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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55화 (55/199)

〈 55화 〉 루나 테일러 (1)

* * *

B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솔직히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아니. 솔직히 B든 A든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레티 누님도, 데이지도, 크리스티나도, 심지어 아이리스도 D 이상은 될 텐데.

나는 씩씩거리는 누나에게 어깃장을 놨다.

“B인지 A인지가 중요해 지금?”

“씨발아.”

펑!

작은 폭발이 뺨을 스치듯 터졌다.

닿지는 않고, 조금 화끈 거리는 정도.

보아하니 누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하급 정령 하나가 심술을 부린 모양이었다.

“애 관리 좀 잘 합시다, 아줌마.”

“나이도 존나 많은 게 뭐래냐?”

아.

그것도 그런가.

따지고 보면 내 쪽이 나이가 훨씬 많지 않나?

“오빠 해봐.”

“뭔 100살 넘게 처먹고 오빠 타령이냐. 역겹게. 할배 고추 서요?”

이 씹련.

“니가 봤어? 봤냐고.”

“드러운 거 치워 십새야!”

바지춤을 만지자 기겁을 한다.

그러게 왜 깝쳐.

아무튼.

“늦어서 미안.”

“…아니, 뭔, 참 나. 그래.”

티격태격 하던 내가 대뜸 사과를 박으니, 누나도 더 화를 내기 그랬는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나 기억이 없어.”

“뭐?”

“누나 반응 보니까 우리가 뭘 하긴 한 모양인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뭐?”

어안이 벙벙한 모습.

나는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강수진.”

“….”

“나 좀 도와주라.”

이미 없는 이름이 돼 버린, 오직 그녀와 나 둘만 알고 있을 이름까지 부르자, 누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씹새끼….”

가늘게 뜬 눈이 나를 훑어봤다.

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곤.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거 보니까 진짜 기억상실인가보네.”

앞으로 루나라고 불러, 병신아.

장난스러운 말투였으나, 그 말을 하는 누나는 꼭, 무언가 섭섭한 기색이었다.

“뭐가 궁금한데. 아는 건 다 말해줄게.”

“우리가 그동안 뭐 했는지.”

“뭘 하긴…. 나도 정확하겐 모르지. 나는 태어난지 이제 겨우 이십 년이고, 너는 백이십년이잖아. 나랑 같이 다닐 때 얘기는 해줄 수 있지만.”

그것도 그런가.

나는 누나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백년을 보낸 셈이니, 그때의 기억이 누나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 그건 나중에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우리 둘이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

“한, 칠 년? 그쯤 됐나. 어떻게 알고 왔는지 나 보자마자….”

보자마자?

“십대 초반이랑 이십대랑 왜 가슴은 다른 게 없냐고 존나 놀렸어.”

“아.”

“개새끼야. 거기서 그냥 ‘아’하면 내가 뭐가 되냐?”

“초등학생 가슴으로 성인이 돼 버린 비운의 여자.”

“씨발아너는얼마나잘났는데.”

“지금도 이십 넘는 듯.”

“존나 불공평하네 인생.”

음.

이 안정적인 맛.

정말 내가 아는 그 누나가 맞구만.

내가 잃어버린 기억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그간 누나가 많이 변했을까 걱정하긴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기억하는 누나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지금의 그녀는 강수진이 아니라 루나 테일러니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왜 웃냐? 재밌는 거 생각났냐? 나랑도 공유하지?”

괜히 피식피식 웃고 있자, 띠꺼운 걸 보기라도 했다는 듯 눈가를 찌푸린 루나가 나를 타박했다.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웃게 하네.”

“사람 앞에 두고 쪼개는 것도 실례야. 공작이란 새끼가 그것도 몰라?”

“네다남.”

“별다줄이야 새끼가. 무슨 뜻인데?”

“네 다음 남작.”

“아니 뭔. 지금 공작이라고 뻐기냐?”

“네.”

“존나 얄밉네.”

끝나지 않는 말꼬리 잡기.

재미는 있지만, 진짜 둘 중 하나가 지치기 전까진 끝나지 않는 꼬리물기가 이어진다.

이대로 가다간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손을 휘휘 저었다.

“말꼬리 잡기는 여기까지 하고.”

“존나 어이없네 지가 먼저 시작해놓고….”

아무튼.

“그때 만난 이후로 어떻게 됐는데.”

“보면 알잖냐. 니가 내 후원자 해주기로 하고, 영지 살림 좀 풍족하게 만든 다음 같이 히든피스 캐러 다녔지.”

“근데 왜 난 딱히 뭐가 없지?”

“너는 특성이 사기니까 스탯 위주. 나는 어차피 후방 딜러니까 스탯은 마력만 챙기고 나머지는 특성 위주.”

“나 스탯 별로 안 높던데.”

“저주 때문 아냐?”

거기까지 말한 루나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웠다.

시커멓고 끈적한 어둠덩어리가 오른쪽 다리를 반쯤 집어삼킨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뭔지 알 수 있었다.

“저주네.”

“엉. 그래도 나는 별 거 아냐. 니가 그때 나 대신 몸빵해줘서.”

하긴.

원래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야 했을 저주였다는 걸 생각하면, 스탯이 좀 날아간 거면 싸게 먹힌 걸지도.

“원래 내 스탯이 어느 정도였는데?”

“마력 빼고 다 사백 중후반이었을걸? 마력은 오백.”

바알 개씨발새끼야 내 스탯 돌려줘.

*

“아니, 뭐…. 야, 너무 심란해 하진 마라. 그래도 목숨은 건진 거잖냐.”

잃어버린 총합 1500 가량의 스탯에 침울해진 나를 토닥이는 손길.

부드럽고, 길다란 섬섬옥수가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슬쩍 고개를 드니, 멋쩍은 얼굴로 고개는 돌린 채 나를 위로하는 누나가 보였다.

“…웬 일이래.”

“뭐가.”

“꼴 좋다는 말이나 할 줄 알았는데.”

“…십새끼. 나 대신 맞아준 애한테 그럴 소리 할 년으로 보여, 내가?”

“….”

“대답 안 해?”

“아냐. 고마워.”

내가 순순히 사과하자 눈을 크게 뜬 누나가, 이윽고 픽 웃더니.

“니가 기억을 잃긴 잃은 모양이다? 옛날 성격 보이네.”

“뭔.”

“처음 만났을 땐 이미 백살 처먹은 노땅이라 디럽게 까칠하고 깐깐했는데.”

“내가 그랬다고?”

“그래.”

내가 그럴 리가…. 라고 말하곤 싶지만, 실제로 백년동안 살면 전생의 성격 따위가 변질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고 괜히 입술을 비죽거렸다.

“거 삐지기는.”

“안 삐졌다.”

“삐진 거 풀어라. 가슴 만질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의 저의가 뭔가요 동생님.”

“깎아지른 절벽 좀 만지는 걸로 사람 기분을 풀려하다니…, 어, 뭐?”

내가 잘못 들었나?

뭘 만지게 해준다고?

“싫음 말고.”

“아니, 뭔, 씹. 뭐요?”

“싫음 말랬다. 나 잘 거니까 꺼져. 아파.”

저주 덩어리가 뭉친 채 달라붙어 있는 다리 한쪽을 보란 듯 흔들곤, 그대로 축객령이 떨어졌다.

바람 정령 두 마리가 내 몸을 둥실둥실 띄워 밖으로 나를 내보내는 와중에도 나는 방금 들은 발언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

다음날.

테일러 저택에서 하룻밤 묵은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루나를 찾아갔다.

루나, 누나, 아직까지 좀 헷갈리기는 한다만, 루나라고 부르는 데에 적응해야겠지.

아무튼.

어제 한 발언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궁하자,

“설레발 좀 치지 마. 아무 짓도 안 했어 우리.”

“진짜?”

“엉.”

“근데 가슴을 왜 대주는데.”

“…어차피 안 만진다매.”

“안 만지는 건 안 만지는 거고 궁금해 하는 것도 안되냐?”

“안 만진다는 건 안 변하네.”

“아무튼 뭐냐고.”

“뭐 씨발아! 니가 만지고 싶댔잖아!”

존나 억울하다.

“내가 언제 그랬어 미친년아!”

“기억도 없는 새끼가 뭘 믿고 나대는 것이지?”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이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을 땄어야 했는데.”

“증거 없잖아!”

“닥쳐 근친충 새끼야! 넌 씨발 친누나가 있는데 근친야겜이 하고 싶냐?”

“아니. 뭔, 그럴 수도 있지. 취향 존중 해주시죠.”

“나 BL 좋아해.”

“웩.”

“내로남불 좆되네 진짜.”

그렇게.

아침부터 잔뜩 진을 뺀 우리는, 대충 그런 말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 없는 지금 상태로는 인정할 수 없으니 다음에 기억을 되찾으면 다시 얘기하기로 합의를 봤다.

루나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정령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침대 한 켠에 엉덩이를 붙였다. 계속 서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크르릉.

나를 경계하듯 목을 울리는 정령도 있는가 하면, 친근하게 다가오는 정령도 있었다.

보아하니 나랑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이는 정령들이 주로 내게 친근함을 느끼는 듯 했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아무튼.”

“또 뭐.”

누나를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자고 생각해뒀던 것 중 하나.

처음 알고 나서 무척 당황했던 것….

“…왜 메인 남캐들이 다 여자가 돼 있어?”

누나가 안다는 보장도 없고, 솔직히 찔러본다는 생각으로 질문한 것이었지만.

“풉.”

웃었다.

뭐가 웃기지.

“너 기억 잃기 전에도 나 만나고 얼마 안 지나서 그거 물어봤어.”

“내가 그랬다고?”

“엉. 분명 황자가 태어나야 하는데 왜 황녀가 태어난 건지, 북부에 왜 공녀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도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확실히 나라면 누나를 만나자마자 궁금해서 물었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답은?”

“아, 그거?”

누나가 입을 열었다.

무척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긴 무슨 세계지?”

“뭐긴.”

“여기 이름이 뭐냐고.”

“「푸른 장미 정원」아냐?”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내가 핀잔하자, 누나는 특유의 자존심 팍 상하게 만드는 거만한 미소를 짓더니.

“아냐.”

“아니라고?”

“여긴 「푸른 백합 정원」세계거든.”

….

?

“그럼 「푸른 장미 정원」은 뭔데.”

“내가 만든 팬 게임 제목인데.”

“시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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