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화 (1/199)

* * *

〈 1화 〉 빙의 (1)

* * *

커버보기

[푸른 장미 정원]이라는 여성향 미연시 게임이 있다.

흔한 역하렘 여성향 미연시로,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라는 가상의 학원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물이다.

평범하게 여캐가 나오는 걸 좋아하는 씹덕인 나로선 제목조차 모르는 게 정상이련만, 우리 부모님이 자식농사를 실패하셨는지 하나 뿐인 내 누이가 나 못지 않은 씹덕이어서 일상 중에 종종 접하고 말았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강제로 주입당하는 것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림 그려주면 돈 준다고 해서 혹 한 내가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림 그려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어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성격 같았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여성향 게임의 정보를 직업 정신으로 귀담아 듣게 되었으니까.

어째서 평생 플레이 해볼 일도 없을 게임의 정보를 귀 담아 들은 게 다행이냐고 한다면 그야.

늘 그렇듯. 클리셰대로.

[푸른 장미 정원]의 세계로 빙의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중 모든 루트에서 여주를 방해하는 악역 포지션인, '레티시아 체페슈'의 동생 '스칼렛 체페슈'로.

*

빙의한 지 대략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 스칼렛 체페슈라는 이름도 익숙하진 않아도 누군가 호명할 때 나를 부르는구나 하고 대답할 정도로는 적응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백한 얼굴의 메이드에게 시중을 맡긴다. 핏기 하나 없이, 생명의 기척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아 마치 기계와 같은 그것들은 그야말로 시체와 다름 없다.

그야 구울이니까. 그리고 구울을 부리는 누님과 나는 흡혈귀고. 세안을 마치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흡혈귀라서 그런지 입이 떡 벌어지는 미모였기에 만족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몸만큼은 마음에 든단 말이지.

빙의하기 전 우리집 축생에게 듣기로는, 인간과 인간 비슷한 인외종의 화합을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흡혈귀 중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인 체페슈가 제국의 작위를 받아들였다고 했었다.

양지에서 당당히 혈액도 돈 주고 사먹는다고.

애초에 세세한 세계관 설정보단 캐릭터 위주로 서사가 굴러가는 여성향 게임이어서 그런지 작중에서 나오는 흡혈귀를 보면 은이나 십자가에도 약하지 않고 흐르는 물도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그나마 약점인 게 햇빛이라는데, 그마저도 고위 흡혈귀즈음 되면 햇빛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고.

이건 누나한테 들은 게 아니라 이 몸으로 직접 겪은 거다. 한낮에 정원을 걸어도 아무렇지 않더라. 피부가 조금 따끔따끔한 정도?

정해진 미래가 몰락만 아니었으면 그냥 개꿀 빨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게임의 어느 엔딩으로 가도 체페슈가 몰락하거나 아니면 아예 멸문한다는 걸 아는 입장에선 마냥 좋게 여길 수 없단 게 떨떠름하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 없진 않으나, 그것도 일단 살아나가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

스칼렛 체페슈

근력 ▶ 102 (44)

민첩 ▶ 121 (41)

체력 ▶ 105 (39)

내구 ▶ 84 (32)

마력 ▶ 214

상태: 탈력, 욕구

특성: 혈귀, 공?, ….

….

+++++

상태창, 하고 속으로 낮게 읊조리자 눈 앞에 뿅 하고 생겨난 반투명한 그것. 흔히들 전생 특전하면 생각나곤 하는 상태창이다. 실제 게임에서도 여주 시점에서 남캐들 호감도 관리하려면 나오는 상태창이기도 하고. 밑으로 쭉 이어져 있는 상태창을 넘기고 나니,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

메인 퀘스트 ­ 살아남기

▶ 언젠가 몰락할 운명의 당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결말로 바꿔보세요!

보상: 결말의 난이도, 완성도에 따라 달라짐.

튜토리얼 ­ 목표 설정 (??? 0/1)

▶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작은 목표를 하나 설정 후 달성하세요.

보상: 설정한 목표의 난이도에 따라 달라짐.

+++++

주목하고 있는 건 메인 퀘스트 항목이다. 보상이 내가 만들어낸 결말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니까.

이것을 통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이는 것이 이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다른 걸 고를 처지조차 못됐다.

일단 최우선요소는 누님이 황자에게 반하는 일을 막는 것이었다.

원작이 진행되는 건 누님이 3학년일 때고, 내가 아는 설정상 누님이 황자에게 반하는 건 2학년 1학기 때 중간이니 아직 막을 수 있었다.

두 달 뒤에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누님이 2학년으로 올라가니까. 그 외에도 마탑주에게 반하거나 북부 대공에게 반하거나 하는 루트도 있지만 그 루트로 진입하는 분기점은 2학년 2학기라 아직은 괜찮다.

일단 황자한테 반하는 일을 막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퀘스트창에 있던 튜토리얼의 문구가 바뀌었다.

띠링!

+++++

튜토리얼 ­ 목표 설정→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를 올리자!

▶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를 올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반하는 일이 없게 만들자!

▶ 달성 조건 ­ 레티시아 체페슈의 호감도 70 이상 (61/70)

기한 ­ 아르카디아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

누가 미연시 아니랄까봐 퀘스트도 꼭 이런 걸 주네.

내가 거절할 시간도 없이 자동으로 등록된 퀘스트창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취소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퀘스트창을 끄고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구울 메이드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명령대로 움직이는 구울이라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하게 행동해도 되는 건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역시 메이드라고 하면 생각나는 야릇한 로망 같은 게 있으니 좀 아쉽기도 했다.

누님만 괜찮다면 다음에 인간 메이드라도 들여볼까.

실없는 생각따위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내가 다가가자 허리를 슬쩍 숙인 구울 메이드를 지나 들어서자, 나를 꽤 기다리고 있었는지 부루퉁해진 얼굴의 누님이 있었다.

누님은 우아한 몸짓으로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행위 자체가 우아한가에 대해선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늦었네.”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거짓말. 아침이라 또 한참 비몽사몽하다 왔겠지. 내가 말했잖아?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려면 아침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렇다. 실제로 아무리 고위 흡혈귀가 햇빛에 강하다한들, 본질적으론 달빛을 받으면 강해지고 그림자 속을 넘어다니는 밤의 귀족이거늘.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흡혈귀가 식사를 위해 일어나 움직이는 건 체페슈 뿐.

3대 혈귀라 불리는 체페슈, 드라쿨레아, 노스페라투 중 인간과의 교류에 대표로 나선 체페슈이기에 인간들의 습성에 맞춰주는 것이다.

누님은 아카데미 학생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나도 곧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니, 아침에 활동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누님이 닦달하길래.

솔직히 아침에 약해진 것은 사실이라 누님의 잔소리에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누님도 엄한 표정을 풀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한 차례 내쉬었다.

“그래. 잘 알고 있다니까 더 말하진 않을게. 아픈 곳은?”

“거의 다 나았어. 걱정 마.”

내가 빙의했던 날.

스칼렛 체페슈의 몸에 큰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열이 날 리 없는 흡혈귀의 몸이 피가 끓을 정도였다고. 내가 빙의한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 상태라 내가 빙의가 가능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존의 스칼렛 체페슈와 나는 명백히 다른 타인이므로, 빙의 직후에 누군가에게서 의심을 사기 전에 그냥 기억이 없다고 선수를 쳤다.

아예 기억이 날아간 백치가 된 게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기억이나 내가 누구인지, 누님은 누군지 정도는 기억해도 그 외는 흐릿한 정도라고.

게다가 그 이후 한달 동안 저택에 박혀 생각을 정리하느라 방 밖에도 잘 안 나왔으니 누님 입장에선 걱정이 될 수밖에.

한달동안 식사 할 때가 아니어도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방에 찾아와 기억을 잃었다는 내가 혹여 기억을 되찾지 않을까 많을 것을 알려주던 누님이다.

그러고보니 호감도가 이미 60이 넘었었나.

게임 설정 상 호감도 50 이상부터는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수준이라고 하던데. 가족이라 기준을 다르게 잡아 조금 높게 나온 거라고 쳐도 생각보다 높았다.

슬쩍 누님을 쳐다봤다. 걱정스러운 듯 나를 보는 누님의 시선에 애정이 묻어있었다.

누님은 모르게 은근슬쩍,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실제 나의 누님은 아니어도, 스칼렛 체페슈의 입장에선 명백히 친누님인 레티시아의 호감도를 올리라니, 퀘스트라지만 그래도 되나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하기 싫더라도 퀘스트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게 아닐까? 비록 기억을 잃었다는 내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준 누님이어도, 손 대고 싶지 않아도 이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솔직하게 굴자면, 지금까지 겨우 참아오던 것을, 퀘스트라는 명목 하에 참지 않기로 했다.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