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계승자 (1)
* * *
“둘이 뭐 했어?”
그림자를 타고 넘어온 누님이 우리 둘을 보고 말했다. 뻘쭘하게 서 있던 아이리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리곤, 방해꾼을 보는 눈빛으로 누님을 빤히 쏘아봤다.
“스칼렛. 전하가 왜 날 노려보는 거니?”
“글쎄. 왤까? 누님이 안 왔으면….”
“조용히 해요!”
정강이를 차였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아이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개져서 씩 씩 거리는 걸 보니 더 했다간 울어버릴 것 같아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니, 우는 아이리스가 보고 싶긴 하지만. 단 둘일 때 보는 걸로 충분하니까.
“흐응.”
누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소리를 내곤, 품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이거 전하려고 온 거야. 온 김에 얼굴도 좀 보구.”
흔히들 사용하는 고급의 재질이 아닌, 무늬도 문양도 없는 새하얀 색의 투박한 편지지. 나는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테일러에서 온 거지?”
“응. 처음엔 가문 인장도 안 찍혀 있어서 뭔가 했는데.”
잘 보라며, 누님이 편지 봉투에 손을 올렸다. 봉투를 뜯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파직.
날카로운, 보라빛 전기가 튀며 누님의 손을 튕겨냈다. 그리고 편지 봉투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테일러의 문양.
“이런 고위 봉인술식을 겨우 편지 보내는 데에 새겨둘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손 끝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붉어진 누님이 손목을 흔들었다. 따끔거리는지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린 채였다.
“자, 받으렴.” 누님이 건넨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누님이 건드려 활성화 된 봉인술식이 촘촘하게 봉투를 감싸고 있었다.
‘옵시디안이 힘 좀 썼나본데.’
누나가 거느리는 정령 군단 중 단연코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최상급 정령 옵시디안.
봉쇄와 봉인, 결계와 차단을 다루는 공간계 정령인 옵시디안은 환경과 조건만 맞을 경우 그랜드 마스터급의 저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정작 그를 다룰 수 있는 누나가 현재 한쪽 다리를 못 써서 전력 투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그러고보니, 지금은 다리 좀 나았나. 다음에 가서 좀 봐야겠다.
잡생각을 지우고, 옵시디안이 신경을 기울여 만들어냈을 술식을 내려다 봤다. 아예 봉인을 풀 생각을 안 하고 만든 듯 오로지 봉인의 단단함에만 초점을 맞춘 듯 보이는 봉인식이었다.
봉인술식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파직─ 튀어오르는 전기를 마력으로 짓눌렀다. 「공?」의 마력은, 튀어오르는 전격이 내게 닿기도 전에 그것들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순수히 마력만으로 봉인식을 지워버릴 수는 있으나, 그랬다가 편지의 내용물까지 영향이 미칠 수도 있기에, 나는 천천히 나의 마력에 「부여」를 사용했다.
「부여」 ─ 「해체」.
사륵, 사르륵.
마력에 부여 된 법칙에 따라, 「해체」의 법칙이 부여된 마력이 닿은 봉인술식이 맥 없이 풀려나갔다.
촘촘하고 빼곡하게 얽히고 섥힌 마력 패턴이 하나씩 하나씩 매끄럽게 해체되고, 수천 수만의 마력이 부드럽게 풀려, 이윽고 봉인술의 잔재만이 마력의 잔흔으로 남아 편지지에 은은하게 서려있게 되었다.
“와아….”
옆에서 아이리스가 작게 감탄하는 소리. 나는 편지지에 서린 마력의 잔흔을 털어내고, 봉투를 뚝 뜯었다. 봉인이 열리자, 툭 떨어지는 작은 병.
푸른 빛의 액체가 찰랑거리는 그것을 챙겨들곤, 우선 편지의 내용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음.
“누님.”
“응?”
“우리 가문 비고에 있는 보물들을 좀 확인해봐야겠는데.”
“으응. 뭐가 필요하대?”
‘밤의 장막’과, ‘달의 눈’과 ‘태양의 눈’, 거기에 ‘별자리의 뒷편’까지. 누나가 보내준 편지에 적힌, 의식에 필요한 보물들의 목록이었다.
‘태양의 눈’과 ‘달의 눈’은 의식을 위한 간이 신전을 만들기 위해, ‘밤의 장막’과 ‘별자리의 뒷편’은 의식 중 바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천칭의 계약은 세계의 법칙인 천칭을 통해 진행되기에, 마찬가지로 법칙에 묶여있거나 세계의 질서를 관조할 수 있는 존재들, 즉 천계의 신격들과 마왕은 계약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고.
현재 칩거 중인 바알이라지만, 대놓고 눈에 보이는 곳에서 의식을 진행했다간 어떤 방해가 들어올지 모르니 놈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물건은 필수적이었다.
다만 ‘보물’이라고 볼 수 있는 위의 네 개를 제외한 그 외의 것들은 옵시디안의 조력을 통해 대부분 다 모았으나, 아무래도 테일러 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위의 네 개는 나의 도움을 구하는 듯 했다.
내가 읊는 목록들을 듣더니 눈가를 찌푸린 누님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밤의 장막이랑 달의 눈은 우리 비고에 있을텐데…. 태양의 눈은 모르겠구, 별자리의 뒷편은 드라쿨레아가 가지고 있을 거야.”
“그래?”
나머지 둘은 어디서 구해야 하지. 내가 난처해 하고 있자, 옆에서 조심스럽게 소매를 당겨온다.
아이리스였다.
“왜?”
“태양의 눈은 황궁 보물고에 있는데요….”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피던 아이리스가, 슬쩍 나를 유혹하듯 허리를 배배 꼬더니.
“그, 제가 드릴 순 있는데, 음.”
잠시 말 끝을 흐리곤. 누님을 한 번 흘겨본 다음, 발 뒷꿈치를 세워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에 못한 거 다음에 두배 세배로 해줘야 해요.”
그렇게 말하곤, 자기가 말해놓고서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도도도 도망가버리는 게 아닌가.
자기 방인데도 나와 누님을 내쫓는 게 아니라 자기가 나간다는 점에서 아이리스의 심성이 엿보이긴 했지만.
“참. 당돌한 아가씨네?”
소곤소곤 말하긴 했어도, 이미 오러 마스터인 누님의 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꽤나 기분이 불편해진 듯 입은 웃으면서도 눈은 오싹할 정도로 무표정인 누님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나는 여기서 황녀가 나중에 받을만큼 미리 받아둘래.”
“…어차피 또 할 거잖아.”
“그럼 내가 황녀보다 많이 하는 것 뿐이지, 뭘.”
이런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여기 아이리스 방인데?”
“흥.”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 친 누님이, 우리 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그림자 속의 아공간에서, 은은하게 불빛을 밝히는 등불 속에서, 누님이 나를 덮쳤다.
“오랜만인데 그냥 넘어갈 줄 알았니?”
“잡아먹히겠네, 이거.”
잡아먹혔다.
*
황실에 잠입하듯 들어온 누님과, 아이리스와 함께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둘의 사이는 좋은 듯 나쁜 듯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내가 없을 때는 나름 사이 좋게 지내는 듯 하면서 꼭 나랑 있을 때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또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냐? 하면, 내 앞에서 신경전을 벌일 때도 선을 넘지는 않고 되려 은근히 선의의 경쟁 같은 느낌이어서, 둘 사이를 중재하기도 애매했다. 싸우는 것도 아닌데 끼어들었다간 나만 된통 바가지를 긁힐 것 같아서.
지금도 그랬다.
“스칼렛. 마사지 해줄까? 누나, 예전에 스칼렛이 해준 마사지가 너무 좋았어서, 누나도 해주고 싶어.”
기억난다. 마사지 받으면서 좋다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해댔었다. 생각하니 좀 꼴렸다.
“저, 저도 잘해요. 신성력 마사지 좋아요. 오빠도 받아볼래요?”
반대편에서 아이리스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흠, 신성력 마사지라.
곰곰히 생각 중이었는데, 반대편의 누님이 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빛과 태양의 여신한테서 받은 신성력으로 마사지라니. 우리 동생 아프게 할 일 있어요?”
“아, 읏.”
아이리스의 동공이 떨렸다. 어쩔 줄 몰라하며 나를 쳐다보길래, 나는 웃으며 아이리스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괜찮아.”
실제로도 괜찮다. 진조가 된 이후로는, 햇빛이고 신성력이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리 추기경이 된 흡혈귀가 있다지만, 그건 신앙심이 육체의 제약을 이겨낸 경우인데.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달래주자 아이리스가 정신을 차리고는, 샐쭉 누님을 노려봤다.
“괜찮으시대잖아요!”
“어머. 몰랐네.”
몰랐을 리가 없다. 픽 웃는 눈꼬리를 보아하니 아주 고의였다. 아이리스도 그걸 알았는지 아예 쌍심지를 켰다.
그러다, 아이리스도 여유롭게 웃더니, 누님을 도발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돼선 오빠 체질도 몰라요? 어머,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빠직.
누님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나는 난처해져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차례대로 마사지 해볼래?”
대타협이 이루어지고, 아이리스가 먼저 하기로 해 내 등 뒤로 올라탔다.
꾸우우욱.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내 등을 눌렀다.
“윽.”
절로 나오는 신음. 다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 완성돼 있는 진조의 육체여서 그런지. 실제로 누님을 예전에 마사지 했을 때도, 누님조차 고통은 쉽게 잊고 즐기지 않았나.
즐기다 못해 은근 발정나서 나를 유혹하는 듯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덮치는 게 맞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아무튼. 부드럽고, 또 섬세하면서도, 근육을 풀어주는 강인한 손길이 내 등과 어깨를 오갔다. 사이사이 내 몸에 스며드는 신성력이, 뭉클뭉클 내 안에 깃들어, 몸의 활력을 돋구는 듯 전신을 휘감았다.
“괜찮아요, 오빠?”
아무래도 아까 누님이 했던 말이 신경쓰였는지, 신성력을 보내면서도 내 걱정을 하는 아이리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말 없는 대답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아이리스가 신나서 마사지를 이어갔다.
딱히 젤도 없고, 그냥 손으로 꾹꾹 주무를 뿐이라 안마에 가까웠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리스가 땀을 닦으며 내 등 뒤에서 내려왔다.
뒤이어 누님이 흥흥 코웃음 치며 내 등 위로 올라타려 할 때.
“주군.”
그림자 속에서 까마귀가 다급히 올라왔다.
“뭐니?”
자신의 차례가 끊긴 누님이 언짢아 하자 까마귀가 움찔 떨었지만, 아무래도 급한 사항인 듯 했다. 그는 누님의 날카로운 눈치에도 물러서지 않고서 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뭔가?”
내가 대답을 재촉하자, 까마귀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 에드윈이 악마와 접촉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크게 웃었다.
낚였구나 이 새끼.
“내 차롄데….”
정작 누님은 아쉬워 죽으려 하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