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황실 (3)
* * *
다음 날.
학장에게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니, 간단히 출석인정휴학증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직 1학년 1학기일 뿐인데, 이번에 빠지게 되면 그 중 한달 가까이를 빼먹게 되는데도 학장은 허허 웃기만 할 뿐, 내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권력이란.
“1학기 서열전이 끝나고 나면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겠어.”
“뭘?”
기숙사로 돌아와, 누님을 무릎 위에 앉혀두고 중얼거리니 누님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물었다.
“아카데미를 계속 다닐지 말지?”
“으응. 아직도 그 고민을 하고 있는거야?”
우리라고 좋아서 다니고 있는 게 아닌걸─.
누님이 내 품에 등을 기대며 그렇게 칭얼거렸다.
“차라리 우리가 교수였다면 마음이 편했을텐데.”
“우리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없잖아.”
“없긴? 흡혈귀의 역사라든가, 뭐 그런 거라두 가르치면 되잖아.”
레티 누님이 툴툴 거리며 말했다.
누님을 달랠 겸, 뺨과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으응, 으응─.”
“흡혈귀의 역사 같은 걸 누가 듣고 싶어하겠어? 별로 재밌지도 않을텐데. 재밌게 가르칠 수 있어?”
“…없지만.”
“그보다, 흡혈귀의 역사는 잘 알아?”
“…몰라.”
“그런데 교수는 무슨 교수야.”
누님이 시무룩해졌다. 늘어뜨린 백금발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준다. 히잉, 하고 나 들으란 듯 우는 소리를 낸 누님이, 내 손가락을 약하게 앙 깨물었다.
“아앙.”
“아파.”
“거짓말 하지마.”
거짓말이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고민이 드는 정도일 뿐이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으응.”
고개를 끄덕이는 누님.
“그것보단, 황제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할 지가 더 신경쓰이지 않아?”
“나는 만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니까.”
“나도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정확히는, 황제라는 캐릭터의 설정에 대해서는 거진 파악하고 있다. 누나를 통한 교차검증으로 틀린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고.
하지만 설정을 아는 것과, 직접 사람으로써 대면하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
일단 딸의 남자친구로써 불려가는 것이기도 하고.
음.
“기억 잃기 전에 내가 뭐라고 한 말은 없어?”
“음. 꼰대다?”
“이런.”
“고집이 세다?”
“그게 그거 같은데.”
골치가 좀 아프겠다. 아마도,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황궁의 정치질에 휘말릴 가능성이 컸다.
아니. 내키지 않더라도, 나는 거기에 끼어들어야 했다.
가만히 놔뒀다간, 아이리스를 견제하는 세력이 커져서 그녀를 사사건건 방해할테니까.
“편한 게 없네.”
정말 그랬다.
그래도 뭐.
“이번 기회에 아이리스나 확실하게 꼬셔둘까.”
“…그게 지금 내 앞에서 할 말이니?”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누님. 손톱을 세우고 나를 할퀴려고 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야아!”
귀엽긴.
*
다음 날 아침. 워프 게이트 앞에 선 채, 걱정스럽게 내 손을 꼭 잡는 아이리스.
“뭐가 그리 걱정 돼요?”
“그냥, 아버지가, 오라버니한테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닐까….”
거 참. 걱정도 많기는.
현실적인 걱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리스의 걱정에 냉큼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그래서, 나는 분위기를 풀 겸 아이리스와 잡은 손으로 손깍지를 꼈다.
“오빠, 해봐.”
“…아이, 정말. 저는 심각하단 말이에요.”
“오빠.”
“…오빠.”
“옳지.”
씨이. 나를 흘겨보는 아이리스의 기색이 한풀 진정되는 듯 했다. 나는 기특하다는 듯 깍지 낀 손의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간질거렸다.
“으응─.”
“알아서 잘 할테니 걱정 마.”
“…응.”
“그럼 갈까요?”
그렇게, 그녀와 손을 마주 잡고 워프 게이트를 넘어선다.
황제에게 허락받은 극소수만 사용할 수 있는 황궁의 워프 게이트.
제국의 일곱 공작인 나와 황녀인 아이리스는 그 극소수에 포함되어 있기에, 황궁과 꽤 멀리 떨어진 수도 외곽의 게이트가 아니라 곧바로 황궁으로 워프했다.
빛이 나와 아이리스를 감싸고, 약한 부유감이 우리를 감쌌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뒤바뀐 시야.
아이리스와 손을 마주 잡은 채,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고귀한 제국의 빛과 소금, 위대한 제국의 기둥을 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우리를 환영하며 도열한 황실의 검독수리 기사단.
제국의 빛과 소금은 아이리스를, 제국의 기둥은 나를 표현하는 말이다.
태양은 황제를, 빛은 보통 뒤를 이을 태자를 부를 때 쓰던 단어라는 설정일텐데.
‘다행히 아직 후계자 정리가 안 됐나.’
이 부분은 다른 황자들을 어찌 부르는지 들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아무튼 용사가 된 아이리스가 계승권 경쟁에서 아예 밀려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돈 확인할 수 있었다.
‘기왕이면 아이리스가 황제가 되는 편이 좋지.’
나와의 관계가 있으니,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긴 하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니, 양 옆으로 쭉 도열한 기사들의 사이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은 거한이 다가온다.
척, 거한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제국의 빛! 제국의 소금!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황녀 전하와 제국의 일곱 기둥이신 스칼렛 체페슈 전하를 감히 알현하옵니다! 저, 아놀드가 두 분을 폐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인가.
기사단의 상징은 검독수리이면서, 어째 갑옷은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니 괴리감이 상당하다.
그래도 뭐.
은근슬쩍 팔짱을 낀 아이리스를 슬쩍 보니, 나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안내하게.”
“예!”
아이리스의 동의를 받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자, 아놀드가 벌떡 일어선다.
엄청나게 키가 크군.
나도 작은 편은 아닌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다란 아놀드 기사단장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나는 앞서 가는 아놀드의 뒤를 보다, 아이리스에게 전음을 흘렸다.
“기억에 없는데, 나랑 아는 사이인가요?”
“아마도요…. 기사단장은 벌써 20년째 검독수리 기사단의 단장인걸요.”
“그렇군요.”
어쩐지 기세가 엄청나더라니.
거대한 덩치와, 커다란 어깨, 그러면서도 밸런스 잡힌 체형과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거기에 극도로 갈무리 된 기세.
나는 그가 이 황궁 내에서 한 손에 꼽힐 강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이리스.”
“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누가 누구랑요?”
“아이리스랑 아놀드 기사단장이요.”
“그, 그런 게 왜 궁금한 거예요. 당연히 제가 지죠.”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앞서 걷던 아놀드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작게 소곤거려도, 저 정도 경지의 기사라면 모두 들을 수 있겠지.
“하하! 전하의 성장세를 생각해보면, 1년 안에 따라잡힐 거라 예상합니다!”
거 봐라. 호탕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주잖아.
아이리스가 얼굴을 붉혔다.
“기, 기사단장을 제가 어찌.”
그래도 일단 두 사람의 사이는 나쁘지 않나.
누님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추측하긴 했지만, 누님이 가진 정보 역시 전생의 정보를 토대로 한 것이니까 일단 한 번 떠봤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다.
기사단장은 적어도 아이리스랑 적대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을 들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했습니다!”
영감이 목소리 하나는 쩌렁쩌렁 하구만.
황궁에서 이렇게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도 드물거다.
아놀드는 우리를 황제가 기거하는 알현실로 안내하고, 옆으로 물러섰다.
이 이상은 우리만 들어가란 뜻.
‘황제를 호위할 필요가 없단 건가.’
그건 나나 아이리스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황제 스스로를 향한 자신감과 신뢰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늙어버린 퇴물이라 해도.
나는 굳게 닫힌 알현실의 문을 밀었다.
열린 문 너머, 화려하게 치장된 옥좌에 앉은 남자.
대륙의 통일황제이자, 제국 아르카디아의 적법한 통치자.
클라우디우스 2세.
한때 북부의 검성과 견주었던 검의 달인이자, 오러 마스터.
비록 검성이 벽을 넘고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는 동안, 벽에 막혀 오러 마스터로써 늙어버긴 했으나, 그렇게 쇠약해진 지금조차 황제의 거구는 밖에 서 있는 기사단장 아놀드와 비슷할 정도였다.
“체페슈가 대륙의 태양,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나는 가볍게 목례했다.
“크음.”
황제가 콧김을 뿜긴 했으나, 나의 태도를 지적하진 않았다. 황제와 나의 사이는, 내가 조금 숙여줄 뿐 대등에 가까운 관계였으니까.
이곳은 아카데미가 아니다.
“….”
그런데, 황제가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설마 이 늙은이. 내가 고개만 까딱 숙였다고 삐졌나? 그래서 지금 나랑 기싸움 하는 건가?
옆에서 어린 딸이 보고 있는데?
“아….”
저거 봐.
어? 막내딸이 당황하잖아.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이야. 나이도 저기 북부 영감이랑 비슷하면서.
….
생각해보니 내 동년배구나, 그럼.
조금 우울해졌다.
“아버지….”
괜히 내가 눈 앞의 흰 머리 흰 수염의 영감이랑 비슷한 나잇대라는 사실에 울적해져 아무 말 않고 있으니, 불안해진 듯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굳이 황제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여자인데 마음 고생 시킬 순 없지.
“…많이 변했군.”
그제서야 입을 연 황제.
내가 그의 대답 없이 고개를 든 것에 대해 따로 추궁할 셈은 아닌 듯 했다.
게다가, 어딘가 허물 없는 말투.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그러자 황제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는 그만하게. 30년 전 아비에게서 공작위를 찬탈해놓고 나한테 사후통보를 날리던 때가 기억나니 끔찍하군.”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었던 걸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