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 * *
“…누구셔요?”
막무가내로 잡아 끄는 내 페이스에 말려, 어쩔 줄 몰라하며 따라오던 크리스티나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나는 대답 대신, 길목을 막아 선 두 여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인가.
“…흠흠. 어디 가는 길입니까?”
오.
옆에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사샤의 얼굴이 꼭 처음으로 걸음마를 성공한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그것 같았는데, 방금.
안나 역시 자신이 제대로 발음에 성공했다는 데에 고무되었는지 조금 들떠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크리스티나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친구와 잠깐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
“친구…?”
내 대답에 크리스티나와 안나의 반응이 겹쳤다.
크리스티나는 조금 섭섭해 하는 기색이었고, 안나는 의아해 하는 반응이었다는 것이 조금 달랐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예. 무척 각별한 친구랍니다.”
“…!”
화들짝.
크리스티나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개방적인 듯 하면서도, 그 순결성에 대해서만큼은 보수적인 귀족가에서, 남녀 사이에서 ‘무척 각별한’이라는 말만큼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말은 또 드물었다.
친구라는 표현에 섭섭해 하긴 했으나, 이번엔 ‘무척 각별하다’ 따위의 수식어를 달아주니 그건 그것대로 또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 같았다.
이미 다른 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추문을 만들 셈으로 대놓고 다가갔으니 이 정도는 예상한 범주일텐데도.
마찬가지로 조만간 소문이 퍼질대로 퍼질텐데, 안나에게 굳이 평범한 친구라고 해봤자 거짓말을 하는 것밖에 안 된다.
안나는 내 말뜻에 담겨 있는 은근한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떨떠름 해 보인다고 해야할까.
“그, 그렇군.”
조금 어설프게나마 사용하던 존댓말 대신, 풀 죽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돌의 열애설을 들은 팬의 심정 같은 것일까.
아니면….
“죄송합니다, 전하. 저흰 그런 이만….”
“차를 대접하고 싶다.”
대충 분위기를 읽은 사샤가 눈치 빠르게 끼어들어 정리하려 할 때, 안나가 입을 열었다.
사샤는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안나는 사샤가 당황하든 말든 아랑곳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오히려 사샤에게, 어서 제대로 통역하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듯 흘겨보기까지 했다.
“그, 공녀께서 전하와 전하의 친우분께 차를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이건 무슨 상황이에요?”
무척 각별한ㅡ, 이라는 단어에 놀랐던 크리스티나도 그제서 진정이 된 모양인지, 이 기묘한 주종을 신기하게 여기는 듯 했다.
어설픈 존댓말이야 그렇다 치고, 이젠 존댓말만 어색한 게 아니라 내뱉는 말의 구성 자체가 엉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각을 기워맞춰 제대로 된 문장을 구성하는 수행원의 모습까지.
크리스티나는 조금 곤혹스러워 보였다.
차라리 별 거 없는 변두리 시골의 귀족이라면 모를까, 그 상대가 일곱 공작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드높다는 삼대 가문의 하나인 북부의 공녀 아닌가ㅡ.
“…!”
나는 대답 대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이듯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지만, 그런 나의 가벼운 스킨십이 북부의 두 여자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그제야 내가 말했던 ‘무척 각별한’ 사이라는 말을 실감한 듯 했다.
실제론 여자가 둘이나 더 있지만, 거기까지 말하긴 좀 그렇고.
아무튼 두 사람이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선약이 있어 어렵겠네요. 차는 다음에 마시기로 할게요.”
“앗.”
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나왔는데, 그녀를 혼자 기숙사로 돌려보내고 이들과 차 한 잔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럼 크리스티나마저 데려가야 한다는 건데….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 둘과는 앞으로 친분을 유지해야겠지만, 이번 일로 틀어질만한 관계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자신을 위해 공녀의 제안을 거절한 나를 새삼스럽게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리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읏.”
어쩐지 작게 신음하는 사샤와, 눈가가 딱딱하게 굳은 안나 크로이체프.
조금 너무 나갔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차피 나중에 뭘 들키는 것보다야 지금 손 잡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게 나았다.
크리스티나는 아예 얼굴이 터질 지경으로 붉어진 채였으나, 그렇다고 내 손을 놓지도 않았다.
“그럼 이만.”
나는 황망해 하는 북부의 두 여인을 두고, 크리스티나를 데리고서 자리를 비켰다.
*
“흐읏, 응, 앙….”
할딱거리는 신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땀에 젖은 몸뚱이를 겹친 채, 내 몸짓에 크리스티나의 몸이 자지러졌다.
“스칼렛, 니임. 스칼렛 님. 으흣, 응….”
나는 불현듯 안나를 떠올렸다.
안나가 내게 보이는 태도를 보면 마음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이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 깊은 마음을 품었겠는가.
좋게 쳐도 아이돌을 직접 만난 사춘기 소녀의 열광하는 마음쯤이 아닐까ㅡ, 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내가 여지를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일단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분에 넘치는 미녀가 나한테 셋이나 있는데, 여기서 더 늘려봤자 뭐 좋다고. 다다익선이란 말도 감당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다.
차기 검성이자 대공인 안나 크로이체프가 만일 내 여자가 된다면, 내가 다른 여자를 거느리는 것을 허락해줄까?
만약 그걸 용납해줄 정도로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일단 내가 그녀에게 그럴 마음이 딱히 없기도 하고.
예쁘긴 하지만.
“읏, 읏. 하앙….”
글쎄.
미모만 따지자면 크리스티나도, 데이지도 안나에게 꿀리지 않는다.
누님은 논외나 다름 없고.
나는 괜히 머릿속이 번잡해 지는 것 같아, 더욱 격렬히 크리스티나의 몸을 탐했다.
끈적끈적한 땀이 서로의 몸이 진득하게 달라붙게 하고, 질척하고도 음란한 소리가 방 안을 뜨겁게 달궜다.
음란번잡한 열기만이 우리 서로의 사이에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히윽!”
그 날.
내 등에는 누님과 데이지가 남긴 상처 옆으로 크리스티나의 손톱 자국이 추가되었다.
*
밤새 혹사 당해, 반쯤 기절한 채 아침까지 새액 새액 잠든 크리스티나를 깨웠다.
“우으응….”
가늘게 뜨인 눈동자가 몽롱하게 나를 올려다보다ㅡ.
“힉.”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실눈인데도 눈동자가 파르르 동공지진 하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끄럼에 몸서리치다, 내 등에 아로새겨진 상처들에 화들짝 놀랐다.
“저, 전하. 등이….”
“아프더라.”
“죄송합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등의 상처를 낸 건 크리스티나 그녀 뿐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해줘야 할까ㅡ, 하다가.
“괜찮아. 여기서 네가 낸 건 두 개밖에 안 되니까.”
“…네?”
너무 솔직한 대답이었나. 순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듯 굳었던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다.
그리곤,
“이, 이, 나쁜, ….”
무어라 내뱉으려던 입이 잠시 오물거리더니.
“…흑.”
분한 듯 입술을 꾹 깨물곤 눈물을 삼키고,
“…몇 명이나 더 있어요?”
“두 명.”
“…흥. 그 둘이 저보다 좋으셔요?”
“으음.”
이건 좀 아픈데.
내 마음 속 1위는 누님이다. 당연하게도.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지 말해준다면야 납득할테지만, 납득 이전에 친누나와의 관계에 경악이 앞설 것이다.
누군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납득하지 않을 거고.
그렇다고 다들 똑같이 좋아해, 라고 말하는 건 양심에 찔렸다. 나한테 양심이란 게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건.
“네가 내 여자라는 것과, 내게 널 버릴 생각이 없다는 건 맹세할 수 있어.”
“….”
“체페슈의 이름에 걸고서.”
“나쁜 사람.”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애초에 아버지와 영지를 구하는 대가로 팔려온 신세인데도, 사랑하게 돼 버린 걸 어쩌겠어요.”
내 등을 끌어안은 크리스티나의 부드러운 살결, 말랑하고, 향기로운 여인의 체취가 느껴졌다.
쪽.
내 뺨에 닿은, 부드러운 입술.
“사랑하게 돼 버려서, 그럴 처지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부리게 됐어요.”
투정을 부리듯이,
“차라리 주제를 알라며 내치셨다면 포기했을텐데. 다정하게 안아주시고, 상냥하게 어루만져주는데, 어떤 여자가 포기하겠어요….”
아련하고 애절한 목소리. 내 등에 안겨서, 가녀린 몸으로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듯 팔로 감싸 안고는,
“팔려온 여자에게 괜한 희망을 준 당신이 나빠요.”
그러니까.
“이제는 늦었어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웃었다.
얼굴 보고 말할 용기는 없어 이렇게 뒤에서 끌어안고 말하는 주제에,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대담한 여자가 아닌가.
어이가 없는 듯, 그러면서도 즐거운 듯, 기쁜 듯…, 나는 웃으면서, 이처럼 당돌한 여자에게 답했다.
“포기하라고 말한 적도 없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