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여건달 백천화-76화 (76/77)

〈 76화 〉 아지트에서 농락당하는 미녀 보스

* * *

오후가 되니 아까보다 날이 좀 더워져 있었다. 거의 내쫓기듯 병원에서 나온 난 뭉게구름이 낀 하늘을 쳐다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날씨가 제법 좋아서인지 주변에는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나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즐겁게 거리를 거닐고 있는 연인들은 오늘따라 세상천지에 고민거리 하나 없어 보이는 축복받은 인종들처럼 보였다. 나도 저들처럼 평범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이젠 과분한 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행복해 보이는 커플들을 보면서도 부지런히 화장실을 찾고 있었으니까. 아까 병원에서 재성 씨가 보내준 그 관능미 넘치는 천화의 사진들을 본 후부터 자지의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아지트에서 천화가 재성 씨에게 몰래 보빨을 당할 때부터 자극은 밀려들어왔었지만 그땐 경악과 충격 때문에 흥분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커닐링구스와 매치되는 천화의 펠라치오를 본 그 순간 잔뜩 금이 가있던 내 배덕의 둑은 결국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그만 정욕을 범람시키고 말았다.

난 발기를 해도 티도 잘 안 나는 내 바지춤을 신경 쓰며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길거리를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화장실이 있을 법한 건물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몰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을만한 으슥한 골목길도 좀처럼 보이지 않았으니 일단은 계속 참는 것밖엔 방법이 없어보였다. 낯부끄러운 내 자지가 저절로 수그러져주는 것에 손톱만큼의 기대를 걸어봐야겠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용렬한 인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천화가 그런 수치스런 사진을 찍게 된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천화는 내가 재성 씨를 멈춰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연전연패임에도 재성 씨의 내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믿음에 보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러긴커녕 천화가 당하는 모습을 보며 좆을 세우기 바빴다. 대체 이런 쓰레기 같은 사내가 어떻게 백천화의 남편이 된 건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의문이었다.

크나큰 자괴감이 나를 감쌀 무렵 사거리 너머에 있는 작은 호수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재작년쯤에 만들어진 저 호수는 이 동네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플레이스 중 하나였다. 옛날에 저기서 천화와 단둘이 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주변 시선 때문에 스킨십 같은 건 전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마음에 행복을 새긴 장소였다. 이젠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빛바랜 기억이었지만 말이다.

윤슬이 비치는 호수는 언뜻 봐도 수심이 꽤 깊어보였다. 한 번 빠지면 웬만해선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저곳으로 몸을 던지면 이 수치스런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질문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무의미한 자문이었다. 그것을 알아볼 용기가 내게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나라도 죽으면 천화는 분명 슬퍼할 것이다. 삶과 바꿔서 이 저주받은 성벽을 끊을 수 있다 해도 천화가 슬퍼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봐, 그거 조심히 들어!”

“알겠습니다!”

“빨리빨리 끝내고 퇴근하자고~.”

새어나오는 자조적인 한숨을 숨기지 못한 채 한창 다리를 움직이며 나아가고 있던 그때 근처에서 좀 부산스러운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안전모를 착용한 채 철근과 벽돌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전제일이라고 적혀져있는 노란 펜스가 입구를 막고 있는 공사현장에서 망치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인부들이 공사를 진행 중인 저 건물은 아까 전에 한 번 봤었던 건물이었다. 그땐 아직 인부들이 오지 않아 그냥 뼈대만 앙상한 버려진 건축물인 줄 알았다.

지금 저 건물이 보인다는 건 내가 어딘가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난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현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눈에 익숙한 오래된 건물, 적룡의 아지트가 내 시야에 잡혔다. 정처 없이 다리를 움직인 끝에 어느새 의도치 않게 이쪽으로 돌아와 버렸다. 천화를 생각하며 나아간 결과 무의식적으로 천화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이 향해버린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멈춰서고 말았다. 이대로 그냥 지나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천화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까 쓰러졌을 때 병원에 데리고 가준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들렸다고 하면 설령 다른 식구들이 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그리 결심한 난 아지트 건물 쪽으로 다시금 다리를 움직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사현장의 소음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 #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무렵 갑자기 터져 나온 고성에 난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지트 문 너머에서 예고도 없이 천화의 성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멈춘 난 침을 꿀꺽 삼키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아지트 문을 조용히 주시했다. 자세히 보니 두꺼운 철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채 살짝 열려있었다. 소리 없이 문 쪽으로 다가간 난 인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문틈 너머를 살펴봤다.

몰래 훔쳐본 아지트 안에는 보스인 천화를 중심으로 한 내가 아는 적룡 조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간부인 태성 씨와 유영 씨 뒤에 삼 열 종대한 조직원들이 양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그런 부하들을 책상에 앉아있는 천화가 노기가 서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태성, 대체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면목 없습니다, 보스…….”

눈썹을 찌푸린 천화가 가장 선두에 서있는 태성 씨를 날선 목소리로 질책했다. 태성 씨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천화의 꾸짖음을 달게 받았다. 간부가 보스에게 면전에서 문책을 당하자 그 뒤에 서있던 조직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안 좋아졌다.

“하아, 가뜩이나 조직 재정 힘든 거 빤히 아는 놈들이 이바지는 못 해줄 망정 있는 자금줄까지 끊기게 하면 어쩌잔 거야!”

“죄송합니다, 누님……. 하지만 애들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주세요. 그쪽에서 너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바람에…….”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적룡이 하는 일에 트러블이 생긴 것 같았다. 부외자인 내가 봐도 사태가 좀 심상치 않아보였다. 잔뜩 찡그려진 천화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 그게 뭔데?”

“그게, 저…….”

가시가 잔뜩 돋쳐있는 천화의 질문에 어째서인지 유영 씨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유영 씨가 머뭇거리는 시간이 커지면 커질수록 천화의 얼굴도 점점 험악해져갔다. 자신감 없이 우물쭈물거리는 건 천화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였다.

“뭐냐고 묻고 있잖아!”

“그, 그게…….”

“보스와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게 그쪽의 요구 조건이었습니다.”

유영 씨가 계속 말을 더듬으며 대답을 망설이자 바로 옆에 있던 태성 씨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요구 조건에 아지트 안을 몰래 엿보고 있던 난 반사적으로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천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풍만한 가슴 밑으로 팔짱을 꼈다.

“……그게 이유냐? 그래서 우리 돈줄 중 하나를 얼굴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착잡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천화가 태성 씨 뒤쪽에 서있던 조직원들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천화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은 조직원들은 지레 겁을 먹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보스인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데, 왜 부하들인 너희들이 괜히 더 발작을…….”

분을 삼키듯 말을 잇던 천화의 목소리가 갑자기 희미해져갔다. 천화가 말소리를 낮췄기 때문이 아니었다. 건물 바깥에서 들려온 심한 굉음이 천화의 음성을 집어삼킨 것이다. 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분명 아까 지나쳐온 공사현장에서 생성된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마치 땅이라도 뚫는 듯한 시끄러운 소음은 아지트를 한동안 어지럽혔다.

“씨발, 공사 한 번 더럽게 시끄럽게 하네.”

창밖의 소음이 간신히 자자들었을 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천화가 책상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천화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부하들 쪽으로 접근했다.

“아무래도 오늘 간부 포함해서 제대로 교육 한 번 해야겠어. 전부 눈 감아!!”

책상 앞으로 나온 천화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아지트에 있던 적룡 조직원들이 모두 동시에 눈꺼풀을 닫았다. 아무래도 천화는 이번에 식구들 군기를 한 번 다잡을 생각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 잠시 동안 쓰라린 시간을 보낼 조직원들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던 그때 갑자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삼 열 종대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인물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눈을 뜨고 있는 인물의 정체는 바로 적룡의 신입인 재성 씨였다.

재성 씨는 자신을 제외한 남자의 눈이 모두 감긴 아지트에서 홀로 날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이 흠씬 느껴지는 재성 씨의 미소는 내 등줄기에 한 방울의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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