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36화 (36/199)

〈 36화 〉 안나 (2)

* * *

안나 크로이체프는 태어날 적부터 설원의 공주였다.

그의 아비, 니콜라이 크로이체프 역시, 세상에 날 때부터 설원의 주인이었다.

“딸아. 알아두거라. 우리는 제국의 검이자, 북방의 수호자임을.”

다만 크로이체프가 언제나 설원의 주인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때 침략자였다.

“먼 옛날, 제국이 왕국이었을 시절에도 우리는 북방의 주인이었으나, 설원의 주인은 아니었음을 기억해두거라.”

왕국이 제국이 되고, 점점 그 세력을 불리며, 크로이체프는 북쪽으로 나아갔다.

조금 추울 뿐이었던 그들의 땅은, 어느샌가 여름에도 땅이 얼어붙는 극한의 동토까지 닿았다.

“우리에겐 제국시조의 피가 섞여있다.”

서쪽 마탑의 프리드리히, 동부와 남부의 체페슈. 그리고 북부의 크로이체프.

각자 어떤 형태로건 제국 내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삼대 가문.

니콜라이는 어린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와 달리 체페슈와 프리드리히는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들여온 자들이다.”

아버지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안나는 끄덕였다.

그 두 가문이 있었기에 제국이 비로소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크로이체프는 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아르카디아의 크로이체프였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다.”

니콜라이 크로이체프는 한탄했다.

150세에 달하는 그는, 불과 백년 전만 해도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던 혼란들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침략자이던 때도 이미 수백년이 지났다. 우리는 이곳 설원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수호자가 되었고, 설원 너머에서 오는 마물로부터 이곳을 지켜야 했다.”

헌데.

어린 딸을 쓰다듬으며, 나이 든 검성이 말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럴 일도 남지 않았구나. 대부분의 마족과 마물의 씨를 말렸다.”

참으로 평화로운 시대였다.

“허나, 딸아. 명심해야 한다. 평화의 시대라고한들, 우리의 검이 녹슬어서는 안 된다.”

언제고 가장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어야 했다.

천년제국의 역사동안, 그들은 언제나 검성의 이름을 걸고서 전장에 나섰다.

적어도 검을 휘두르는 자에게 한해서만큼은 크로이체프의 천 년이, 제국의 천 년과도 같았다.

“네게 패배하지 말라곤 하지 않으마.”

니콜라이는 짐짓 엄한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아이였다.

비록 먼 옛날 들였던 부인을 잊지 못해, 150세가 넘어서야 후계를 위해 들인 새 부인에게서 얻은, 사랑 없는 관계에서 얻은 늦둥이었지만.

냉혹한 북부의 주인은 그런 딸을 아꼈다.

“평화로운 시대다.”

사랑하는 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천재가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크로이체프의 적법한 후계자에게 전해 내려오는, 검성의 재능이 설령 딸에게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ㅡ, 니콜라이는 생각했다.

정 그렇다면 데릴 사위를 들여 손주를 볼 때까지 니콜라이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면 되는 일 아닌가.

허나.

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니콜라이 본인보다도 찬란한.

그렇기에, 딸은 검을 쥐어야 했다.

그것이 크로이체프의, 대대로 내려오는 검성의 숙명이었다.

“그러나 검을 쥐었을 때만큼은 지면 안 된다.”

그것은 검성으로써의 자존심이었다.

“져도 괜찮다. 하지만 적어도 검을 겨룰 때만큼은, 그 기교로는 밀려선 안 된다.”

크로이체프의 천 년은 제국 검술의 천 년과도 같으니.

“프리드리히의 샌님보다 똑똑하지 못해도 괜찮다. 체페슈의 까마귀한테 진다고 해서 꾸중하지 않으마.”

“허나 네 검이 그들의 검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국 그 자체이지만, 체페슈와 프리드리히는 제국에 숙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검이 꺾일 때, 제국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설원은 냉혹하다.

그리고 그런 설원의 주인이 되려면, 어느 무엇보다도 강인해야 한다.

그것은 철의 제련과 같다. 뜨거운 용광로 대신 극한의 한기가 설원의 주인을 제련했다.

“잘 보거라.”

제국은 그를 검성이라 불렀다.

검성?? 니콜라이 크로이체프는 검을 들었다.

설원의 너머ㅡ,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설원의 모든 마물이 모인 듯 득시글 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사납게 웃으며,

“네가 다음 대의 검성이다.”

ㅡ.

달빛을 반사하며, 번쩍이는 검. 흩날리는 육편. 검은 마기. 마물의 비명소리.

어린 소녀는 두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담았다.

핏물도, 달빛도, 검디 검은 마기도, 모두 무시하고서 오직.

검.

그것은 피에서 피로 흐르는 숙명이었다.

“네, 아버지.”

소녀.

안나 크로이체프는 그렇게 설원의 공주가 되었다.

*

“공녀님, 또 설원 너머에 다녀오셨어요?”

“응. 왜?”

“전하께서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거기 너머로 마족은 없다구.”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전하께서 화내셔도 몰라요, 전.”

설원의 공주는 몰라 보게 성장했다.

키는 늘씬해졌고, 팔도 다리도 길쭉해졌다. 그 실력도 일취월장해, 당대의 검성인 니콜라이를 제외하고선 더 이상 검술로 겨룰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카데미에 갈 준비는 잘 하고 계세요? 중앙 말 하나도 모르시잖아요.”

“뭐? 아카데미?”

“…모르셨어요?”

“…아버지!”

처음 들어보는 소식에 그녀가 제 아비를 찾자, 니콜라이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언제까지고 북부에만 박혀 있을 순 없지 않느냐. 나중에 내 자리를 물려받고 나서는 설원을 벗어날 수도 없을테니 이번 기회에 다녀오거라.”

“그걸 왜 저한테 비밀로 하셨어요!”

“마음 같아선 입학 전날까지 비밀로 하려했다만. 사샤가 말해줬더냐? 그 녀석도 참.”

“아버지!”

“시끄럽다. 진즉 말해줬다면 네가 고분고분 따랐겠느냐?”

그렇게 말하니 안나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매일 같이 설원 너머를 탐색하며 혹시 모를 마족의 마을이나, 숨겨진, 뭐, 드래곤의 레어라든가를 찾아나서긴 했으니.

그것도 다 체페슈의 가주 때문이라고, 니콜라이는 미간을 짚었다.

언제부턴가 중앙의 신문을 사서 보더니, 아비인 자신보다도 되려 체페슈의 어린 가주를 더 존경하는 기색이지 않은가.

그놈이 대륙 곳곳을 다니며 뭔가를 했다는 글을 볼 때마다 설원으로 넘어가는 빈도가 잦아지곤 했다.

“저, 저는 중앙말 하나도 모르잖아요!”

“흠. 그래도 읽고 쓰는 건 잘 하잖느냐.”

“그래도!”

“그럴 줄 알고 선생 노릇할 사람을 불러놨다. 일주일밖에 안 남긴 했다만, 이미 듣기는 어느 정도 될 테지? 말하기야 최소한만 하고 사샤에게 통역을 시키면 될 테니 문제 없겠구나.”

“아니이…!”

설원의 사람은 이렇듯 무대포 기질이 있어서, 한 번 굳힌 결정을 되돌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안나는 잘 알았다.

싫다고 길길이 날뛰어봤으나 결국 체력만 쭉 빼고서 터덜터덜 제 방으로 돌아온 안나는 화풀이하듯 사샤를 닦달했다.

“사샤! 알았으면 나한테 말을 해줬어야지!”

“으앙. 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아무튼.

말하기는 서툴러도 사샤가 있으니 괜찮다고 쳐도, 아예 듣기가 안 되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문제다.

정 어려운 단어나 말이라면 사샤가 통역해줄테지만, 기초적인 듣기만이라도.

*

“…공녀님?”

“뭐냐.”

“그 말투는 도대체…?”

“선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아냐?”

질색하는 사샤의 태도에, 어설픈 중앙말 대신 능숙하게 북부말로 대답한 안나였다.

“그….”

차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사샤가 대공에게 찾아가 물으니,

“뭘. 상관 없다. 평등이네 뭐네 말해봤자 명목상인 것 아니냐? 겨우 반말 좀 한다고 뭐라 할 사람 없으니 됐다.”

오히려 입 좀 다물고 권위 있게 굴면 카리스마 있을 것이니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니콜라이였으나ㅡ.

“그, 이번에 체페슈 공작이 입학하신다고….”

“그놈이 왜?”

북부와 중앙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한창 떠들석하게 체페슈 남매의 입학이 수도를 비롯한 내륙 지역을 뜨겁게 달구는 와중에, 중앙과 이렇다 할 소식통도 딱히 없는 북방에는 뒷골목 소문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사샤의 어머니가 중앙의 사교계에 연줄이 남아있던 덕에 뒤늦게나마, 어제서야 사샤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1황녀 아이리스 전하께서도….”

“황녀도 원래 3년 뒤 입학 예정이었잖느냐?”

당연히 황녀가 성검을 뽑아 용사가 됐으니 얼른 미뤘던 학업부터 해치우고 보자는 성국의 청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북부가 알 방도도 없었다.

“…흠. 어쩔 수 없지. 너만 믿으마.”

“전하…?!”

“뭘. 그 둘이면 괜찮을 게다. 체페슈는 좀 싹퉁바가지가 없긴 하다만, 아량은 넓은 편이니.”

사샤는 울며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입학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녀는 허허 웃는 대공이 조금 미워질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체페슈라.”

“무슨 문제라도…?”

“아니. 딸이 알면 좋아죽겠군.”

아….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체페슈랑 프리드리히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그리도 말했거늘….”

대공의 착잡함 어린 말에 담긴 건, 다른 남자에게 딸아이를 빼앗긴 아버지의 설움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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