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여건달의 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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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장사를 다 마쳤을 무렵 점장님의 입에서 오늘은 이만 퇴근하라는 말이 나왔다. 아직 근무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느닷없이 그런 소릴 듣자 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오늘은 불가피하게 장사를 좀 일찍 마쳐할 것 같아.”
그렇게 내려진 빵집 셔터를 뒤로 한 난 본의 아니게 생겨버린 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나 서점 같은 곳을 전전해봤지만, 어느 곳도 길게 시간을 죽일 순 없었다. 생각나는 곳을 거의 다 들른 난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할 일 없는 실업자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공원은 예전에 천화와 같이 온 적이 나름 추억의 장소였다. 그땐 우리 둘 다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천화도, 나도 당시엔 학교에서 좀 배척된 학생이었다. 은근히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건 당시에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졸업 후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는 인연이 될 줄은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다.
천화와 부부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엔 조금씩 불안감이 일렁거린다. 어쩌면 나 말고 다른 남자와 맺어지는 게 천화의 입정에선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엄청난 일들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읏?!”
“아? 뭐야?”
상념을 없애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앉은 벤치에서 일어서던 그때 실수로 앞쪽을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버렸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문신남이 눈을 찡그리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딴 생각을 하느라 앞을 제대로 못 봤어요.”
나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지만, 재성 씨만큼이나 체격이 좋아 보이는 문신남은 좀처럼 얼굴을 풀 생각을 하지 않고 흘겨봤다.
“이 새끼, 세상 참 쉽게 살려고 하네? 미안하다고 한 마디 툭 던지면 다 끝나냐? 앙?”
“시발, 안 그래도 우리 오늘 돈 다 잃어서 기분 잡치는구만.”
“얼굴은 꼭 고문관 같이 생겨서는…… 어리바리한 새끼.”
어느 틈엔가 문신남과 그 일행인 것 같은 남자들이 내 주변을 에워쌌다. 졸지에 불량한 남자들에게 포위당해버린 난 눈을 내리깐 채 땀이 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다 필요 없고, 지갑이나 내놔.”
“지갑, 이요……?”
너무도 노골적인 공갈 행위에 난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사람이 별로 없다지만 공원에서 다짜고짜, 그것도 이렇게 환한 대낮에 대놓고 지갑을 내놓으라고 할 줄은 몰랐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지갑이 없어서…….”
“그럼 폰으로 계좌이체라도 해, 새꺄.”
“그, 그게, 제가 지금 폰 데이터도 없어서.”
“하아…… 이 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모두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었건만, 문신남은 내가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잔뜩 눈을 부라리며 예고도 없이 내 멱살을 아프게 잡아 올렸다.
“으윽…….”
“돈 꺼낼 지갑이 없다, 돈 보낼 데이터도 없다……. 그럼 대체 무슨 깡으로 나한테 그 더러운 대가리 들이댄 거냐? 내가 우습냐?”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실수로…….”
“아니, 근데 이 새끼가…… 한 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이걸 확!”
인내력은커녕 이해력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문신남이 힘줄이 잘 보이는 굵은 주먹을 움켜쥐며 날 위협했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 멈춰.”
다른 두 명의 남자들이 벌벌 떨고 있는 날 킥킥거리며 비웃던 그 순간 바로 근처에서 무시 못 할 친숙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실눈을 떠보니 내게 주먹을 휘두르려던 문신남이 고개를 돌려 공원 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문신남이 보고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엔 태성 씨와 유영 씨를 대동하고 있는 천화가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당장 그 손 치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천화가 내 멱살을 잡고 있는 문신남을 노가가 잔뜩 서린 눈으로 노려봤다. 저렇게까지 화가 난 얼굴의 천화는 꽤 보기 드물다. 하지만 둔한 문신남은 천화가 내뿜고 있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지 태평하게 휘파람을 불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가씨, 누구~? 설마 이 찌질이랑 아는 사이야?”
“그럼 뭐? 닥치고 빨리 그 손이나 놔라.”
“알았어, 알았어~.”
능글맞은 태도를 숨기지 않는 문신남이 내 멱살을 스르륵 놔준 다음 징그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천화 쪽으로 다가갔다. 다른 두 명도 시시덕거리며 문신남의 뒤를 따랐다.
“그건 그렇고, 이쁜이 이름이 뭐야? 사는 곳은 이 근처~?”
“나이는 어떻게 돼~? 대학생이야? 아님 설마 고등학생?”
“혹시 이다음에 시간 있어? 오빠들이 같이 놀기 딱 좋은 곳 알고 있는데~.”
자기들 눈앞에 있는 여자가 누군지 상상도 못하는 것 같은 남자들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천화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졌다. 천화는 남자들의 목소리만 들어도 열이 뻗치는 모양인지 이내 짜증 섞인 탄식을 내쉬었다. 저런 질 나쁜 헌팅은 평생 천화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골치 아픈 저주 같은 것이었다.
“이봐, 아가씨~ 왜 대답이 없어? 귀머거리야?”
여러 차례 질문을 해도 천화가 계속 침묵을 유지하자 기분이 살짝 나빠진 듯한 문신남이 겁도 없이 천화에게 손을 뻗었다.
“사람이 물으니 대답을 하는 게 예의…….”
“손 치워라.”
문신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화 오른편에 있던 태성 씨가 뻗쳐오는 문신남의 손을 순식간에 붙잡았다. 태성 씨는 그대로 문신남의 관절을 꺾고 딱딱한 돌바닥에 문신남을 무릎 꿇렸다.
“끄, 끄으윽……!”
너무도 간단히 태성 씨에게 구속당한 문신남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문신남은 즉시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태성 씨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태성 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무시한 압박감을 내뿜었다. 태성 씨의 범상치 않은 적의와 살의에 압도된 것 같은 문신남이 머지않아 얼굴을 두려움으로 물들였다.
“이, 이 새끼가!!”
“시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어이쿠! 스톱, 스톱~!”
문신남의 동료인 남자들이 한 박자 늦게 태성 씨를 공격하려 들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유영 씨가 쏜살같이 몸을 움직이며 가볍게 두 사람을 제압했다. 졸지에 문신남과 똑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 두 명이 상황파악이 안 되는 듯 당황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들 있으시죠? 네~?”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어깨를 동무를 한 유영 씨가 무서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천화 누님, 이 사람들 어떻게 할까요?”
“반쯤 죽여.”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처, 천화?”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문신남이 유영 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곤 갑자기 얼굴을 잿빛으로 바꿨다.
“천화라면, 서, 설마 그 적룡의 백천화……?!”
“그래, 그 미룡이시다.”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 문신남에게 태성 씨가 또렷한 목소리로 확인 사살을 해줬다. 그러자 방약무인하던 문신남과 그 동료들이 아까와는 다른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천화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우리 보스 함자를 함부로 그 입에 올리는 거지?”
“크, 크아악!”
살벌한 표정을 띄운 태성 씨가 관절을 꺾은 손에 힘을 주자 문신남의 신음이 비명으로 변했다. 팔다리를 덜덜 떨어대던 문신남은 머잖아 애처로울 정도로 힘없이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 미룡이신 줄 미처 모르고 그만!”
“모르면 다 되는 거냐? 그리고, 미룡이 아니면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도 돼?”
“크윽! 그, 그런 게 아니고……!!”
문답무용이라 생각한 것 같은 태성 씨가 문신남의 팔을 아예 부러뜨리려는 듯 손을 점점 위로 뻗었다. 그럴수록 문신남의 비명소리는 점점 옥타브를 높여갔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천화가 이윽고 태성 씨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태성 씨가 가볍게 혀를 차며 문신남의 팔을 놓아줬다.
“으, 윽…….”
해방된 자기 팔을 움켜잡은 문신남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고통을 감내하듯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지만, 천화는 그럼에도 얼음장 같이 서늘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꺼져.”
딱딱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들을 향해 차가운 분노를 조용히 내뿜던 천화가 그렇게 짧게 말했다. 그러자 지레 겁먹은 것 같은 문신남 일행이 그 즉시 번개 같은 속도로 일어나 공원 밖으로 도망쳤다. 미룡 백천화의 명성은 이젠 저런 불량배들에게까지 확실히 각인돼있는 것 같았다.
“괜찮으신가요?”
해프닝이 대충 마무리되자 손을 탁탁 털던 유영 씨가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네. 덕분에…….”
“아직도 이 근처에 저런 놈들이 있군요. 나중에 이쪽 구역도 한 번 전체적으로 재점검 돌려볼까요, 누님?”
“그래, 이번 주에 당장 시작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남자들이 도망친 방향을 계속 쳐다보던 천화가 예쁜 얼굴에 눈에 잘 보이는 짜증을 둘렀다. 천화가 저렇게 짙은 쌍심지를 켜는 경우는 내가 안 좋은 일에 엮였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태성 씨, 유영 씨,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애초에 여긴 저희 구역이니까 이것도 다 일이죠, 뭐.”
“…….”
머리를 긁적거리며 손사래를 치는 유영 씨와는 다르게 태성 씨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딱히 이상하거나 뜻밖의 반응은 아니었다. 태성 씨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강하지도, 그렇다고 남자답지도 않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뒷세계 인간으로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냐?”
겨우 얼굴을 편 천화가 저벅저벅 앞으로 다가오며 내 몸 상태를 살폈다. 내가 딱히 맞은 곳은 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자 천화는 아주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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