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쉬어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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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이어진 정사가 끝나고, 나는 등과 어깨에 새겨진 손톱 자국이 전해주는 따끔거림에서 여운을 즐겼다.
낫게 하려면 당장 낫게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아까워져서 냅두기로 했다. 영광의 상처 같은 느낌이어서.
‘얼마나 해댄 거지.’
날밤을 새며 내게 따먹힌 누님의 몸은 곳곳이 하얗게 더럽혀진 꼴이었다.
침대는 이미 서로의 땀과 정액, 애액으로 범벅이고, 데이지를 시켜 준비 해두었던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목줄 매두고 강아지 흉내 내게 했을 때는 엄청 꼴렸다. 누님도 좋아라 했으니 다음에 또 해봐야지.
그렇게 밤새 싸질렀던 끈적한 정액이 몸 곳곳을 뒤덮어 굳은 꼴이라, 샤워로 지우는 데에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심지어 서로 몸을 씻겨주면서 꼴리는 바람에 샤워실에서 또 두 번이나 해버리기도 했고.
아무튼. 지난 밤의 흔적을 겨우 지우고 나와 샤워 가운을 몸에 두른 누님이 세상 귀찮다는 듯 침대에 꾸물꾸물 들어갔다.
“누님. 식사 안 해?”
“안 해…. 이미 잔뜩 배부른데 뭘 더 먹니….”
할 말이 없구만.
보란 듯 배를 까서는 제 하얀 복부를 토닥거리는 모습에 픽 웃었다. 얼마나 싸댔는지 아냐며 툴툴대는 게 귀엽다.
저 가느다란 몸에 어제 몇 번을 싸질렀는지.
“다음부턴 콘돔 써야 해.”
“왜?”
“…버, 벌써 아이가 생기면 아쉬우니까?”
뭐가 아쉬운 건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누님도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이불을 확 뒤집어 써서는, 얼른 나가라며 꿍얼댄다.
나도 이번에 받게 된 보상들을 좀 더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기에 순순히 방에서 나왔다.
데이지도 내가 지난 밤에 방에서 뭐 했는지 알고 있어서인지, 평소 같았으면 날 데리러 내 방까지 왔을텐데도 기척을 살펴보니 식당에 먼저 가 있는 듯 했다.
눈치 빠르기는.
나는 느긋하게 식당을 향해 걸으며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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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체페슈
나이: 121 성별: 남
키: 181 몸무게: 74
근력 ▶ 102 (80)
민첩 ▶ 121 (94)
체력 ▶ 105 (77)
내구 ▶ 84 (61)
마력 ▶ 251
긍정 특성:「진조(SS)」「공?(SS)」「가주(S)」
부정 특성: 「기억 상실(B)」「마왕의 저주(S)」
고유 특성:「부여(S)」「연결(S)」「조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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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긍정 특성 랭크 승격 보상으로 선택했던 「혈귀」특성이 한 단계 상승해 얻게 된 「진조」특성.
나는 어디까지나 내 고객이었던 누나(전생)가 전달하는 정보만 기억하지, 내가 직접 게임을 플레이 해보진 않았다.
설정집도 누나가 발췌해준 부분과, 꼭 필요하다 싶은 부분만 읽어보았고….
이「진조」라는 특성이 어떤 것인지 누나라면 알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젯밤엔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나는「진조」의상세보기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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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조(SS)」
▶ 특성「혈귀」의 상위 단계.
1. 피, 그림자에 대한「절대적인」지배력.
2.「혈귀」특성을 지닌 개체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3.「달빛 아래」일 때, 일시적으로「불사」특성 획득.
4. 고유특성「그림자의 너머」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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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
이거 이래도 돼?
일단 새로 얻게 됐다는 고유특성「그림자의 너머」를 확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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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너머(S)」
1.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모든 스탯+50
2.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입힌 피해에「치명」부여
3.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기척 차단(A)」,「은신(A)」사용 가능
4.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패시브: 죽음의 종소리(S)」사용 가능
▶「죽음의 종소리(S)」
디버프. 종소리를 들은 자의 내구를 50% 감소시킨다. 상대의 저항력에 따라 효과가 감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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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사기잖아.
이 정도면 마왕은 몰라도 사천왕 정도는 싸워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직접 게임을 안 해봐서 사천왕이 얼마나 강한 지 모르니까 답답하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많이 아는 마왕도 스탯이 어느 정도인지는 하나도 모르고 마력 속성이 나랑 같다는 것밖에 모르니 원.
미연시면 미연시답게 그냥 아카데미에서 하하호호 하고 끝내라ㅡ, 같은 소리도 속으로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미연시인데 전투 시스템이 왜 있는 거야? F○TE도 비주얼 노벨일 때 전투 시스템은 없었는데.
분명 처음 눈을 떴을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지긴 했는데, 이 정도로 충분한 지 알 수가 없어서 괜히 불안하다.
보통 게임 속으로 빙의 하면 다들 숨겨진 기연이나 히든 피스를 독식해서 혼자 다 해 먹던데,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작 패거리만 믿고 있기엔 나로 인해 달라진 것들로 인해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불안하고.
그래도 누나가 그나마 알려준 정보 덕에 아카데미 학생들의 평균 스탯이나, 네임드 주연들의 스탯 정도는 알고 있다.
이만큼 네임드들이 다른 엑스트라들과 비교했을 때 대단하다ㅡ 따위의 자랑 때문에 알게 된 정보지만, 지금은 그나마라도 알고 있어야 할테니까.
후.
일단 걱정은 접어두기로 하고, 보상 목록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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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가능 목록 (1/3)
▶「부정 특성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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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저 없이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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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 가능 특성:「기억상실(B)」「마왕의 저주(S)」
「기억상실」
▶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었다. 모종의 이유를 제거하더라도 기억이 돌아오진 않는다. 기억을 찾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마왕의 저주」
▶ 본래는「존재박탈(SSS)」이었을 저주가 약해진 모습. 이도 저도 아니게 약화된 상태라, 이름도 없이 그저「마왕의 저주」가 되어버렸다.
1. 모든 스탯 감소 (현재 회복 중)
2. 기억 상실
3.「낙인(B)」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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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정 특성을 상세보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본 바, 알게 된 사실로는 일단「마왕의 저주(S)」가 엄청나게 약화된 사실이라는 것.
원래 내가 당했을「존재박탈」에 상세보기를 사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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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박탈」
▶ 초월자가 운명의 굴레 속 존재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능 중 하나.
1. 육체 소멸
2. 기록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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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저걸 내가 맞았댄다. 추측하기론, 그나마 저주가 약화된 게 내가 두 개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마왕이 내게 부여한「존재박탈」의 표적은 스칼렛 체페슈인데, 내 안에는 스칼렛 체페슈 뿐 아니라 전생의 기억까지 있었을테니까.
운명의 굴레 속 존재에 애매하게 부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저주가 나를 표적으로 삼았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라는 게 내 추측이다.
음. 아마 평균 100 수준의 스탯도 저주의 영향이겠지. 아마 영구적인 스탯 감소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좀 더 높았지 않을까.
몸도 영혼도, 심지어는 기억을 비롯한 기록마저도 없애버리는 권능에서 살아남은 것인데 기억 상실과 스탯의 영구 손실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낙인」도 상세보기를 통해 살펴보니, 마왕을 비롯한 마족의 마기에 취약해지는 디버프라고 한다.
일단「마왕의 저주」를 해제해야겠다. 나는「부정 특성 제거」로 저주를 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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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체페슈
나이: 121 성별: 남
키: 181 몸무게: 74
근력 ▶ 102
민첩 ▶ 121
체력 ▶ 105
내구 ▶ 84
마력 ▶ 331
긍정 특성:「진조(SS)」「공?(SS)」「가주(S)」
부정 특성: 「기억 상실(B)」
고유 특성:「부여(S)」「연결(S)」「조율(S)」「그림자의 너머(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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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확실히 강하다. 특히 마력 수치가 단숨에 확 올랐다.
네임드 캐릭터들의 졸업 시 평균 스탯이 보통 200에서 250 언저리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그 캐릭터들이 마탑주, 북부대공 소드마스터,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선택 받은 용사이자 천재 지휘관인 황자ㅡ라는 걸 고려해보면 마력 331은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 수준이면 생태계를 휘젓는 공룡 한 마리나 다름 없다. 뭘 해도 수석일테니까.
우선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수석 자리를 독점한다. 황자와 북부 대공의 아들이 나와 같은 학년으로 입학할테니 내게 수석 자리를 빼앗긴 둘이 상당히 경쟁심을 불태우겠지.
다른 건 몰라도 캐릭터 설정은 빠삭하게 꿰고 있다.
네임드 남자 캐릭터들 전원이,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경쟁심을 자극하면서, 교류를 잇는다. 그들을 성장시켜야 마왕이랑 싸울 때 이용해먹지.
정도 이상으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다. 원작의 여주ㅡ, 루나 테일러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릴 테니까.
내 역할은 그놈들이 여자한테 빠져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만 이끌면 된다.
괜히 남자들끼리 엮여서 아카데미의 여학생들이 꺅꺅 하는 꼴 보고 싶지도 않고….
여성향 게임이라 그런가. 남성향 게임에선 안 나올 더러운 대사들이 나오곤 한다. 예를 들자면, “황자님이 마탑주님과 함께 계셔!”가 어느 샌가 “황자님이랑 탑주님 잘 어울리지 않아?”가 되어버린다던가.
내가 쓸데없이 어울렸다간 나도 소문의 대상이 되겠지.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과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ㅡ.
어렵구만.
*
….
아르카디아 황가에게만 허락된 장소.
천 년 전 강림했던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여신의 은총을 받아 성검을 들었던 용사, 아르카디아 황제가 일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고 알려진 빛의 정원.
성국에서 지정한 성지 중 한 곳.
하얀 베일을 쓴 여인이 빛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며칠 전, 빛의 정원을 밝히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는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급히 명령을 받고 온 성지는 그 말대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천 년 전 제국의 시조, 아르카디아 황제가 숨을 거두던 순간 그의 영혼을 감싸듯 환하게 비췄던 여신의 은총이 이처럼 따스하고 환할까.
그 정도로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하게 만드는 빛이었다.
여인이 감히 그 빛무리 속에 다가가지 못 해 머뭇거리던 찰나, 빛무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
당황한 여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빛무리는 하나의 형상으로 변했다.
빛의 정원. 성지 중앙에 꽂힌, 늠름한 검 한 자루.
전설 속에서나 보았던 성검??이었다.
여인은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마침내 검 앞에 다다라서는, 조심스럽게 검의 손잡이를 잡고ㅡ.
“ㅡ.”
가볍게. 땅에서 뽑아내었다.
성검이 뽑힘과 동시에, 성검으로 모여들었던 빛이 다시 한 번 환하게 퍼졌다.
새로운 용사의 탄생이었다.
용사의 이름은,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제국의 황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