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079.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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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처음으로 경민님을 봤던 것은 광천 고등학교… 화단 옆에 놓여 있는 벤치에서 경민님을 발견하게 됐어요… ”
소현도 광천 고등학교 출신. 그렇다면 분명히 뭔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아아…! 경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돼서 아직도 잊혀지지를 않아요…! ”
“ 찬란한 햇빛… 흩날리는 꽃잎… 해맑은 미소… 아름다웠어요…! 성스러웠어요…! 신을 만난 신도의 기분이 이런 걸까요…? ”
“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떠울릴수록, 피아노를 세게 치면 소리가 커지듯이 경민님을 향한 사랑도 자꾸만 커져서… ”
“지금은 이렇게 경민님과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경민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어져서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요…! ”
하지만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경민을 바라보고,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곁들인 찬사를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텐데… ’
윤설과 다르게 경민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듣는 것은 좋았다. 귀찮게 말을 포장하고 그녀를 속일 필요도 없어지니까.
다만 과도하게 충성한 나머지 경민을 향한 모든 말을 치장하느라, 정작 중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여러모로 곤란했다.
자칫 잘못해서 윤설이 깨어나 버리면 일이 성가시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소현을 조금 재촉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경민은 소현의 머리 위에 손을 얹더니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눈에 힘이 풀린 소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말을 끊어서 정말로 죄송한데… 혹시나 윤설 누나가 깨어나면 안 되잖아요? ”
“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다른 말은 조금 생략하고… 제가 부탁 드린 것부터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
“ 윤설 누나랑 저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저에 관련된 거라면 뭐든지 좋으니까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
그러자 소현은 무슨 죄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경민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 저는 아빠가 좋았어요… 우리 아빠는… 엄청 멋있었어요… 근육질에… 잘생겼고… 상냥하고… 똑똑하고… 돈도 많이 벌고… ”
“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자 잘 그리고… 노래도 잘 부르고… 목소리도 좋고… 그냥 단점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
“ 저는 진심으로 우리 아빠랑 결혼하고 싶었어요… 가족으로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여자로서 아빠를 사랑했어요… ”
“ 엄마를 질투했어요… 우리 아빠 곁에 있는 엄마를 혐오했어요…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
“ 사랑하는 아빠 곁에 있으니까… 아빠는 언제나 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귀여워해 주셨으니까… ”
“ 하지만… 제 행복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지게 됐어요… 우리 아빠가… 갑자기 자살했어요… 그것도 제 눈앞에서…! ”
“ 분하지만… 우리 아빠는 엄마를 엄청 사랑하셨어요… 우리 엄마 뿐만 아니라 가족을 엄청나게 아끼셨어요… ”
“ 그런데… 엄마가… 쓰레기 같은 년이 바람을 피웠던 거예요…! 게다가 아빠 몰래 아빠 이름으로 보증에 사채까지…! ”
“ 쓰레기 새끼 주제에 감히 우리 아빠를 배신했던 거예요…! 결국 아빠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셨던 거예요…! ”
“ 저는 집에 왔다가 죽어 있는 아빠를 보고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리고 엄마랑 살게 됐지만… 엄마는 저를 싫어했어요. ”
“ 제가 엄마한테 질투해서 어릴 적에 사소하게 장난을 쳤던 적이 있거든요. ”
“ 속옷에 구멍을 꿇었던가… 신발 안에 레고를 넣었던가… ”
“ 전부 쌓아뒀다가 이제서야 저한테 보복하기 시작하더라구요… ”
“ 아빠가 저한테 그려주셨던 그림을 찢어 버리고… 아빠의 유품을 태우고… 아빠를 병신 취급하고 저를 욕하고 때리고… ”
“ 게다가 학교에서는 백설화라는 년한테 맨날 괴롭힘을 당했죠… 스트레스 풀이로 처맞고 삥뜯기고… ”
“ 하지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고 전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했어요… 정말로 죽어 버리고 싶었어요… ”
“ 어차피 제가 사랑하는 아빠는 이미 죽었으니까 저는 앞으로 살아갈 의미가 없었어요… 죽으려고 결심했어요… ”
“ 근데… 갑자기 백설화는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까 경민님과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라구요… ”
“ 되게 사이가 좋았대요… 경민님께서도 백설화한테 되게 잘해주시고… 백설화도 경민님을 굉장히 좋아했고… ”
“ 백설화가 행복한 꼬라지를 보는 건 별로 아니꼬웠지만… 나름 좋았어요. 백설화는 저를 괴롭히지 않게 됐으니까요. ”
“ 그런데 갑자기 백설화랑 경민님께서 헤어졌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그리고 백설화가 질질 짜는 모습을 봤어요. ”
“ 병신같이 애먼 친구한테 지랄 떨다가 왕따당하는 꼬라지도 봤었는데… 그걸로 자위할 수 있을 만큼 기분 좋았어요…! ”
“ 게다가 갑자기 백설화의 엄마도 죽어 버리고… 저희 엄마도 정말 뜬금없이 죽었어요. 엄마의 바람 상대도… ”
“ 그리고 하루는 우리 아빠의 납골당을 찾아갔는데… 제가 놓은 기억이 없는 꽃과 편지가 하나 있었어요. ”
“ 저희 아빠 같은 글씨체… 저희 아빠 같은 말투…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러다가 학교에서 경민님을 처음으로 만났는데… ”
“ 경민님은 저를 보고 저희 아빠 같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셨어요… 그리고 저는 그만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어요…! ”
“ 경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경민님은 저희 아빠의 환생이 아닐까…? ”
“ 저는 건방지게도 경민님과 결혼하는 게 제 운명이라고 믿었어요… 하늘이 저를 위해서 기회를 줬다고 믿었어요… ”
“ 경민님과 결혼하고 싶어져서… 경민님의 미소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경민님을 하루 종일 쫓아다녔어요… ”
“ 그리고 저는 그만 윤설님께 들켜 버리고 말았어요… 윤설님은 감히 신을 넘본 죄로 저를 처단하려고 하셨어요… ”
“ 하지만 저는 여태까지 윤설님께서 처단한 한심한 인간들과 다르게… 그때 윤설님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
“ 아… 경민님은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가 아니라… 하늘이구나…! 아빠를 창조하신 것도… 전부 경민님이구나…! ”
“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게 설명이 됐어요… 저희 아빠가 저를 두고 죽을 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
“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경민님께 기도를 올리고, 저를 괴롭히는 것들을 깡그리 처단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
“ 그때부터 아빠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아니,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결국 똑같은 거예요… ”
“ 경민님께 사랑하고 봉사하는 게 다름 아닌 경민님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 오직 경민님만이 세상의 진리… 헤헤… ”
“ 그리고 저한테 그런 가르침을 주셨던 윤설님도… 너무 멋있어서… 너무너무 멋있어서… 반해 버리고 말았어요…! ”
“ 그래서 윤설님을 만나자마자 저는 그만 항복을 선언하고 무릎을 꿇었어요…! ”
“ 그러자 저를 기특하게 여긴 윤설님께서 경민님께 봉사할 기회를 주셨어요…! ”
“ 그리고 윤설님께서… 경민님께서 옛날에 아끼셨다는 애완 노예… 솔빈님, 별림님, 한별님, 은하님, 츠카사님… ”
“ 다섯 분의 사진과 돈을 저한테 주시더니 하나를 선택해서 똑같이 꾸미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씀 하셨어요… ”
“ 그럼 경민님한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조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들켜 버렸네요… 헤헤… ”
“ 아무튼 저는 경민님과 윤설님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정했어요… ”
“ 몸도… 마음도… 전부 경민님꼐 바치고 평생을 경민님께 헌신하기로… 헤헤… ”
“ 아아… 아빠 보고 있어요…? 소현이는 이렇게나 자랑스러운 딸로 컸어요…! ”
소현은 경민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경민의 발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어서 혓바닥으로 정성스럽게 핥았다.
소현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경민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경민은 결코 그녀의 생각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 돌아봐도 역겨울 만큼 쓰레기 같은 짓을 많이 저질렀다. 그건 경민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사랑을 바치며 헌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현은 경민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그다지 없었는데도.
‘ 까놓고 말하자면… 결국 나랑 제대로 대화한 적은 이번이 처음인 거잖아… ’
그토록 사랑하던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마음도 버리고, 자신의 아버지까지 경민의 광신도로 만들면서 정말 모든 것을 바쳤다.
‘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내가 뭐라고 나한테 그렇게까지… ’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해준 것만 생각해도 미안해서 눈물이 찔끔 흐르는데 소현을 생각하면 죄악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녀는 누군가 우연을 가장해서 꾸며놓은 함정에 빠진 거다. 그리고 함정을 만든 장본인에게 세뇌를 당한 거다.
누군지는 뻔했다. 윤설이 분명했다. 전부 윤설이 꾸민 거다. 소현은 아직 살아 있고 기회가 있으니까 살려주고 싶었다.
“ 저기… 뭔가 착각하신 듯한데요… 제가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제가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거든요… ”
“ 푸하…! 에이…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세요… 경민님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건데에… 히힛… ”
“ 아니, 저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저를 사랑해준 여자 애들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구요…! ”
“ 우으으… 그런 말하면… 저까지 기분이 안 좋아요… 경민님이 없으면 저는 진작에 죽었을 텐데 쓰레기 같다뇨…! ”
“ 그건 아마…윤설 누나가 뭔가 꾸민 것을 당신이 착각하시고… 윤설 누나가 당신을 이용하려고 세뇌한 듯한데… ”
“ 흐음… 그치만 저는 경민님의 발가락을 이렇게 핥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엄청나게 기분이 좋은 걸요…? ”
“ 아버지를 생각하세요…! 아버지를 사랑하셨던 거잖아요…! 쓰레기 같은 제가 아니라 훌륭한 아버지를…! ”
“ 에…? ”
“ 딸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도 여러모로 옳지는 않지만… 적어도 저를 사랑하는 것보단 납득이 되잖아요… ”
“ 그러니까… 저는… 아빠도 사랑하고 있어요… 근데 우리 아빠를 만든 사람은… 우주를 만든 신은… 경민님… 이니까… ”
“ 우주를 만든 신이 이렇게 초라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부디 정신 차리고 새로운… ”
“ 우으으… 몰라요… 그냥 경민님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 거리고… 그냥 기분이 좋아요… 계속 이렇게 있을래요… ”
그러나 윤설이 도대체 얼마나 세뇌했는지 경민이 아무리 말해도 소현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헤헤… 경민님께서 걱정해 주시다니… 아아… 너무 기뻐요…! 오늘 돌아가서 다른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히힛… ”
오히려 경민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경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소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윽고 경민은 그녀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았다.
‘ 다른 애들한테 자랑한다고… ’
다른 애들한테 자랑한다는 소현의 발언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냥 단순히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말을 하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 그냥 아무나 붙잡고 말한다… 아니, 그건 이상한데… 그럼… ’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문득 며칠 전에 윤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 그럼… 니가 이겼으니까… 소원… 하나 들어주께… 말해바라… 헤헤… 평소에도 니가 원하는 거믄 전부 들어주겠지만… ’
경민이 포커로 윤설에게서 승리를 따내고 소원을 빌려고 했을 때였다.
윤설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하면서 예시를 들어줬다. 다른 것은 들어보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잡혔다.
‘ 이번엔… 헤헤… 암튼 진짜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께… 오늘은 같이 마약 먹고 하까…? 아니믄 권총 쏴볼래…? 내가 맞아주께… ’
윤설이 마약을 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진짜 마약을 가져오겠다는 소리겠지.
윤설이 진짜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까 진짜 권총을 빌려주겠다는 소리겠지.
‘ 내랑 하기 싫으믄… 다른 년들 불러주까…? 내가 드러운 창년들 말고 깨끗한 년들로만 준비할 수 있다 안 카나… 헤헤… ’
하지만 마지막은 뭔가 조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류계 여성을 데려오겠다는 말이 아니니까 그냥 납치해 오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깨끗한 여자를 준비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아무나 납치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 그리고 윤설님께서… 경민님께서 옛날에 아끼셨다는 애완 노예… 솔빈님, 별림님, 한별님, 은하님, 츠카사님… ’
‘ 다섯 분의 사진과 돈을 저한테 주시더니 하나를 선택해서 똑같이 꾸미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씀 하셨어요… ’
방금 소현의 사연을 들은 뒤라 사고방식이 이상해져 버린 걸까. 자꾸만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 혹시… 말인데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도… 이런 일을 하고 있나요…? ”
“ 네…? 뭐가… 요…? ”
“ 그러니까… 솔빈이나 한별이 같은 애들이랑 똑같이 꾸미는 거요… 그거 당신한테만 시킨 거죠…? ”
경민은 제발 자신의 예상이 틀렸기를, 자신의 변태 같은 망상이기를 바라면서 소현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소현은 해맑게 웃으면서 경민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을 들려뒀다.
“ 아… 아무 생각없이 말하다가 그것도 말씀드려 버렸네요… 헤헤… 저 말고 다른 애들도 많이 있어요! ”
“ 다들 저랑 똑같아요. 저처럼 힘든 일이 있어서 자살까지 생각했다가… 경민님께 구원받은 애들이에요. ”
“ 경민님께 그만 첫눈에 반해서 경민님을 독점하고 싶어서 경민님을 쫓아다니다가 윤설님께 들켜서 교육을 받았어요. ”
“ 그리고 지금은 다들 완벽히 갱생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어요! 어때요? 다들 기특하지 않아요? ”
“ 하루종일 경민님을 생각하며 자위하고… 언젠가 경민님께 귀여움받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
“ 윤설님께 생활비를 받아서, 윤설님께서 마련해주신 집에서, 경민님께서 만족할 수 있도록 관리하면서 살고 있죠! ”
“ 아직은 비밀이라고 윤설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은 분명히 엄청나게 좋아할 거예요! ”
“ 아무래도 경민님께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 노력하기는 조금 힘들잖아요… ”
“ 하지만 제가 경민님께서 저희들을 알고 좋아하셨다고 말한다면… 다른 애들이 엄청 기뻐하고 훨씬 노력할 거예요! ”
소현은 무척 뿌듯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지만 경민은 돌처럼 굳어서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 혹시… 몇 명… ”
“ 열 명이요! 경민님께서 아끼셨던 노예를 완벽하게 재현 가능해 보이는 여자 애만 윤설님께서 직접 엄선하셨대요! ”
“ 아… ”
“ 그러니까 다들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인 거죠! 그리고 제가 무려 대표를 맡고 있어요! 헤헤… 뭔가 부끄럽네요… ”
그나마 간신히 내놓은 질문에 소현이 그렇게 받아치자 경민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전부 나 때문에… 도대체 나 때문에 몇 명이… 이게 무슨… ’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자신 때문에 윤설에게 세뇌받아 소현처럼 변했다고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왔다.
정말 치밀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30명이 넘는 여고생을 잡아다가 경민 전용 성노예로 제조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따져보자면 결국 전부 경민을 좋아해서 자의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데다 그녀들 뿐만 아니라 경민도 미성년자였다.
‘ 정말 대단하네… 발상부터… 그걸 직접 실행하는 것까지… ’
전부 윤설이 저지른 거다. 윤설의 악행이 정말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오직 하나로 귀결되고 있었다.
‘ 확실히 정했어…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아… 나는 무조건 시간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 돼…! ’
경민은 어금니를 악물고 반드시 시간을 되돌려서 전부 바꿔놓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수십 번이고 미친 듯이 곱씹었다.
머릿속에 각인되다 못해서 죽어서도 잊어 버리지 않도록 뇌되었다.
“ 저기… 경민님…? 호, 혹시…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
조금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겁을 먹은 건지 소현이 벌벌 떨면서 물었다.
그러자 경민은 활짝 웃으면서 아까처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니요… 아무것도… ”
잘못이라면 지금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윤설이 했겠지.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그녀들이 텨태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설을 굳이 나쁘게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 분명히 잘못이지만… 어쨌든 의도만 놓고 보자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그랬다… 이거잖아… ’
‘ 문제가 있다면 윤설 누나를 이렇게 만든 환경이 훨씬 문제 있는 거지… 잘못된 짓을 저질러도 바로잡을 사람이 없는 환경… ’
경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윤설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얼른 소현을 돌려보내고 침대에 누워 있으려고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 저기, 그… 경민님… ”
그런데 문득 소현이 다가와서 경민에게 말을 걸었다. 경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현은 머뭇거리다가 대뜸 무릎을 꿇었다.
“ 혹시… 혹시 가능하다면…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면… 인데요… 혹시 잠깐만 저를 따라와 주실 수 있으세요…? ”
“ 다들 경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민님을 위해서 언제나 노력하고 있는데 윤설님께서 포상을 전혀 주지 않으셔서… ”
“ 조금… 힘들어 해요… 저도 얼마 전까지 너무 힘들었어요… 죽을 만큼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엿보는 것밖에 못해서… ”
“ 그, 그러니까… 정말 건방진 소리지만… 혹시 윤설님 몰래… 저희들이 있는 곳에 아주 잠깐만…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
경민은 잠깐 고민했다. 월명 중학교에 도착한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렸던 것은 윤설에게 영력을 받으려는 의도였다.
목적을 달성했으나 굳이 츠카사를 찾지 않고 있는 것은, 윤설이 경계를 늦추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경민을 위해서 미친 듯이 노력했던 지금의 윤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 소현이랑 다른 애들도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에 조금 정도는 노력에 보답해주자. ’
‘ 시간이 되돌아가면 결국에는 전부 잊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슬프잖아. ’
‘ 그리고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도 하고. ’
‘ 윤설 누나한테 들킬 위험이 조금 크기는 하지만 솔직히 들켜도 문제 없어. ’
‘ 그냥 내가 소현이를 우연히 발견해서 억지로 캐물었다고 말하면 괜찮아. ’
‘ 윤설 누나는 내가 츠카사 누나를 배신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머지는 그냥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고… ’
‘ 아니면 조금 이르지만 이대로 광천 고등학교를 찾아가는 방법도 있어. ’
마음을 굳힌 경민은 무릎을 꿇고 있는 소현을 일으켜 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 갈게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