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대수림 (2)
* * *
일렁이는 그림자.
물감처럼 번져 가, 바닥을 검게 물들인 어둠.
그 속에서, 까마귀들이 올라왔다.
검은 제복, 까마귀를 형상화 한 듯 한 검은 가면에, 붉은 안광.
은은하게 느껴지는 혈향. 그것이 그들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수백 년의 세월간 쌓아올린 시체의 향이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마치 시체를 찾아 움직이는 까마귀처럼, 다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부리와 발톱으로 산 사람을 시체로 만들 수 있는 맹금이었다.
그림자 속에서 올라온 까마귀들의 맨 앞에 선 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까마귀 무리, ‘발톱’ 부대 대장이 적법한 체페슈의 가주를 뵈옵니다.”
조용한 충성의 맹세.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누님이 뒤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으나, 눈 앞의 남자는 묵묵히 부복할 뿐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는 과연 지금의 나 역시, 적법한 체페슈의 가주라고 여기고 있는가?”
잠시간의 침묵.
남자는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까마귀들의 군주가 누구인지는, 칠십 년 전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천 년이 아니라 칠십 년.
스칼렛 체페슈가 가주의 자리를 탈환한 그 때.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희의 주인으로써 명령을 내리마.”
“하명하시옵소서.”
“엘프들의 수림에 대해 알아와라.”
“받들겠나이다.”
까마귀는 다시 그림자가 되었다.
그렇게 자취를 감췄다.
*
정보의 수집은 신속했다.
바로 다음 날. 까마귀가 돌아왔다.
“현재 엘프들이 대수림이라 일컫는 수림은 다섯 곳이 존재합니다.”
내게 찾아온 이는, ‘발톱’ 부대 대장이 아니라 ‘눈’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체페슈의 까마귀 무리는,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눈’과 ‘날개’, 그리고 무력을 상징하는 ‘발톱’과 ‘부리’로 구성 돼 있었다.
발톱보다는 눈 쪽이 내 명령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기에, 명령을 전달한 듯 했다.
자기가 명령을 완수해 공적을 쌓기보단, 내 명령을 철저히 수행하는 데에 집중했단 뜻.
나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계속 말하도록.”
“그 중 가장 넓고 위세가 드높은 대수림은 제국 남부의, 세계수가 위치한 크레펠트 대수림입니다.”
“체페슈와의 관계는 어떻지?”
“양호합니다. 제국 내에서 프리드리히가 체페슈의 동맹이라면, 제국 밖에서는 크레펠트 대수림이 체페슈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인가.
누님과 데이지에게 틈틈이 시사나 대륙 정세에 대해 배우곤 있지만, 시간이 너무 모자라다보니 이렇게 하나씩 빠뜨리는 게 나오곤 했다.
“그렇군. 그럼 그 놈이 크레펠트 대수림의 출신은 아닐테고.”
어제 누님을 건드리려 했던 놈의 얘기다.
이름도 제대로 듣지 않았기에 그놈이 누군지 말해주지도 않았거늘, 까마귀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놈의 출신은 프레이르 대수림입니다.”
“어떤 곳이지?”
“크레펠트 대수림 다음 가는 넓은 영역을 자랑하나, 최근 들어서야 내전을 끝내고 새로운 왕가가 들어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이라면.”
“30년쯤 되었습니다.”
30년짜리 왕조라.
“그럼 왕의 목을 쳐버리고 다른 이가 왕이 되어도 큰 혼란은 없겠어.”
“예. 지금도 반란의 기미가 없지는 않다고 합니다.”
“혼란스러울 시기에 왕자를 밖으로 내보낸 것 역시.”
“아마도, 혹시나 있을 반란에서 대피시키고,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리라 짐작됩니다.”
웃음이 나왔다. 냉소인지, 폭소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프레이르 대수림의 왕이라는 놈은, 머리는 잘 굴려도 사람 보는 눈은 없는 모양이로군.”
까마귀는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나는 까마귀에게 말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은밀히, 놈들의 왕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무어라고 적으면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은가ㅡ.
“왕자의 시신 따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마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테니.
*
답장은 이틀 뒤 돌아왔다.
「부디 못난 자식의 목 하나만으로 노여움을 풀어주시기를.」
이라고.
그것 뿐이었다면 “재미 없는 것들.”이라며 혀를 차고 말았을테지만….
“그래. 하나가 더 있다고.”
“예.”
‘날개’의 대장이, 내게 하나의 서신을 더 내밀었다.
“‘왕자의 목을 바치고, 여왕의 몸을 바칠테니 자신들이 왕이 될 수 있게끔 도와달라’라.”
나는 까마귀를 내려다보았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까마귀가 입을 열었다.
“목을 베신다면 받아들이겠나이다.”
“들켰나?”
“들키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 자식의 목숨이 위험해지니 여왕이 정보를 흘렸나보군.”
“처음엔 대답을 미루더니, 저희가 다른 이들과 접촉했다는 소식을 듣곤 곧장 답신을 썼습니다.”
아마 믿을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고 정보를 공유했나본데, 결국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여왕이라.”
영락 없이 남자 왕일 거라고 생각했다만.
“여왕에게 전해라.”
“하명하소서.”
“네년의 숲 따위와 거래 좀 금지한다고 제국이 망할 일은 없노라.”
제국 내에서 프레이르 대수림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하도록.
까마귀는 고개를 조아렸다.
“받들겠나이다.”
*
주말까지 기다리며, 나와 안면을 나눈 사이인 사람들이 자주 나를 찾아왔다.
아마 프레이르 대수림을 향한 나의 보복을 전해 듣고서겠지.
“잘못을 깨우친다면, 전하께서 자비롭게 용서해주실텐데. 어찌 저들은 반성을 모를까요….”
왠지 나를 정의로운 용사쯤으로 생각하는, 진짜 용사인 아이리스 황녀부터.
“놈의 모욕은 전해들었다요.”
“전해들었습니다.”
“크음. 들었습니다.”
프레이르 대수림이랑 북부랑은 아예 연이 없다시피 해서인지, 내가 보복을 하든말든 상관 없다는 듯 아예 얘기조차 꺼내지 않고 그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 왕자의 멱을 따버리라며 응원해주러 온 안나와 사샤.
“괜찮으신 거 맞죠?”
그리고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주는 크리스티나까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뭐가?”
“화 많이 나셨잖아요.”
“그런데?”
“화내는 거 몸에 안 좋아요.”
귀엽긴. 나는 짓궂은 마음이 들어, 짐짓 엄한 얼굴로 답했다.
“그럼 그 모욕을 그냥 듣고 넘어갔어야 한단 소리야?”
“읏. 그,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걱정 돼서….”
“알아.”
“…! 나쁜 사람!”
나는 울상으로 내 가슴팍을 투닥거리는 크리스티나를 잡아 쓰러뜨렸다.
“꺅!”
“화 풀게 위로 좀 해줘.”
“무, 무슨 소리예요?”
나는 그녀의 풍만함으로 위로받았다.
*
그 때.
프레이르 대수림.
“그대들이 어찌!”
가장 믿었던 신하의 배신에, 제국과의 무역이 막힌 것으로 거의 모든 권위를 잃어버린 스카디·아셰라드 여왕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소리쳤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분노로 붉어진 얼굴.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답게, 미려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그녀가 바로 프레이르 대수림의 여왕이다.
“어쩌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체페슈인 것을….”
외눈 안경을 낀 중년 엘프가 엣헴 헛기침을 했다.
“그러게 어찌 그 천방지축 왕자를 내보낼 생각을 하셨습니까? 왕자 덕분에 대수림의 경제가 파탄이 나게 생겼습니다.”
숲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건 식량과 옷 뿐이다.
이미 오랜 세월간 제국과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맛 본 대수림의 엘프들이, 열매를 따먹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옷을 짜 입고, 오락이라곤 활쏘기밖에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할 리도 없었다.
“이, 익…!”
그것을 알고 있는 여왕 역시, 왕자가 밖에서 사고를 쳐서 그렇다는 말에 반박은 하지 못 하고 울분만 삭힐 뿐이다.
다만, 여왕은 그 이상으로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멍청한 아들에게도, 기회가 보이자마자 배신한 자신의 신하들에게도.
그녀는 드넓은 프레이르 대수림을 통일했다.
지금까지는 대수림 내부의 내전으로 대륙 내부에서 폐쇄 돼 있던 터라 그 발전상이 다른 엘프들의 숲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을지 모르나, 프레이르 대수림에는 넓은 땅과 많은 인구가 있었다.
제국과 교역을 시작한지 30년만에, 크레펠트 대수림을 제외한 나머지 대수림과 엇비등할 수준으로 그 위상이 드높아지지 않았던가.
여왕은 스스로의 삶에 자긍심이 있었다.
여왕의 삶은 대수림을 통일했다는 업적과, 남편과 사별 후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 그리고 자신을 언제나 지지해주던 부하들, 이 셋으로 구성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거늘.
그녀는 단 사흘만에 그 중 둘을 잃게 생겼다.
아니. 최악의 상황에선 셋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왕국도, 아들도, 신하들도.
그렇다면 적어도, 그녀의 삶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왕국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까마귀! 여기 까마귀 있느냐!”
이대로는 당할 수 없다는 듯, 여왕이 발악이라도 하듯 소릴 질렀다.
내심 그렇게 소리 친다고, 이 자리에 없는 까마귀가 대답이라도 하겠냐는 듯 내심 생각한 외눈 안경 엘프가 코웃음을 칠 때ㅡ.
“전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스륵.
스칼렛이 처음 마주 했었던 까마귀, ‘발톱’의 우두머리가 궁전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
궁전 내부에는 외부의 출입을 막는 마법이 펼쳐져 있을텐데, 어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였으나, 여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후. 이 정도도 못 하였다면 내 침실에 서신을 놔두지도 못했을테지. 그대의 주인에게 전하거라.”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바라는 조건은 모두 들어주마. 그러니 적어도 이 왕국만큼은, 지켜달라고 전해다오.”
까마귀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그림자가 되어 모습을 감췄다.
*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흠….”
여왕과 귀족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여왕은 아마 왕가의 유지라는 조건만 지켜준다면 분명 자신의 몸이라도 바칠 각오라고 했다.
일단 어느 쪽의 편을 들더라도 여왕이 내 손에 들어오는 건 똑같다. 다른 건, 여왕의 편을 들어주면 여왕이 그나마 내게 호의를 보일 수 있다는 점 정도.
일단 억지로 여자를 취하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의 여자를 맛 볼 수 있는데 거절할 마음도 없었다.
게다가 여왕을 내 소유물로 만들고 나면, 프레이르 대수림을 내 영향력 아래에 둘 수도 있고.
그럼 역시 여왕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고민하던 중이었다.
“한 가지 더,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까마귀가 품 속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왕자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침실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무엇이지?”
“‘악마’라는 종과의 계약에 대해 적혀있었습니다. 악마라는 종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아마, 마족 중 한 부류가 아닐지.”
….
뭐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