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설원의 공주 (1)
* * *
“이러니까 연애를 못 했지.”
쯧쯧.
혀를 차며 누나에게서 온 편지지를 접었다.
품에 안겨 고개를 부비적거리며, [ ]의 의미가 뭔지 고민하는 누님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산을 표현한 문자야.”
“산?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야 틀린 말은 아니니까.
물론 누나가 대뜸 편지에 산을 그려 보냈을리는 없겠다만.
마찬가지로 누님 역시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갑자기 산을 왜 그려서 보낸 거라니?”
“글쎄.”
사실은 산이 아니라 엿이나 처먹으라는 욕설이라는 사실을 누님께 어찌 설명하겠는가.
나는 가만 웃으며 누님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으이잉….”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는 누님도 귀여웠다.
치렁치렁한 백금발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주며 이마에 쪽 입술을 포개자, 몸을 비비던 누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읏.”
“왜이리 귀엽게 군대.”
“귀여워?”
“귀엽지 그럼.”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포근하고 자애로운 미소. 해사하게 웃은 누님이 키득키득 웃었다.
“얼마나 귀여운데?”
“글쎄.”
나는 슬쩍 주변을 둘러다보곤, 쫑긋거리는 누님의 귀에 속닥였다.
“데이지보다 더.”
“그건 당연한 거잖니.”
“그런가?”
데이지가 들으면 서운해서 울먹거릴 소리를 태연히 하네.
그래도 나는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가 들은 것도 아닌데 뭐.
“….”
아.
“너무해요.”
“…나는 긍정 안 했다?”
“그래도 저보다 아가씨가 더 귀엽다고는 하셨잖아요!”
할 말이 없네.
눈망울이 촉촉해진 데이지가 삐져서 뛰쳐나가기 전에, 그림자로 발목을 휘감고는 올라가 허리까지 단숨에 낚아챘다.
“익. 놔주세요.”
“이리온.”
강아지 다루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림자에 묶인 채 끌려온 데이지의 턱이며 머리를 쓰다듬고 간질어줬다.
“이런 걸로 풀릴 거 같으세요? 주인님도 저를 뭘로 보시고….”
처음엔 흥칫 피하던 데이지.
5분이 지나고.
“으으으응….”
기분이 풀렸다는 말은 자존심 상해 못 하고 은근슬쩍 턱을 삐죽 내밀거나, 머리를 살살 손바닥에 부빈다.
다 풀렸구만.
그렇다고 여기서 손을 떼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서운해 할 게 뻔하니, 좀 더 만져주기로 했다.
“앗. 아니, 주인님. 그림자. 그림자 올리지 마요. 으앙!”
유사 촉수물 보는 재미도 좀 있고.
물론 그림자로 진짜 촉수물처럼 쑤시거나 하진 않았다. 치마를 팔랑팔랑 들추거나, 이따금 톡톡 건드리는 게 끝.
아무래도 직접적인 행위는 내 몸으로 직접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앗. 나도 할래.”
다만 어디까지나 나만 그렇다는 얘기고.
누님은 그런 자제 없이 마음껏 데이지를 농락했다.
“응, 앗! 주인님! 그만, 그마안. 살려주세여…!”
“누님. 이제 내려놓자.”
“힝.”
누님이 점점 응석받이가 돼 가는 것 같은데.
그만큼 나도 누님에게 응석 부리는 편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응석받이라는 느낌이다.
결국 남매에게 잔뜩 농락당한 데이지만 울상이다.
“너무해!”
으쓱.
아무튼 뭐.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나면서, 특별한 일 없이 나름 평화로운 나날이 반복 중이었다.
아이리스와는…. 천천히 알아가는 중이고. 일단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라곤 하나, 스킨십은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정도가 끝이다.
처음에 입맞춤을 몇 번이나 나누긴 했지만. 그건 노 카운트로 봐야 할 것 같고.
그 외에는….
안나에게 슬슬 한 번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안나에게는 별 마음이 없기도 하고.
아이리스의 경우는 오히려 그쪽이 특별한 경우인데다, 결국 교제하게 된 이후 이성 간의 교류를 꾸준히 이어가니 그간 거리를 두고 봤을 때는 보이지 않던 매력적인 요소가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하지만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이니까.
안나는 그런 경우가 아니니, 아이리스처럼 교제 후 서로 알아가기 같은 방법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애초에 이미 내 여자가 한 손가락을 꽉 채운다. 누님, 데이지, 크리스티나, 아이리스, 그리고 누나까지.
….
누나를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려니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리스와 마찬가지로 불가항력이니까.
다섯 명이나 되는 여자를 품에 안아야 하는데, 여기서 안나까지 굳이 끌어안을 필요가 있나 싶긴 하다.
다섯 명의 여자가 또 평범하면 몰라도, 그것도 아닌데.
입맛이 조금 썼다.
하지만 내게 다른 여자가 있어도 상관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 안나다. 내가 깔끔히 거절한다고 해서 그녀가 과연 포기해줄런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일단.
편지를 쓰기로 했다.
밤에 찾아갈테니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굳이 '밤시간'에 찾아간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흡혈귀인 내게는 또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나는 편지의 말미에 그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이며, 그림자를 타고 갈 테니 내가 갑자기 나타나도 너무 놀라지 말아달라고 적어두었다.
편지지를 접고, 봉한 뒤, 그림자에 넣어 까마귀들에게 전달하게 한 뒤.
나는 속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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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렛 체페슈
나이: 121 성별: 남
키: 181 몸무게: 74
근력 ▶ 124
민첩 ▶ 142
체력 ▶ 121
내구 ▶ 116
마력 ▶ 363
긍정 특성:「진조(SS)」「공?(SS)」「가주(S+)」
부정 특성: 「기억 상실(B)」「천칭의 시련(SS)」
고유 특성:「부여(S)」「연결(S)」「조율(S)」
+++++
일단 전체적으로 수준이 확 올랐다.
신체 스펙 자체만 보면 최근에 말도 안 되게 널뛰어버린 누님에게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진조 특성도 있고, 어마어마한 마력 수치 덕에 격차가 오히려 이전보다 줄어들었다고 봐야 하는 수준이다.
특성까지 전부 활용해서 싸운다고 생각했을 때, 이 정도 스펙이라면 검성인 북부 대공이나 마탑주인 프리드리히 공작과도 동격으로 봐도 되겠지.
마왕을 제외하고 나머지 악마 군단장과 동급인, 대륙 최상위권 강자인 그들과 동격이란 점에서 지금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왕의 저주로 영구적으로 손실해버린 스탯 수치가 아깝다.
얼마나 깎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부정 특성 두 개다.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기억상실과, 새롭게 추가 된 천칭의 시련.
천칭의 시련은 일단 80일 가량 남은 상태다.
마법부 교수들과, 마탑에 악마 계약자의 시신을 넘기며 천칭의 계약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의뢰를 해놨으니 조만간 답이 올테지.
기억상실은….
솔직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모르겠다. 기억상실의 원흉이던 마왕의 저주는 해주했는데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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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
▶ 모종의 이유로 기억을 잃었다. 모종의 이유를 제거하더라도 기억이 돌아오진 않는다. 기억을 찾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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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있는 특별한 방법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일단 이것도 이번에 누나를 만나게 되면 상담해봐야겠다.
*
그렇게 이것저것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둥근 원을 그린 보름달의 빛이 창을 타고 넘어온다. 태양처럼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만큼 환하지도 않고, 은은하게 몸을 비추는 달빛.
나는 침대 위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누님을 바라봤다.
밤의 주인인 흡혈귀면서, 뭐가 그리 피곤한지 곤히도 잠들어 있다.
흐트러진 잠옷과, 몸 곳곳에 남은 잇자국. 정사의 흔적을 씻어냈음에도 그것만큼은 없어지지 않고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보여주듯 했다.
마찬가지로 그 옆에 기절하듯 엎어져 있는 데이지까지.
“다녀올게.”
나는 둘의 뺨을 장난스레 콕콕 찔러보곤, 그림자 속으로 침잠했다.
안나의 기숙사가 어디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초대 받은 적 있으니까.
같은 S랭크이기도 했으므로, 순식간에 나는 그녀의 기숙사에 다다랐다.
《곧 오시겠지?》
북방의 말.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언뜻 초조하게 들리는 안나의 목소리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공녀님.》
안나를 달래는 듯 한 사샤의 목소리.
여전히 뜻은 모르겠다.
알아듣지도 못 하는 말을 엿들어서 뭐 하겠는가. 나는 곧바로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히윽….”
갑자기 나타나도 놀라지 말라고 했는데.
깜짝 놀란 듯 딸꾹질을 하는 안나. 에휴, 한숨을 쉬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던 사샤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그렇게 숙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 앉을까요?”
정말 예법을 따질 거였다면 간단히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안 끝난다.
북방 설원의 어쩌구 저쩌구 누군가의 여식인 사샤 아일라노바가 위대한 제국의 어쩌구 저쩌구 체페슈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하면 내가 또 그걸 고스란히 받아주며 고개 드는 것을 허락해줘야 그제서야 인사가 끝난다.
아카데미니까. 명목상 모두 평등하기도 하고, 애초에 생도 수가 몇 명인데 그렇게 일일이 따져가며 인사한단 말인가?
그러니 대충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사샤가 안내해주는대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곧 올 것이라 생각했는지 준비 된 다과를 사샤가 내오는 동안, 딸꾹질이 멎은 안나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오, 오셨습니까.”
“이제 중앙말에 꽤 능숙해지셨네요, 공녀.”
“…부끄럽습니다.”
뭐가 부끄럽단 걸까. 과거의 어설프기 짝이 없던 말투가? 아니면 나한테 칭찬받는 게?
그래도 과연 천재는 천재다. 거의 한 달만에, 이 정도까지 능숙해지다니.
발음이 아직 좀 엉성하긴 하다만.
“차는 뭘로 드시겠습니까?”
“그냥 커피로 주세요. 말 편히 하시구요.”
“네에.”
사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타러 갔다.
얼굴을 붉히던 안나가, 정신을 차렸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피하지 않고 그녀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시잖습니까.”
“으음.”
난감한 듯 말꼬리를 흐리자, 안나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솔직히 마음이 좀 쓰리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늘 부드럽게 입가에 그리던 미소도 지우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녀가 제게 품은 감정이, 단순한 동경심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나요?”
그 말이 안나에게 어찌 들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울컥했으나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는 듯 했다.
“……그럼 안 됩니까?”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대답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조심조심,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사샤가 조심스럽게 나와 안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곤 슬그머니 안나의 뒤로 가서 섰다.
“…맞습니다. 동경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립니다. 치기 어린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거기까지 말한 안나가, 숨을 헐떡였다.
길게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긴 말을 끝마친 것처럼 가쁜 숨을 몰아쉰 그녀가.
울상을 짓곤.
“그럼에도 제 마음은 이것이 사랑이라고 외치는데.”
처량한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어디서 들어봤더라.
“제가 사랑이라 생각하는데. 제 심장이 그리 말하는데.”
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떠올렸다.
달빛 아래 누님과 처음 마음을 나눴던 그 때를.
“그냥. 옆에만 있어도 좋습니다.”
그녀는 한 때의 나구나.
한 때의 누님과 같구나.
나와 누님과 참으로 똑같은, 그런 어설프고 서투른 사람이구나.
“제가 품은 감정이 동경이라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하셔도 안 됩니다.”
도대체 나는, 내 비밀을 몇 명에게 말해주는 건지.
이래선 비밀도 뭣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