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2)
* * *
부드럽고, 촉촉한 여인의 입술.
아이리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를 밀어내려던 손을 마주 잡고, 손깍지를 껴 붙잡았다.
“흡…!”
경악한 기색이었다. 크게 뜬 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동공.
나는 입술을 슬쩍 부볐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녀의 입술만을 맛 보았다.
30초 가량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입맞춤을 끝으로 슬쩍 떨어지자, 아이리스가 눈을 부라렸다.
“이, 이, 이게 무슨…!”
쪽.
“흡.”
아이리스가 재빠르게 항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입술도장을 꾹 찍었다.
“뭐하시는….”
쪽.
“그, 그만….”
쪽.
“아, 알겠어요─.”
쪽.
“화 안 낼게요…!”
나는 그제서야 뽀뽀 폭탄을 잠시 멈췄다.
“이…!”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는 아이리스를 지그시 바라보니,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제 입을 손으로 휙 가렸다.
“화 안 내신다고 하셨죠?”
“…어, 어, 억지잖아요. 솔직히.”
“한 번 하신 말씀을 물리시려구요?”
“…뻔뻔해!”
이겼다.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팍을 콩콩 두들기는 아이리스였다.
아주 크지는 않아도, 보기 좋은 형태를 하고 있는 젖가슴이 그녀의 손에 마구 출렁거리는 걸 보니….
“어딜 보세요!”
“이런.”
아이리스의 눈동자에서 엿보이던 나를 향한 동경심이 사라지는 듯 했다.
뭐.
“기분은 좀 풀리셨나요, 전하.”
“…….”
그 말에 내가 자신의 속마음을 읽었다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내 눈치를 살피다가도.
“…설마 그런 이유로 제 첫키스를 훔쳐가셨다구요?”
“설마요.”
아주 아니라곤 못 하겠지만. 가만 놔뒀다가 그녀의 속에서부터 열등감으로 곪아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이렇게 타인의 속내를 읽는 것에 능숙했었나?
그런 의문이 순간 들다가도, 우선 아이리스를 달래주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어요. 첫키스였단 말이에요, 저.”
“전하께서는.”
어쩐지 아이리스의 말투가 좀 더, 뭐라고 해야할지, 미묘하게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첫키스를 훔쳐간 도둑을 대하는 말투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이리스가 내 말을 기다리게끔.
적절히 그녀의 애를 태웠을 때.
“한 순간의 실수이기를 바라십니까?”
“…네?”
“아니면, 제가 정식으로 책임을 지길 바라십니까?”
“그야….”
아이리스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나 사이에 그런 미묘한 기류는 여지껏 없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내게, 동경과 호의를 보내던 그녀와, 그것을 모른 척 하던 나. 그 뿐이었다.
차라리 나를 어느 정도 이성으로 의식하는 모양이던 안나 쪽이면 모를까.
‘시련만 아니었으면 굳이 손 대지 않았을텐데.’
나 역시, 아이리스를 어떻게 공략할 마음이었다면, 이렇게 급하게 들이박는 모양새는 아니었을 것이다.
굳이 그녀에게 손 댈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와 나 사이의 관계는 지금껏 순수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지금의 내겐 그녀를 어떻게든 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과도 같았다.
‘운명의 천칭….’
지난 며칠, 아이리스와 숲을 정화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그녀가 전면에 나서며 나를 후방에서 쉬게 할 때.
나는 내 상태창에 새롭게 나타난 「천칭의 시련」에 대해 찾아 다녔다.
천칭의 시련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천칭」이란 개념 자체는 대수림의 나이 지긋한 원로들에게 익숙한 개념인 듯 했다.
먼 옛날부터 영웅과 악당을 가리지 않고, 대륙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이들에게만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 법칙.
「천칭」 하나당, 그 반대편에 자리한 또 다른 「천칭」의 대상자가 존재한다.
그 대상은, 「천칭」의 이름에 따라, 「천칭」의 주인과 똑같은 무게를 지닌다.
즉. 그것은 균형을 맞추는 추와 같다.
대륙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것과 똑같은 무게로 그것을 억제해주는 이가 존재한다는 법칙.
‘나는 천칭이 세 개였어.’
천칭이 많다는 것은, 내가 지닌 천칭의 추 역시 세 개라는 것.
그 중 「피의 천칭」은 누님일 것이다.
정확한 증거는 없으나, 아마 확실히. 조만간 본가로 돌아가 천칭의 계약인가 뭔가를 습득하고 누님과 맺을 생각이었다.
「혼의 천칭」은….
솔직히 말해, 지금까진 추측에 불과했으나 아마도… 전생의 누나가 아닐까 싶다.
루나 테일러에게 빙의 해 있을테지.
마찬가지로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다.
“전하.”
“네에….”
대답을 고르지 못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리스가, 내 부름에 조심스럽게 답 했다.
마지막 천칭.
「운명의 천칭」.
마왕의 숙적으로 여신이 선택한 그녀와, 마왕이 직접 선택한 숙적인 나.
이만큼 딱 맞물리는 상대가 어딨을까.
누님은 내가 천칭의 계약이든 아님 노예 계약이든 해달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해줄 터다.
루나 테일러에게 빙의 해 있을 누나도… 아마 해주겠지.
하지만 아이리스는?
천칭의 계약이 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다. 대수림의 원로들조차, 어렴풋 하게나마 기억하는 흐릿한 정보 뿐 그 이상 말하진 못했다.
다만. 그 흐릿한 정보의 내용만 들었음에도.
흠.
“왜, 왜 부르셔놓고 말이 없는 거죠?”
나는 아이리스의 손을 잡았다.
“꺅.”
“체페슈와 황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아, 아니. 그런 건….”
“하지만 전하.”
여기까지 말하고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꼴깍.
아이리스가 침을 삼켰다. 홍조 띤 얼굴이 귀엽고, 예뻤다.
괜히 입맛이 쓴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힉.”
죄다.
존나게 죄다.
마음도 없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은 죽일 죄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내가 죽으면 벌어질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누님이 폭주하면서 체페슈는 빠르나 늦으나 결국엔 몰락할테고, 기껏 정리한 이곳 대수림이 다시 혼란에 빠질 터였다.
아니.
역시, 그냥 누님이, 데이지와 크리스티나가 슬퍼하는 게 싫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내 누나까지도.
나는 대륙의 평화 따위보다, 내가 마음에 품은 여자들이 더 중요했다.
…….
이게 정말 맞나?
“체페슈공…?”
아이리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순수한 목소리.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나는.
나는….
“아이리스.”
“햑.”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려 화들짝 놀란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 가, 갑자기 이름을….”
“죄송합니다.”
“…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여 마음을 얻어내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누님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고뇌한지 얼마나 됐다고. 크리스티나 덕분에 겨우 마음을 다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을까.
누님을 위해, 크리스티나를 위해. 데이지를 위해서.
아마 그녀들은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나를 납득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라리 그녀에게 모두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자.
나는 떳떳하고 싶었다.
*
아이리스에게 사정 설명이 끝났다.
모든 사정을 알게 된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솔직히.
쉬이 용서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용서 받는 것과는 별개로…. 저주의 해주에 대해서는 그녀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체페슈공.”
“네, 전하.”
“…솔직히. 제가 화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내가 덤덤히 수긍하자, 아이리스는 한숨을 푹 쉬곤.
“사정은 이해했습니다. …마왕의 저주 따위에 잃어버리기엔, 체페슈공은 너무 아까운 인재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아이리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목이 마른 듯 했다. 방 안에 비치 돼 있던 물병을 가져가 꼴깍 꼴깍 마시고는.
“다른… 여인… 분들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뒤늦기 전에라도 거짓말을 한 사실을 밝혔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해주하기 위해선, 천칭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했지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식이 그러니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던 아이리스가, 샐쭉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노려봤다.
“만약에 제가 그 상대가 아니면 어쩌려구요?”
“전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아니면요!”
“…아마. 죽지 않겠습니까?”
내가 태연하게 나의 죽음을 입에 담으니 아이리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투덜거리듯,
“누가 자기가 죽을 거라고 그렇게 태연히 말하나요….”
물론 나야 황녀가 아니라면 내 반대편「운명의 천칭」의 추 되는 사람을 찾을테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황녀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그나마 내가 마왕의 숙적이니, 나를 숙적으로 생각하는 마왕이 생각나긴 하는데.
어차피 마왕이 나와 계약 따위를 맺어줄 리 없으니 그 경우에도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을 주절주절 말하기도 좀 그랬으므로, 나는 그저 아이리스의 용단을 기다렸다.
“…정말. 정말. 뻔뻔한 남자.”
“죄송합니다.”
“…됐어요.”
후.
아이리스는 그리 한숨을 내쉬고는.
“책임이나 지도록 하세요.”
“책임이라면.”
“첫키스. 훔쳐가셨잖아요. 책임지신다고 하셨잖나요?”
아.
“남은 날짜가 며칠이랬죠?”
“90일이었습니다만.”
“여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해요.”
“…그렇다는 건?”
“자꾸 답답하게 눈치 없는 척 하실 건가요?”
흠.
그러니까.
아직 서로를 잘 모르니. 연인으로써 잘 맞을 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알아보자는 건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뻔뻔해!”
나는 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빙긋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고 싶은 여자분이 몇 명이나 되시죠?”
“세 명입니다.”
“세 명….”
“아. 네 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기요.”
아이리스.
그러니까, 방금 막 나의 예비 신부 겸 연인이 된 여인이, 훌쩍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짝 붙은 상체, 머리카락, 살내음, 아찔한 여인의 자태가 눈 앞에 멈춰 섰다.
단아하고 고아하던 자태는 어디 가고, 그 나잇대의 소녀에게 걸맞는 풍부한 표정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교제, 라고, 그쪽이 먼저 말했어요.”
“그렇습니다만….”
“그럼. 당연히 내가 일 순위여야 할 거야.”
고운 손가락이 내 멱살을 잡았다.
곱게 자란 황녀가 할 법한 말투도, 행동도 아니었기에,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 했다.
쪽.
“오라버니.”
하.
이런 성격이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