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꾀어지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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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오늘은 좀 피곤해서…….”
머리를 슬쩍 뒤로 빼고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천화의 손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자 천화가 내밀던 입술을 멈추고 조속히 눈을 다시 떴다. 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서려버렸다.
“아, 그래?”
천화는 그 즉시 덮고 있던 이불을 목 끝까지 잡아당기고 반대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천화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요 근래 천화와의 관계를 애매한 핑계를 대며 계속 피했으니까. 재성 씨와의 약속 때문이라지만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상 한다 해도 잘할 자신은 없지만…….
“내일 바에 갈까 하는데…… 같이 갈래?”
잠에 든 듯 한동안 말이 없던 천화가 전조도 없이 문득 그런 권유를 해왔다. 나는 순간 몸을 들썩였다. 천화가 내게서 얼굴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동요를 들켰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에?”
“싫어?”
“그게, 나는 술 잘 못하니까.”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움츠러뜨린 채 몰래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천화가 먼저 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도둑이 제 발을 저린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천화가 바에 갈 때 나도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화와 나란히 술을 마시기 위해 가는 게 아니다. 다른 남자의 헌팅에 넘어가는 천화를 관망한다는 추악한 목적을 위해 가는 것이었다.
나는 별다른 핑계를 찾지 못해 몰래 입술만 핥았다. 천화는 그걸 거절로 받아들였는지 더 이상 권하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침대 위엔 해가 뜰 때까지 지속될 것 같은 긴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문득 탁자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바라봤다. 아침이 되면 바로 재성 씨에게 보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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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저녁. 나는 예정대로 그 두 사람보다 먼저 모던바에 도착해 구석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와인을 앞에 두고 있었다. 자정을 가까이한 시간이어서 그런지 바엔 그럭저럭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럼주 같은 걸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혼자 궁상맞게 안주를 집어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 번을 와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좀처럼 초조함이 사그라들지 않는 나는 주머니에 든 휴대폰을 꺼내 쳐다봤다. 재성 씨에게 온 전화나 문자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뭔가가 어긋나면 바로 내게 연락을 준다고 했었으니, 적어도 아직까진 계획에 이렇다 할 변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불안함을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 도로 폰을 집어넣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어쩌면 난 여기까지 와서 계획이 틀어질 어떠한 변수를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괜히 쓰고 온 챙이 넓은 모자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려 퍼진 건. 나는 조속히 자라목을 하고 유리문 쪽을 쳐다봤다. 몸이 한순간 저절로 움찔거렸다. 마침내 천화가 도착한 것이었다.
목까지 내려온 검붉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바 안으로 들어온 천화는 먼발치에서 봐도 전혀 바래지지 않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천화는 화장을 하거나 장신구를 착용하진 않은 언제나의 맨 얼굴이었지만, 전장의 여신이 손수 빚은 것 같은 청아한 피부와 완벽한 이목구비는 이미 다른 여자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바에 있던 남자들이 입장한 천화를 하나둘씩 쳐다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천화의 인상도 부여받은 미모를 가릴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도도한 얼굴이 남자들의 욕망을 더 자극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오늘 천화는 평소완 다른 복장을 착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배꼽이 노출되는 새하얀 크롭티와 좀 많이 타이트한 레드 스키니진. 어느 것도 천화의 반칙적인 몸매를 더욱 반칙적으로 만들어주는 옷들이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 천화에게 저 옷들을 권했을 때 천화는 눈썹을 꿈틀거렸었다. 평소 천화가 싫어하는 너무 눈에 띄는 색깔과 디자인이었다. 천화는 마지막까지 저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완강히 꺼려했다. 내가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싶다고 거듭 사정사정을 하고 나서야 겨우 못 이기는 척 입어줬었다.
위아래로 농익은 매혹적인 신체 부위들을 본의 아니게 과시하며 걸어가던 천화는 항상 앉던 바텐더 앞 카운터석에 거리낌 없이 착석했다. 천화가 앉은 의자는 등받이가 따로 없는 의자라서 천화의 붉디붉은 애플힙이 의자 바깥으로 살짝 삐져나와버렸다. 그녀의 뒤쪽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들 몇몇이 그런 천화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주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히히덕거렸다.
천화는 그런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도 딱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평범하게 술을 주문했다. 천화를 힐끔 쳐다보며 술을 조합하던 젊은 바텐더는 이윽고 완성된 칵테일을 조심스레 천화에게 건넸다. 천화는 올리브가 장식된 연한 색의 칵테일을 손에 들고 다리를 꼬았다.
새빨간 스키니에 감싸진 천화의 늘씬한 두 다리가 더욱 고혹적인 포즈를 자아냈다. 손에 든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보는 천화는 내 아내였지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벽에 핀 한 송이의 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관계를 금해서 그런지 크롭티로 노출된 섹시한 허리나 목덜미가 평소보다도 더 아리따워 보였다.
“어? 오늘도 계셨네요~?”
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아내의 아름다움을 되새김질하고 있을 때 입구 근처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보니 천화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재성 씨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재성 씨는 천화를 향해 뭐라 말을 건네더니 뒤이어 천화의 바로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천화는 재성 씨 쪽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칵테일에만 집중했다.
자리에 착석해 바텐더에게 뭔가를 주문한 재성 씨는 옆에 있는 천화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계속 말을 걸었다. 입모양은 대충 보였지만 말소리가 작아서 내가 있는 자리에까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휴대폰의 앱을 켜고 가져온 이어폰을 귓구멍에 꽂았다. 그러자 재성 씨의 휴대폰과 연동된 앱을 통해 두 사람의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정말 우리한텐 여기가 만남의 광장인 것 같네요~. 오늘은 일 때문에 지친 피로를 풀까 하고 예정에도 없이 들른 거였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군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시끄러.
우연을 가장하며 자신에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거는 재성 씨를 천화가 가볍게 째려봤다. 보통 남자들 같으면 천화의 차디찬 눈빛에 기가 죽어 진작에 꽁무니를 뺐을 테지만, 남들과는 헌팅 경험치가 다른 재성 씨는 그걸 여유롭게 웃어 넘겼다.
아 참, 혹시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이번에 집에서 고양이를 하나 키워보려고 하는데 말이죠.
고양이?
손에 든 칵테일을 흔들던 천화가 재성 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옛날부터 고양이 같은 작은 동물을 좋아해서 이참에 한 번 입양해볼까 하는데…….
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오는 재성 씨의 거짓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 재성 씨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 고양이를 기르겠다는 얘기는 모두 뻥이다. 전부 천화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어낸 픽션이다.
천화는 작은 동물, 그중에서도 고양이나 강아지를 꽤 좋아한다. 학생 때부터의 비밀스런 취향이었다. 건달 보스라는 위치 때문에 천화는 애완동물을 기르진 못했지만, 가끔 너튜브 같은 걸로 소동물이 재롱을 부리는 영상을 시청하는 의외의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건 천화 본인을 제외하곤 나뿐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나저나 이 나라 아동복지엔 너무 문제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이 과연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는지 아이는 아직 없지만 너무 걱정입니다.
다 위에 있는 늙은 우두머리들 때문이지, 뭐.
나는 순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화가 방금 재성 씨가 한 말에 맞장구를 쳤다. 천화는 본인이 어려운 유아시절을 보낸 탓인지 예전부터 저소득 가정이나 아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천화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난 그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서 그 정보를 전해들은 재성 씨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방금 그걸 교묘하게 이용해 천화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한 번 말문이 트인 천화가 그다음부터 재성 씨의 이야기에 조금씩 답변을 하게 됐다. 천화는 테이블을 턱을 괴고 재성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번 이 바에서 얼굴을 마주쳐서 생긴 가벼운 인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설마 진짜 천화의 안에서 다른 감정이 싹트고 있는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흥분이 솟아올랐다.
정말이지, 경국지색이신데 머리까지 이렇게 박식하시다니. 천화 씨를 만드신 신의 편애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조차 안 가네요~.
오버 떨지 마.
어느 새 칵테일을 다 마신 천화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나는 조금씩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해가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나 적룡 식구들 이외의 남자와 저렇게 오래 얘기하는 천화는 거의 처음이었다.
오버 같은 게 아닙니다. 전 정말…… 음, 성함을 모르니 역시 대화가 불편하네요. 오늘이야말로 함자를 알 수 있을까요?
은근슬쩍 천화 쪽으로 의자를 당긴 재성 씨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재성 씨는 이미 바로 옆에 있는 내 아내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은 물론이요, 감춰진 쓰리사이즈까지 나를 통해 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재성 씨는 천화의 입으로 천화의 이름조차 아직 듣질 못했다. 몇 번을 물어봐도 천화의 입에서 나오는 건 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꼭 알고 싶습니다.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지요?
천화는 재성 씨의 의자가 자신이 앉은 의자에 거의 닿기 직전까지 밀착했음에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저렇게 몸을 가까이 붙으니 여기서 보면 두 사람은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다.
……백천화.
천화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세 글자가 튀어나왔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백천화가, 나 이외에 이성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 적룡의 보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노골적인 헌팅남에게 방금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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