다 좋은 성과를 냈을 거야. 알아? 쯧… 기생충 같은 새끼. ’
‘ 노력? 했으면 뭐하는데? 결과가 이렇게 쓰레기 같은데 무슨 소용이야? 노력 같은 소리하네. 누가 알아봐 준대? ’
쓰레기라는 게 특별한 건가. 그냥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인 거다.
그리고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한 윤설은 쓸모가 없었다. 그러니까 쓰레기였다.
‘ 정신과? 이제는 정신과로 병원비까지 받을라고 그래? 그래, 가라. 가. 어차피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잖아. ’
‘ 쓸모 없는 정신병자 새끼. 차라리 죽어서 보험금이나 남기고 가지 그래? 그게 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일 텐데. ’
적어도, 윤설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다.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그리고 자신이 봐온 세상에게.
‘ 나는… 쓰레기… 쓸모없어… 쓸모없어… 쓸모없어… 쓸모없어… ’
‘ 아무것도 못해… 아무도 못지켜… 왜 태어났어… 왜 살아 있어…? 왜 안 죽어? ’
‘ 명진철 딸내미… 나는 명윤설이 아니라 명진철 딸내미… 쓸모없는 딸내미… ’
‘ 기생충… 쓰레기… 정신병자… 키워 놨더니… 쓸모 없어… ’
‘ 나는 쓸모없어… 쓸모없어… 쓸모없어… 쓸모없어… ’
이제는 슬프다는 감정조차도 느끼지를 못하고 있었다. 다만 옛날처럼. 다시 옛날처럼. 경민을 만나기 전처럼.
감정이 메마르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색깔이 사라지고 있었다.
검은 것은 더욱 검게. 하얀 것은 더욱 하얗게. 물들어 갔다.
그녀를 환하게 비추던 신은. 쓸모 있다고 말해주던 신은.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에 유일한 신은, 경민은 지금 이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 쓸, 모없는… 쓰, 쓰레기 새끼 주제에… 태, 어… 나서어… 죄, 죄송… 해요…! ”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가까스로 성대를 쥐어짜내서, 그렇게 사죄하면서, 윤설은 도로 위에 철푸덕 쓰러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