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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77화 (77/199)

〈 77화 〉 아르카디아 (1)

* * *

아르카디아 제국의 황태자, 에드윈.

그는 오늘따라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보다 서른이나 더 어린 그의 여동생, 아이리스가 오늘 아침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체페슈 공작과 함께.

그를 연인으로 대동한 채 말이다.

“빌어먹을 년….”

제국의 황태자가 입에 담을 법한 단어는 아니었으나, 듣는 이가 없으니 에드윈은 욕설을 뱉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를 악 물고서, 초조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자신의 은밀한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동생 애런을 보내보았지만.

“체페슈 공작이 경계가 너무 강하더라구요, 형님…. 죄송합니다.”

결국 체페슈 공작이 오히려 아이리스를 싸고돈다는, 에드윈에게 있어 좋을 것 하나 없는 사실만을 확인사살 했을 뿐이었다.

차라리 체페슈 공작이 아이리스에게 별 감정 없이, 모종의 이유로 연인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했으나…, 그것도 아닌 듯 했다.

“쯧….”

“어, 어떡할까요, 형님.”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는 에드윈을 보고, 애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역시 초조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아이리스가 치고 올라온다고한들 수십년간 황태자로서 자리를 지켜온 에드윈에게 승산이 있다고 여겼기에, 에드윈에게 모든 것을 걸었는데 공작의 난입으로 판이 뒤집힐지도 모르게 돼 버렸으니.

게다가 에드윈에게는….

“일단, 경거망동 하지 말고 있어라. 공작의 심기를 괜히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

일곱 공작 중, 세 명의 공작이 황태자를 직접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오러 마스터의 자질이 없어 위태롭긴 하나, 삼십 년 전 새롭게 공작위를 물려받은, 지금의 체페슈 공작이 알게 모르게 뒤에서 도움을 줘 힘겹게 황태자가 될 수 있던 에드윈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세 명의 공작에게 받는 지지?

궁 내부에서의 암묵적인 지지?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게 바로, 체페슈를 비롯한 프리드리히, 크로이체프의 삼대 가문이다.

애초에 아이리스를 제외하면 마스터의 자질조차 없는 게 지금의 세대 아니었나.

프리드리히는 계승권에 관심이 없다. 크로이체프는 황제의 뜻에 따를 뿐 계승권에는 참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스터의 자질 없이 황태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체페슈의 지지가 필요했거늘.

“…내가 알아서 할테니 이만 돌아가봐라. 우리 둘이 만났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예. 걱정 마십시오, 형님.”

처세술 하나는 뛰어난 놈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할테지.

에드윈은 애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내 스트레스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후우.”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도록 할까. 에드윈은 그의 침실을 향해 걸었다.

‘지금은 쥐 죽은 듯 있어야 한다….’

체페슈 공작을 견제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도 없다. 그러니, 아이리스와 공작이 돌아가고 나면 그때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두 손으로 침실의 문을 밀어서 열고.

“──허억!”

에드윈은, 베개에 검은 잉크로 새겨진 글자를 보고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

펄럭.

날리는 검은 깃털.

에드윈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마스터는커녕, 무예의 자질이라곤 전혀 없이, 한없이 일반인에 가까운 에드윈이기에, 더더욱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황궁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런 짓거리를…!’

황궁의 호위에게 모든 안위를 맡기고 있는 그였다. 스스로 보위할 수단이 없는 에드윈에게, 황궁의 경비가 속절 없이 뚫려 침실까지 허용해버리고 만 에드윈이 느끼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껏 어느 누가, 감히 황태자의 침실에 침입해 베개에 협박문구에 가까운 걸 써갈겨 놓는단 말인가.

“후욱, 후우욱─.”

극심한 공포에 순간 멎어버린 호흡.

뒤늦게 가슴이 턱 막히며, 억지로 트인 입이 거칠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에드윈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미, 미친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태자를 협박해…?!”

반역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알리면, 체페슈 공작은 반역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주실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협박을 당했는데 편을 들어주지 않겠냐만.

만에 하나의 경우라는 게 있지 않은가.

심지어 에드윈이 생각했을 때, 황제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적어도 만에 하나보다는 커 보였다.

적당히, 자잘한 실수 따위였다면 모를까 무려 반역이다. 황태자의 침실에 침입해, 그 신변을 두고 협박했으니까.

그래서 문제였다.

반역죄를 씌워 처벌하기에, 체페슈 공작이 너무 거물이었다.

“크으윽…!”

에드윈이 생각하기에, 그의 아버지라면 사건을 묻고 지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체페슈 공작은 사적으론 나름 친분이 있지 않은가.

“나이를 백이십이나 처먹었으면서 스무살 인간 여자애를 탐하다니…! 양심도 없는 놈…!”

상황이 그렇게 되니, 에드윈이 할 수 있는 건 무력하게 스칼렛을 욕하는 것밖에 없었다.

참으로 굴욕적인 밤이었다.

“두고, 두고보자…! 아이리스…!”

에드윈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 화살을 그의 여동생에게로 돌렸다.

이미 쥐 죽은 듯 지내자는 생각은 온데간데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던가.

그가 체페슈 공작에게 느꼈던 끝 없는 공포가, 아이리스를 향한 타오르는 분노가 돼 버렸다.

체페슈는 감히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만만한 동생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이게 모두 아이리스 그년 때문이다.’

허나 에드윈은 당당했다. 자신의 태도가 틀렸거나, 비겁한 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강한 상대에겐 약해지고, 약한 상대에겐 강해지는 게 당연한 법 아닌가.

그런 소인배적 면모까지, 에드윈이 결국 오러마스터가, 제국의 황제가 될 자질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년이 체페슈 공작의 지지를 받아서 건드릴 수 없는 상태인 거라면, 그 지지를 철회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보나마나 몸을 팔아 체페슈 공작의 총애를 얻을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체페슈 공작의 총애를 거둬들이려면, 공작이 느끼기에 아이리스가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에드윈은 음흉하게 웃었다.

이미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에드윈은 제국의 황태자였다. 증거만 없으면 됐다. 그리고 에드윈에게는 애런이라는 앞잡이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모를까, 아무리 체페슈 공작이라도 증거 없이 에드윈을 몰아세우진 못하리라.

지난 삼십 년간 황태자 자리를 지키며 는 것이 음습한 정치질 뿐이었고, 지금 상황은 그의 장기를 살리기에 참으로 적절한 상황이라고, 에드윈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일단 체페슈 공작과 아이리스 사이를 이간질 한 다음, 이미 척을 져버렸으니 언젠가 체페슈 공작도 어떻게든 손을 봐야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에드윈은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에드윈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테니까.

마침 떠오르는 방법이 있었다. 이 방법대로만 되면, 눈엣가시인 아이리스도, 체페슈 공작도 모두 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에 대해서는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만.

다음 날.

궁궐 내부에서, 천천히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내용은.

‘아이리스 전하께서 계승권을 위해 체페슈 공작을 유혹했다.’

그런 내용이었다.

*

“개소리군.”

“오라버니….”

“안 믿어요. 걱정 마요, 아이리스.”

에드윈도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까마귀를 통해 충고해줬을텐데, 하루도 못 참고 일을 벌이다니.

그래도 어느 정도 몸을 사려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끄나풀인 애런을 통해 일을 벌이긴 했지만.

애런이 에드윈의 끄나풀인 것을 모르는 황궁의 사람들은, 이 소문의 배후를 아무리 캐도 에드윈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심증이 있더라도, 심증만으로 제국의 황태자를 압박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애런은 아예 버리는 패라고 봐야했다.

남겨둔 물증이 없으니 심증 뿐이라 내가 써먹을 순 없지만, 일단 내게 자신과 애런 사이의 커넥션을 들키긴 했으니.

애런도 자신이 버리는 패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머리는 꽤 굴렸어.”

한 가지 의외인 점이 있다면, 소문이 나를 저격한 게 아니라 궁 내부의 사람들을 선동하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놈의 성격대로라면 아이리스가 사실은 문란한 성격이다 같은 소문이라도 퍼뜨릴 줄 알았거늘.

그 편이 나와 아이리스를 이간질 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아, 설마.”

“왜 그러세요?”

설마.

“이걸로 우리 사이가 이간질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 글쎄요…?”

진짠가?

음.

그것보다.

“아이리스, 언제 말 놓을 거예요?”

“그러는 오라버니부터….”

“오빠 해봐요 오빠.”

“정말! 몇 번 해드렸잖아요 벌써!”

“존대도 그만하고요.”

“으으응…!”

소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투닥거리는 아이리스다. 나는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내가 반말하라고 안 할 때는 가끔 했으면서?”

“그건…!”

“그걸 보고 반존대라고 하나요? 설레더라구요.”

“지, 진짜?”

“진짜.”

“…설레?”

아. 질문하는 척 반말 썼다.

이 귀여운 여자 같으니.

나는 모른 척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아. 글쎄요. 들은 지 너무 오래 돼서─.”

“바, 방금 했잖아요.”

“네? 그랬어요? 못 들었는데?”

“나빠…!”

귀여워라.

바둥거리는 두 손목을 잡았다. 부루퉁한 얼굴의 아이리스의 이마에 쪽, 입술을 맞췄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져선 얌전해졌다.

“오빠, 해보렴.”

“……. 오빠….”

“이제부터 오빠라고 불러.”

“몰라요. 부끄러워.”

은근슬쩍 반존대를 쓰면서, 흘깃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이번엔 모른 척 하지 않고 아이리스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기특해.”

“기특해요?”

차가운 얼굴로,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할 줄 아는 여자라는 것은 나밖에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꼴렸다.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도, 훗날 방해 될 놈은 일단 좀 치워둘까.

뒤에 숨어버린 쥐새끼는 몰라도, 놈이 부리는 앞잡이 한 놈까지만 일단.

아이리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는 조용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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