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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03화 (103/199)

〈 103화 〉 펠그리온 (2)

* * *

다음날.

길드에서 준비해 준 길잡이와 합류했다.

길잡이는 실버라는 등급에 걸맞게 상당한 실력자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묵묵히 우리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드래곤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으면서, 산맥에 존재하는 드래곤의 영역을 하나씩 확인하고 싶다니.

그런 해괴한 의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마 우리 뿐이겠지. 길잡이 역시 상당히 의문인 듯 했으나, 프로는 프로. 사적인 감정은 배제한 듯 했다.

“의뢰는 우리가 원하는 드래곤의 영역을 찾을 때까지. 의뢰 완수 이후엔 산맥을 내려가도 좋다. 이해했나?”

길잡이가 조건에 동의하는 것으로, 임시 파티가 꾸려졌다.

길잡이는 우리를 이끌고 산맥으로 진입했다. 산맥의 초입, 은근히 들떠 있던 아이리스도, 순식간에 달라진 자세를 보였다.

용사 특유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갈무리 되고, 모험의 두근거림에 설레던 소녀의 얼굴이 전사의 것이 된다.

그 빠른 변화에, 길잡이도, 그리고 아이리스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누나도 놀란 눈치였다.

누나가 나한테 작게 속삭였다. 마치 아이리스는 듣지 말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는데, 어차피 초인인 아이리스의 귀를 속일 수 없음을 생각하면 그냥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영 맹탕이길래 걱정했었는데. 안 그래도 되겠는데?”

“다 들리거든요!”

예상대로, 목소리를 낮춘 아이리스가 발끈하더니, 투덜거리며 다시 진형을 갖췄다.

진형이라고 해봤자, 전위이자 탐색꾼인 길잡이. 그 뒤에 서 정령으로 길잡이를 보조해주는 누나. 정해진 건 이렇게 둘 뿐이고, 나와 아이리스는 적재적소에 맞춰 움직일 수 있게 거리를 유지하는 수준 뿐이지만.

게다가 애초에 드래곤 말곤 위험할 것이 없는 곳이다.

파티는 평화롭고 조용히 산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

“으와아. 얼마나 걸은 건지 모르겠어요….”

한참이나 그렇게 걸었더니, 체력적으론 멀쩡해 보여도 지루함에 지친 듯 아이리스가 늘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자세는 갖추고 있어서, 나는 뭐라 말하는 대신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으으응.”

그나저나, 이제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단아하고 정숙한 모습을 연기하던 아이리스가 누님이나 누나 앞에서는 꽤 편히 구는 듯 했다.

아무래도 ‘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서인지.

어쨌거나 솔직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누나랑 사이 좋게 지내렴.”

“네, 네엑? 왜요?”

그렇게까지 질색할 건 없는데.

“으흥흥….”

누나의 눈꼬리도 살짝 떨렸다. 조금 빡친 듯 했다. 나는 난처히 웃으며 아이리스의 뺨을 꼬집었다.

“아하요….”

그런 느낌으로 한참을 더 산맥 안쪽으로 나아간다. 처음엔 그래도 지루하다며 조잘조잘 떠들던 아이리스 역시 입을 다문 지 오래 되었다.

“후욱.”

길잡이가 거친 숨을 뱉었다.

용의 산맥. 드래곤을 제외하면, 위험한 마물은 없다.

그런데도 용의 산맥이 악명을 자랑하는 이유는, 그 험난하고 지저분한 지형 탓이다.

미로처럼 꼬인 산길과, 가파른 경사, 거기에 꼬박꼬박 등장하는 까마득한 절벽 따위.

이따금 나타나는 협곡은, 구불구불 파여 있는 형태가 꼭 거대한 이무기가 몸을 뒤틀어 생긴 형태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길 다니는 모험가들은, 용이 되지 못해 분노한 이무기가 난동을 부린 곳이라 표현합니다.’

길잡이의 설명이었다.

그런 산맥에서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다. 나나 아이리스, 누나와 달리 길잡이는 실버 등급의, 베테랑 모험가일지언정 한계를 벗어난 초인은 아니었다. 지치는 게 당연했다.

보통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산맥을 찾는 모험단은 대개 규모가 꽤 있어서, 길잡이들의 페이스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 해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잠깐 쉬겠나?”

내 말에 복면을 쓴 길잡이가 돌아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그는 살짝 숨을 몰아쉬곤 고개를 저었다.

“첫 목표에 거의 다 왔습니다.”

쉰다면 그곳에 도착한 뒤에 쉬겠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고갤 끄덕였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에, 아이리스와 누나의 얼굴에 긴장이 스몄다. 만일 이 앞에 있는 게 우리의 목표인 펠그리온이라면.

“…야.”

입술을 달싹거린 누나가, 길잡이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그 새낄 꼭 죽여야 해? 나중에, 어? 같이 싸울 애들 모아가지고….”

“시간신전에서 성물 들고 나오면, 그 탐욕스런 새끼가 모를까?”

누나가 입을 다물었다.

독기와 오염, 저주의 종족인 블랙 드래곤에게 용의 산맥은 보금자리로 적절하지 않다.

정확히는, 산맥 자체는 물론 보금자리로 삼기에 좋지만, 대신 대륙 전체에서 드래곤이 가장 많이 진을 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레드건 블루건 그린이건, 가리지 않고 블랙과는 사이가 나쁘다. 심지어 레드와 블루는 서로 싸우다가도, 블랙 드래곤이 보이면 가서 합심해 시비를 틀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블랙 드래곤이 퍼뜨리고 다니는 ‘드래곤 피어’에, 저절로 묻어나오는 오염 때문이다.

나름 질서의 수호자랍시는 드래곤들 사이에서, 가만히 숨만 쉬어도 주변을 오염시키는 블랙 드래곤은 눈엣가시다.

차라리 그들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를까, 거의 모든 종족의 드래곤이 적어도 대여섯마리 씩은 살고 있는 이 산맥에서 블랙 드래곤이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산맥에서 가장 영향력 큰 엘더 드래곤이, 블랙과 상극인 화이트인데?

그건 다른 드래곤 모두를 이길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시간신전의 성물?”

“그거 말고 뭐 있겠어.”

블랙 드래곤 펠그리온은 시계열을 거스르고 싶어하는 이단아다.

오직 그것만을 바라고 마왕에게 빌붙은 놈이기도 하고.

“여기 진 치고 사는 것도 신전에는 자기가 직접 못 들어가니까 그런 거겠지.”

혹시나 있을 기회를 찾기 위해.

나는 심드렁히 말했다.

“그럼 그냥 가는 길에 잡아 죽이는 게 나아.”

“…그렇지. 음.”

누나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는 사이, 앞서 나가던 길잡이가 우뚝 멈춰 선다.

그가 뒤돌아 보며 말했다.

“여기가 첫 번째 영역입니다.”

나는 슬쩍 내부를 들여다 봤다. 마치 여기가 경계라는 듯, 길잡이가 선 곳 바로 너머에서부터 뜨거운 불의 마나가 결계처럼 둘러져 있었다.

“보통 사람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겠는데.”

길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나서야 경계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여간에 질서의 수호자라면서 성격 하나 더러운 것들이다.

“여기는 아닌 것 같은데.”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의 영역이네.”

“그럼 잠시 쉬었다 가는 걸로 하죠.”

아이리스가 말하고, 내가 긍정하자 길잡이가 근처 나무 아래로 가 털썩 앉아서 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체력이 거의 방전된 것 같은데.

나는 아공간에서 포션을 하나 꺼내줬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저 길잡이도 개인적인 사정이란 게 있을테지.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자기 할 일만 똑바로 하면 보수만 주면 되는 관계이니.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휴식하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여기는?”

“아니네.”

그린 드래곤의 영역. 수풀이 우거졌다. 들어갔다간 미아 되기 십상으로 보였다.

“여기.”

“춥네. 들어가면 얼어붙겠다.”

블루 드래곤의 영역. 커다란 호수를 두고서 사방이 얼음과 눈보라로 감싸여 있었다. 길잡이 수준이 들어갔다간 5초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죽으리라.

“일단 하룻밤 잘까.”

밤이 늦었으므로 잠을 자기로 했다. 불침번은 우리 셋이서 서기로 했다.

솔직히 우리 일행은 굳이 잘 필요 없으나, 순전히 길잡이의 체력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길잡이는 순순히 우리 일행의 호의를 받아들여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하루만에 찾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

“이 넓은 산맥에서 말이야.”

보통 커다란, 다른 지역이었다면 그 지역의 영산으로 불릴 법한 산봉우리 하나씩을 당연하다는 듯 차지하는 드래곤들이 수십이나 살아가는 곳이었다.

빨리 찾는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한 일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러다 한 일주일 걸리는 건 아니겠지?”

“괜히 그런 소리를.”

누나의 설레발에 핀잔을 줬다. 설마 그렇게까지 걸리겠는가.

….

그리고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블랙 드래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그, 죄송합니다.”

“아니. 그대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 다음에 발견한 드래곤의 영역.

이번에는 슬슬 나오겠지, 하는 마음에 살펴본 결과.

“이 씨발 레드만 몇 번째야!”

누나가 폭발했다.

분노한 계약자의 감정에 반응하는 정령들. 순간 산맥의 자연이 울렁거렸다. 이미 산맥에 들어와서도 수십의 정령과 계약한 누나였다.

이제 슬 계약한 정령의 숫자가 백을 넘어 정령 군단을 꾸려도 이상하지 않을 대정령사의 분노에 땅이 뒤흔들렸다.

영역 너머의 드래곤을 자극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누나를 말리려던 찰나.

‘…?’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

나는 영역을 긋는 경계, 마력의 장막에 가까이 다가섰다.

길잡이와 아이리스가 기겁하는 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마력 장막의 표면을 살짝 긁었다. 카가각….

은은하게 퍼지는, 불쾌하고 지독한 잔향….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봐.”

“예, 예?”

나는 아공간에서 백금화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선금은 이미 받았을테니. 의뢰 완수금이다. 주머니 안에 귀환 스크롤이 있을테니 당장 찢어.”

마력 장막을 긁는 것으로, 안의 놈이 나를 눈치챘을 것이다.

내 말에 심각성을 느낀 길잡이가 재빠르게 스크롤를 꺼내 찢어, 백금화 주머니와 함께 사라졌다.

“뭐, 뭔데? 왜?”

겨우 분노를 진정시킨 누나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채근했다.

나는 픽 웃었다.

“이 미친새끼. 화룡 하나를 씹어삼켰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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