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레티시아 (2)
* * *
무음.
환한 빛.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환한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전투를 더 이어나갈 수 있다면 억지로 눈을 떴겠지만, 이미 마나가 오링난 몸이 탈력감에 무너지기 직전이었기에.
눈을 감았음에도 눈꺼풀에 빛이 비칠 정도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즉 눈이 제 기능을 잃지 않았을까.
몇 분이나 지속 된 발광이 잦아든다. 흡혈귀의 재생력 덕에 눈을 뜨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눈을 뜨자, 완전히 박살난 지하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야 누님도 나도 쓸 수 있는 최대한을 때려박았으니 멀쩡한 게 이상할테지.
자동 복구 기능도 있고, 자잘한 정리와 보수는 구울 메이드를 시키면 되니 망가진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마력은 거덜 났어도, 몸은 움직일 만 했기에 나는 풀리는 허벅지에 힘을 줘 가며 누님을 찾았다.
“누님ㅡ.”
왜 답이 없지. 기절했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먼지 바람을 걷어내며 걸었다.
이쯤이었을텐데.
“누님. 어딨어?”
만약 누님이 기절했다면, 내가 이긴 건가?
흠.
기분 좋은데, 그건.
“누님. 기절했어ㅡ?”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지하실이라 환기가 제대로 안 되니, 먼지바람이 제대로 사라지질 않는다.
나중에 환기 구멍이라도 만들어야겠네ㅡ, 따위를 생각하고 있자,
“잡았다.”
“윽.”
텁.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내 발목을 잡았다.
깜짝이야. 슬쩍 내려다보자, 먼지를 잔뜩 끼얹은 누님이 실실 웃고 있었다.
“내가 졌어. 잠깐 기절했거든.”
“졌으면서 뭘 그리 웃고 있어?”
“글쎄ㅡ. 그렇게 지기 싫었는데, 막상 지고 나니 속이 후련하네?”
“거 참.”
난 괜히 할 말이 궁해져서, 허리를 숙여 바닥에 널부러진 누님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어려진 거 봐.”
“피를 엄청 썼거든.”
누님이 헤헤 웃었다. 이십대 중반에서 후반쯤으로 보이던 게, 십대 후반쯤으로 어려보인다고 할까.
키는 그닥 작아지지 않았는데, 젖가슴이 일단 좀 작아졌다. 전체적으로 성숙함이 줄어들었다.
모든 흡혈귀가 피를 썼다고 어려지진 않는다. 누님이 특별한 거지.
“이젠 내가 오빠 아닌가? 오빠, 해봐.”
“참 내. 해주겠니?”
내가 짓궂게 장난을 치자, 코웃음 치며 내 콧잔등을 찰싹 때린다. 보아하니 진 게 분하긴 해도 마음이 크게 상한 것 같진 않다.
나는 그대로 누님을 공주님 안기로 고쳐 안았다. 누님도 자연스럽게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전에는 대련하고도 나한테 안기는 게 부끄러워 구울 메이드를 부르거나 아님 혼자 힘들게 올라갔는데, 심정의 변화가 있던 걸까.
“저녁은?”
“스테이크에 포도주.”
“오.”
“후식은 안 물어봐?”
“딱히.”
인간의 음식은 흡혈귀에게 기호식품에 불과하다. 주식은 어디까지나 혈액이다.
하지만 고위 흡혈귀쯤 되면 피를 마시는 데에 목 매지 않아도 된다. 피 한 방울만으로도 일주일치의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
뭐, 강해지고 싶다면 무작정 흡혈하는 것도 방법일테지만….
그랬다간 폭주하기 쉽다. 토벌 대상이 되기도 할테고.
애초에 단기간의 흡혈만으로 수준을 끌어올리는 건 도핑에 가깝다. 천천히, 꾸준히 섭취하는 거라면 격의 상승에 도움이 되겠지만.
날 때부터 최상위 서열인 우리 남매에게 흡혈로 격을 끌어올리는 건 아주 먼 이야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식탁에는 인간의 음식들이 주로 올라온다.
이전에야 내가 몸상태를 꾸준히 회복해야 했으니 매일 같이 피를 마셨지만, 이젠 그것도 슬슬 필요 없게 됐다.
지하실에서 올라와, 일단 몸을 씻고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클린을 쓰면 되지만, 먼지를 잔뜩 뒤집어 썼으니 물로 몸을 씻고 싶다고.
누님을 내려놓기 전에 허벅지를 주물렀더니 기겁을 했다. 그래도 때리진 않고 욕실로 가더라.
나는 방에 있는 샤워 부스를 쓰기로 했다.
아. 씻기 전에 데이지를 불러서, 몇 가지 물품들을 내 방에 구비시켜 두라고 했다.
데이지의 얼굴이 잔뜩 빨개지길래, 너한테 쓸 거 아니라고 했더니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빨개지곤“네, 네!” 하며 달려갔다.
어휴.
*
씻고 나서인지 속옷 위로 샤워가운만 걸치고 개운한 기분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왔는지 비어있는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오랜만이라며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데이지를 희롱하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몇 분 지났을까.
누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먼지 잔뜩 뒤집어 쓴 전신 타이즈 대신, 캐미솔에 돌핀 팬츠 차림이다..
아무리 편의성 설정이 판 치는 게임 속이라도 그렇지, 돌핀 팬츠가 말이 돼?
…라고 하기엔, 솔직히 말해서 꼴렸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 핏기 없는 얼굴에 분홍빛이 감도는데다 분내가 나는 걸 보면 화장도 한 거 같은데….
괜히 눈길이 끌린다.
누님도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당당하게 걷다 부끄러워졌는지 메이드에게서 가운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쩝.
“잘 씻었어?”
“잘 씻었냐니. 이상한 질문이다. 그거.”
“그런가?”
의미 없는 잡담을 하며 식사를 했다. 데이지는 눈치 좋게 슥 빠져줬기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님과 나 단 둘이다.
달그락. 잠깐의 침묵과 함께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흐르다, 내가 입을 열었다.
“가운은 왜 입었어?”
“뭐? …너도 입었잖니.”
“난 처음부터 입었고. 누님은 여기 와서 입었고.”
“….”
잠시 나를 흘겨보던 누님이 포크로 스테이크를 푹 찍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알면서 그럴래?”
말 없이 빙그레 웃었다. 오히려 내가 입을 다물자, 누님이 더 당황해서는.
“왜, 왜 말이 없니. 무안하게….”
그러고는 스테이크를 입에 냠 넣고 우물우물 한다. 귀엽다.
진즉 스테이크 한 덩어리를 모두 먹어치운 나는, 내 눈치를 보며 스테이크를 먹는 누님을 빤히 지켜봤다.
냠냠….
지그시….
냠냠….
빤히….
….
“그, 그만 볼래? 못 먹겠어.”
누님이 항복했다. 나는 자리서 일어났다. 움찔, 포크를 입에 물고 몸을 떤 누님의 눈이 나를 흘겼다.
천천히 누님에게 다가가자 떨림이 강해졌다. 뭘 상상하고 있는지 원.
“누님.”
“으, 으응.”
“이따 밤에 방으로 와요. 알았지.”
“…아, 아라써.”
웬 혀 짧은 소리래.
픽 웃곤 누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
레티시아 체페슈는, 인정하기로 했다.
언제 꺾일 지 모르게 약해졌던 동생은, 홀로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다시 성장해버렸다고.
이제 겨우 두 달인데ㅡ, 너무한 거 아냐ㅡ, 라고 장난스레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내심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그녀의 동생이, 그녀에게 의지하길 바랐다. 언제까지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의, 든든하고 멋진 누나이고 싶었으니까.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평생 동생의 등 뒤만 바라보았기에 품어왔던, 그녀도 모르던 욕구였다.
한 번 자각하고 나니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동생을 향한 컴플렉스와 애정이 뒤섞인 변태적인 욕망.
비록 그 욕망에 사로잡혀 한동안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이상으로 좋았다.
하지만 깨달았다.
동생이 언제까지고 자신의 품에 갇혀 있지 않으리란 걸.
그래도 시기가 너무 빨리 찾아온 거 아닌가, 하는 불만은 있지만서도.
그래서 어떻게든 그것을 미뤄보기 위해 동생을 전력으로 이겨보려 했지만.
결국 졌다.
전력을 다 한 절기에서 밀렸다. 아주 깔끔하게.
언제 그렇게 또 강해졌담. 이대로라면 반년 내로 예전의 동생 수준으로 경지가 올라올지도.
괜히 속이 상했다. 그 때가 되면, 정말 까마득하게 멀어져 버린다. 예전처럼 동생의 등 뒤만 바라봐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체념하게 된다. 사랑하는 동생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막는, 못난 누나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마음을 털어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최대한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누나가 되자. 그런 마음을 먹고, 홀가분해지기로 했다.
그러고나니 동생을 향한 마음에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그래도 동생에게 나는 피 섞인 누나에 지나지 않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거야.
레티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보단 데이지나, 뭐, 그런ㅡ, 참한 여자가 더 어울려ㅡ. 좀 비참했지만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낫겠거니, 했다.
그런데.
동생이 이상하다.
갑자기 공주님 안기를 했다. 동생을 좋아한다고, 인정했으니 냉큼 목에 팔을 둘러서 꼬옥 안기기는 했는데, 막상 안기고 나니 동생이 왜이러나 싶었다.
그리곤 노골적으로 허벅지에 손이 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랐다. 깜짝 놀라서 도망치듯 욕실로 왔다. 뭘까ㅡ, 심장이 두근두근 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레티시아는 혼란스러웠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동생이 얼굴이 떠올랐다. 손길도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동생이 일부러 그랬나? 싶어서, 한 번 떠보기 위해 얇은 캐미솔에 짧은 팬츠만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집요하게 눈길이 따라붙었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메이드를 시켜 가운을 건네받아 걸쳤다.
그런데 웬걸, 동생이 포기하지 않고 가운을 왜 입었냐고 따지는 게 아닌가….
그쯤부터 레티시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얘가 왜 이런담. 이상해. 괜히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아니, 다정한가? 눈빛만 보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은데? 어라? 그럼 동생이 날…. 설마!
그런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생각들 때문에. 스테이크도 제대로 먹지 못 하고 깨작거리기만 했다.
동생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뭐라구 타박했던 것 같기는 한데.
….
노골적으로 끈적하게 훑어보는 눈빛에, 솔직히 말해서 조금, 젖고 말아서.
젖은 게 쉽게 보일까봐 가운을 입었다고 어떻게 말하겠어.
레티시아는 떠올렸다. 동생이 약해져서, 그녀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들어주던 그 때에.
아카데미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밤에 자야한다는 말로 동생을 설득하고, 재워서.
가장 성욕이 끓는 밤에, 동생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가ㅡ.
아, 길고 굵은, 단단한 손. 부드러운 입술, 맡고 있으면 발정이 나 버리는 체취….
레티시아는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약해졌음에도, 수컷임을 과시하듯, 그녀를 한낱 암컷으로 만들어버리는 육체ㅡ.
몇 번이고, 잠 든 동생을 상대로 벌였던 장난질…. 동생은 알까. 우리는 서로의 처음을 교환했다는 걸….
가장 행복했던 그 때. 비록 데이지가 저택에 들어와선 조심하느라, 욕구불만 상태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 한 달만큼은 레티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
밤에 왜 오라고 한 걸까.
후련해지기로 해놓고. 레티시아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변태였으니까. 동생을 사랑하는.
레티시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밤을 기다렸다.
*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서 한 달.
내가 감히 누님에게 손 대도 괜찮을까, 고민했다.
결정하고 나서도 쉽사리 마음 먹고 움직일 순 없었다. 누님은 내 은인이었으니까.
은인에게 품은 내 마음이, 실로 진정 누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ㅡ, 살아남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방법이 그것밖에 없더라도 그것은 은인을 배신하는 게 아닌가. 그런 고민.
데이지를 만나서, 별 고민 없이 그녀를 내 여자 삼은 것은 그런 스트레스에서의 도피였을지 모른다.
이 아이를 꼬신다고 해서 내 목표가 이뤄지진 않는다. 그러니 데이지를 이용하는 게 아니다ㅡ. 안심하고, 그녀를 탐해도 괜찮다.
그런 자기 위안. 동시에 나는 스스로가 미워졌다. 혐오스러웠다. 솔직히 엄청나게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그것 또한 누님에게 품은 죄책감을 데이지에게 푸는, 별반 다를 게 없는 짓이었으니까.
나는 하루하루 메말라갔다. 누님에게 죄스럽고 데이지에게 미안했기에.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멈추지 말아야 했기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기만 했다.
크리스티나를 만났다.
정말, 별 생각 없는 만남이었다. 그녀는 게임에 등장한 네임드 캐릭터다. 내 것으로 만들면 도움이 되겠지, 따위의 생각과 쌓일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다.
결국 술에 취했다. 술에 취했는지, 스트레스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가 술 취한 척 헛소리를 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솔직해졌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속마음을 털었다. 처음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받아주었다. 그래서, 음, 흔히들 말하는 마망 타입 캐릭터가 이래서 인기가 많구나…, 생각했다.
그녀는 내 덕에 행복해졌다고 했다. 내 의도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그녀를 이용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좋다고 해주었다.
그렇다면 누님도, 데이지도.
….
이 이상 주절주절 말하는 것도 꼴사나운 짓이겠지.
줄이자.
나는 누님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분명 나는 레티시아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