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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250화 (250/358)

〈 250화 〉 246. 예림이의 결심

* * *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여줄게.”

영선 누나가 시범을 보이겠다고 야심차게 나섰다. 송편 빚는 법을 안다고 했으니까 잘 하겠지?

“자, 이렇게 잡고. 고물 얹고, 마무리하면­”

영선 누나가 자랑스럽게 내민 송편의 모양이 이상했다. 만두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생긴 걸론 군대 PX에서 돌려먹던 홍진경 만두인데? 우리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엄마와 할머니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구, 아가씨. 그게 송편이야?”

“어, 어? 왜 안 돼지?”

영선 누나는 많이 당황하며 이리저리 만졌지만 예뻐질 기미가 없다. 오히려 속이 터져 흘러나왔다.

“누나. 진짜로 송편 많이 만들어 본 거 맞아요?”

내 의심에 누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대답했다.

“사실 내가 많이 만들어 본 건 아니고... 도장 오빠들이 만드는 거 맨날 봤거든?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네?”

아이고. 보는 거랑 만드는 건 다르지.

그래도 영선 누나의 실수에 우리 모임의 분위기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할머니가 웃으며 다시 시범을 보였다.

“위를 잡는게 아니라 옆으로, 엄지와 검지로 밀듯 하는겨.”

할머니는 능숙하게 동그란 모양의 송편을 만들었다. 빈백 모양으로 예쁘고 조그맣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모양의 송편이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흥미롭게 쳐다봤다.

“따라해 보슈.”

다들 송편 빚기같은 이벤트와는 연이 없는 사람인지라 기회가 오자 미칠 듯이 집중한다. 다섯살배기 애들에게 찰흙놀이를 쥐어주면 이 정도로 집중하려나.

“이렇게 하면 되나요?”

맨 먼저 성공한 건 유다 누나였다. 타투가 직업이어서 작고 세밀한 작업을 금새 해낸다. 날렵한 송편을 만들어내고, 할머니가 보여주신 대로 착착 따라했다.

“아이구. 예쁘네! 이쁜 딸 낳겠어!”

유다 누나는 헤헤 웃으며 내 쪽을 살짝 쳐다보곤 다시 송편 작업을 시작했다. 재미가 있는지 열심히 만드는 중이다.

샤를과 예림이는... 괜찮다. 예림이야 카페 알바도 하고 와플도 제법 잘 만들었으니까. 샤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송편을 조각하는 수준이다.

...샤를, 예쁜 딸 낳는다는 건 미신일 뿐이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의외로 영선 누나가 제일 못생긴 송편을 만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감자같이 울퉁불퉁한 송편만 만들어냈기에 엄마가 농담을 던졌다.

“아가씨. 아무래도 아들만 낳아야 쓰겠어.”

영선 누나는 제대로 반박도 못하고 시무룩해졌다.

“우우, 할 수 있어요­!”

포기하지 않고 다섯 개, 열 개, 스무개까지 만들어 봤지만 여전히 못생겼다. 못생긴 송편 군단을 앞에 두고 어깨를 푹 수그렸다.

“으으­”

서러운지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다. 아니, 송편 만들기에 그렇게 열 낼 필요가 있어?

하지만 누나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도와달라고 나한테 착 달라붙었다.

“강민아. 모양 하나만 잡아줘. 나 예쁜 딸 낳고 싶거든...?”

아이고. 그래요. 내가 거의 다 만들어주자 누나가 손가락으로 모양만 잡아 송편을 자랑스럽게 내려놨다. 이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길 수 있다니. 대단하구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선 누나는 기뻐 보였다.

“헤헤, 강민이랑 만들었다. 예쁜 딸 낳을 수 있겠지?”

주어를 생략하니까 어째 좀 이상하게 들리네? 예림이는 ‘나도 저렇게 할 걸' 이란 표정으로 영선 누나와 날 쳐다봤다.

다행히 엄마 할머니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느라 여자들 사이에서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다행이다.

“오랜만에 사람 많으니까 좋다야. 강민아. 종종 친구들 데리고 오거라.”

“설날에도 또 올게요!”

예림이가 오겠다고 약속했다. 다들 저도 올게요, 여기 너무 좋아요 등등으로 약속했다.

...그때까지 이 하렘, 공중분해 없이 살아남아야 할텐데.

내 어깨에 짐이 무겁다. 한숨을 푹 내쉬고 마지막 남은 송편 반죽을 모아 특대 송편을 만들었다.

제발 다들 싸우지 말고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내가 잘 해야겠지만서도.

***

“강민아. 애들 이부자리좀 봐 주거라.”

휘영청 밝은 달이 뜨고, 지고, 대청마루에서 벌어진 술판이 거의 다 끝나간다. 송편에 배, 사과, 귤, 포도, 약과, 너비아니­ 할머니는 우리 배를 터트려 죽일 셈인지 끝없이 음식을 내왔다.

앉아서 좀 드시라고 몇 번을 말해서 겨우 앉혔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시게 일은 여자친구들이 돌아가면서 하고 술도 끊임없이 따라 드렸다.

“강민아. 친구들이 아주 착하고 참 곱구나.”

“그치. 엄마. 내가 아들 참 잘 키웠다니까.”

엄마와 할머니는 쿵짝이 맞아 금세 막걸리 닷 병을 비웠다. 그리고 우리도 같이. 달 아래에서 마시는 술은 참 각별했고, 내 옆에 앉은 여자친구들도 계속 바뀌었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볼에 쪽 키스하기도 하고. 깍지끼고 손을 꽉 잡기도 하고.

선선한 바람과 한복 입은 예쁜 여자친구들. 술과 음식. 풀벌레 우는 소리. 가로등도 없는 산 속. 마치 별천지 같았다.

몇개월 전의 내게 ‘너 예림이 낀 하렘 만들어서 부모님 뵈러 간다’ 라고 말해준다면 개소리 말라고 콧방귀나 뀌었겠지?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오빠. 기분 좋아요?”

샤를은 어느새 달빛 아래에서 뿔을 살짝 드러내고 날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뿔의 피어싱이 달빛을 받아 은처럼 반짝 빛났다.

꽤 취한 모양. 다른 사람도 다들 취해서 괜찮겠지. 샤를의 손에 깍지를 끼며 마주 웃어줬다.

“기분 좋네.”

우리 둘은 밤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달을 올려다봤다.

“...고마워.”

나도 모르게 감사인사를 했다.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샤를 덕분이다. 내가 기여한 건 기껏해야 폰허브로 마력을 벌어들이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샤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빠. 그런 말 하지 마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마계로 쫓겨났을 지도 몰라. 평생 모았던 마력도 다 써버린 빈털터리로 말야.”

손바닥을 간지럽히며 내 어깨에 기댄다.

“내가 처음 만난 게 오빠여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죠?”

내 손을 잡아서 슬쩍, 자기 뿔 위로 올리고 속삭인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구멍까지 뚫게 해줬는데.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고 해요.’

“...그래. 사랑해.”

정말이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인지! 샤를의 볼에 쪽, 뽀뽀해 주고 꽁냥거렸다.

그걸 본 예림이가 옆에 슬쩍 앉았다.

“오빠. 나 두고 샤를이랑만 놀거야?”

예림이가 웃으며 날 응시했다. 상냥한 눈이었다. 내가 낮에 샤를 행세를 시킨 것도 책망하지 않는 눈빛. 그냥 자길 챙겨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사실만 담겨 있다.

그 상냥함에 오히려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해. 신경 써줬어야 했는데.

오늘 여러가지로 고마워.”

말하다 보니 여러 가지가 모두 미안했다. 하렘 멤버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도. 고향에 둘이서 오지 않고 여럿이서 온 것도. 샤를 행세를 시킨 것도. 예림이랑만 여행을 안 간 것도.

예림이는 얼굴을 무릎에 묻고 내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걸 차분히 들었다. 아까의 상냥한 표정은 어느 새 사라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순간적으로 무서웠다.

예림이가 내 난봉꾼같은 행각을 더 이상 못 참겠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내게 이별을 고하는 건 아닐까?

지금, 예림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예림은 아까 영선이 송편을 만들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예쁜 송편을 만드려고 고군분투하던 모습.

송편을 하나 빚고, 못생긴 송편을 서글프게 쳐다보다­ 강민 쪽을 흘겨본 다음 소매끝으로 눈물을 슬쩍 닦아내고 다시 새로운 송편을 빚었다.

예쁜 송편을 보여주면서 강민에게 자랑하고 싶었겠지.

‘봐, 강민아. 예쁘지? 나랑 결혼하면 예쁜 딸 낳는다?’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갔다.

아주 사소한 일로도 강민을 부르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환하게 웃는 걸 보고 싶다.

강민의 상냥한 미소를 보면 그 날은 뭐든 해 낼 수 있다. 공부든, 일이든, 건전지가 닳지 않는 무적의 상태가 된 기분.

강민 오빠는 목소리도 좋다.

‘잘 하네. 예쁘네. 좋다. 뭐 해? 괜찮아?’

강민이 따뜻한 말을 해 주면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다.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얼굴은 빨개지고 심장은 쿵쿵 뛰고.

그래서.

오늘 영선 언니의 마음을 확인하자­ 도저히 다른 하렘 멤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유다도, 샤를도, 영선도­ 모두 자기만큼이나 강민을 좋아하고 있다.

혼자 오빠를 독차지하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예림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맨 처음에 오빠가 고백했을 때 앞뒤 재지 말고 수락할 걸.’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의 모든 달콤한 연애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다.

예림은 겁을 냈었고,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 어쩌다 네 명의 여자친구가 강민을 두고 다투게 됐다.

이제 혼자 행복해질 방법은 없다. 그냥 하렘을 받아들일 수밖에. 모두가 적당히 행복한 길이었다.

예림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빠. 있잖아요.

저 할 말 있는데.”

그러자 강민 오빠가 불안해한다.

바보같은 오빠. 또 내가 헤어지자는 소리할까봐 무서워하는 중이겠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 거절 한번에 휙 도망가버리고.

이번엔,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해요.

그리고 예림은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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