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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04화 (104/199)

〈 104화 〉 펠그리온 (3)

* * *

블랙 드래곤, 펠그리온.

엘더 급인 산맥의 주인 다음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고룡.

게다가 보아하니 레드 드래곤 하나를 씹어삼킨 것 같은데, 지금의 놈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쉽게 감이 잡히질 않았다.

“어쩌면 지금은 물러나야 할 지도 모르겠는데.”

기억을 되찾는 건 뒤로 미루고, 일단 드라쿨레아에 가서 시련부터 클리어 한 다음, 누나의 말대로 함께 싸울 이들을 모아 토벌하러 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당장 우리 셋이서 엘더급, 혹은 그보다 약간 모자란 수준의 놈을 토벌하긴 힘드니까.

내가 ‘진조’로써 완전해진다면 혼자서도 승부를 볼 수 있을테지만.

당장은 혼자는커녕 셋이서 싸운다 해도 무리였다.

아니면.

“…누나.”

“어. 어어. 왜?”

“산맥의 주인한테 도와달라고 해야겠는데.”

로드를 제외하면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드래곤이 바로 이 산맥의 주인이다. 그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펠그리온을 토벌하는 게 한층 쉬워지겠지.

“그놈이 도와줄까?”

“화룡 한 마리가 죽었다고 전해. 아직 어린 놈이라고.”

산맥의 주인은 일만년 가까이 살아왔기 때문인지, 쉽사리 그 커다란 덩치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수명이 거의 끝나가며,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는 강력한 힘과 대조적으로, 늙은 육신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굳이 몸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며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다.

당장 화이트와 가장 상극인 블랙이 산맥에 숨어있는데 방치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원래는 놈에게 도움을 바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게 굴지 말라며 호통이나 들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펠그리온, 그 검은 도마뱀이 동족잔상을 벌였다.

게다가 결계를 통해 느껴지는 마력의 질감을 보아하니, 아직 숙성되지 않은, 어린 놈의 마력 형질이었다.

적어도 성체급의 정교하고 촘촘한 느낌은 없었다.

당장 이곳까지 오며 봐 온 레드의 영역이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었다.

“헤츨링이 죽었다고 하면 아무리 그 늙은이라도 눈 뒤집혀서 올 거야.”

“…근데 이 넓은 산맥에서, 어떻게 찾아요?”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리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산맥의 주인은, 그 이름답게 산맥 전체의 영맥과 연결 돼 있다. 그러니 더더욱 움직이기 귀찮아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령들을 보내 영맥에 접촉시켜 의사를 전달하면 될 거라고 설명하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정령들을 움직였다.

더럽게 넓은 산맥이니만큼,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놈이 움직여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준비해.”

“아. 진짜.”

결국 여기서 그 고룡을 죽여야 하는구나. 누나가 한탄했다.

하지만 지금이 제일 적기였다. 오히려 헤츨링 하나를 씹어삼키며, 영격 자체는 올랐을지언정 아직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균형이 잡히지 않았을 지금이.

쿵.

쿵, 쿵!

수십의 정령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펠그리온의 영역에서부터 커다란 울림이 시작됐다.

아이리스는 긴장한 기색으로 성검을 들었다. 옵시디안이 실체화 해 누나를 감쌌다.

나 역시 수십의 흑점(??)을 생성해냈다.

동시에.

「하찮은 것들이─!」

긁는 듯한 표효. 전신이 저릿할 정도로 강렬한 드래곤 피어.

콰앙!

저 너머에서부터, 영역을 지키듯 전개 돼 있던 마력장막이 폭산했다.

“산맥의 주인이 올 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펄럭─!

커다란 날개를 펼친, 저주 받은 드래곤이 날아올랐다.

보통의 블랙 드래곤이 뚝 뚝 흘리는 독기와 달리,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 놈의 입가에서 피어올랐다.

놈의 가슴팍에서 마력이 강렬하게 요동쳤다.

브레스의 전조였다.

“아이리스.”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성검을 들었다. 블랙 드래곤의 독기에 맞서기에 신성력만한 게 없었다.

피어오른 환한 빛. 나는 생성해뒀던 흑점들을 연결해 반투명한 막을 전개했다.

「흡수」 「수호」 「정화」.

아이리스의 신성력을 ‘흡수’하고, 놈의 브레스로부터 ‘수호’하며, 그리고 그 독기를 ‘정화’하기 위한 방어막였다.

거기에 더해, 특히 결계에 특화 된 최상급 정령인 옵시디안이 한층 배리어의 수준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배리어의 유지를 맡았다.

배리어가 완성됨과 동시에.

쿠아아아아아아───!

결계 너머로 전해져 오는 열기. 화룡의 심장을 삼킨 덕인지, 독기 뿐 아니라 불꽃의 열기까지 상당했다.

단순한 독브레스가 아니라, 독과 저주를 담은 흑염(??).

그것이 드래곤의 가공할 마력에 힘 입어, 레이저처럼 일직선을 그리며 배리어를 두들겼다.

콰앙───!

브레스와 배리어가 부딪쳤다.

거대한 힘이 담긴 공격에 부서질 듯 흔들리면서도, 아이리스의 신성력과 나의 고유특성, 거기에 최상급 정령이 합심해 만든 배리어였다.

“크읏!”

옵시디안의 계약자로서, 배리어를 유지시키는 중인 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마법진을 떠올렸다. 허무의 속성을 지닌 내가, 「부여」를 사용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마법은 많지 않았다.

그러니 괜히 속성에 맞지 않는 마법을 「부여」를 사용해가며 사용하기보단, 내 속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배리어가 놈의 브레스를 견디는 동안 허공에 수십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고정 포격. 「허무」

마법적 현상을 일으키는 대신,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박아 포격을 쏘는 형태.

1랭크 마법, 「마력 화살」의 덩치를 키운 것과 같았다.

화르륵.

때마침 브레스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이놈들, 이제 보아하니 산맥에 들락거리는 인간들은 아니구나.」

자신의 브레스가 막히자 놈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쪽을 탐색이라도 하듯 살피는 기색이었다.

펠그리온이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었다. 나는 허공에 생성해둔 포격 마법진의 숫자를 조금씩 늘리며 놈을 올려다 보았다.

「흡혈귀가 하나. 정령사가 하나. 거기에….」

우리를 훑어보던 놈의 눈동자가 고정 됐다. 아이리스의 성검에 못이라도 박힌 듯 시선이 떠나질 않았다.

거대한 용의 몸뚱이가 떨렸다.

나는 직감했다.

놈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

「가증스런 여신의 종자가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느냐──!!」

크아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피어에, 아이리스가 긴장한 기색으로 검을 다잡았다. 스칼렛은 주저 없이 포격을 시작했다.

키잉.

스칼렛은 제 몸에 가득 차 있던 마력이 상당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상관 없었다. 수십 개의 포격 중 하나라도 놈의 거체에 유효타를 먹인다면, 그의 마력 특성 상 치명타로 이어질 수 있을테니까.

「절대 살려보내지 않겠──!」

콰아앙─!!

증오 서린 외침이 이어지던 와중, 다발적으로 쏘아지는 포격이 순식간에 펠그리온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블랙 드래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위력을 높이기 위해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박은 듯 한데, 단순히 위력이 높기만 해서는 용의 비늘을 뚫지 못한다.

보다 격 높은 힘이 담겨 있어야지만, 비로소 용의 몸에 상처 낼 수 있음이라.

그렇기에 펠그리온은 수십의 포격을 무시하려 했다. 그보다는, 그의 몸에 상처 낼 수 있는 무기인 성검에 오히려 시선을 보냈다.

──!!

「크윽?!」

순간. 본능적인 경고가 펠그리온을 자극했다. 그것은 모든 드래곤 하트에 담긴, 위험을 감지해내고 회피하는 기능이었다.

먼 옛적, 일만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의 기준으로도 먼 옛적이라면 정말 까마득한 신대의 시절.

종족 특유의 강력함 탓에 위기감 없이 살던 그들이, 달의 여신의 신전을 침범했다가 그녀에게 드래곤 다섯 마리가 사냥당한 이후 만들어진 기능이었다.

삐───.

콰드드득!

「─큭!!」

아슬하게 거대한 몸체를 비틀어, 포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늘이 뜯겨나가고, 지나간 자리엔 아예 공간이 비틀려 있다. 날개를 다쳤는지 펠그리온의 거체가 살짝 내려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스칼렛이 혀를 찼다.

“죽일 수 있었는데.”

이번 공격 이후로는 스칼렛 역시 경계 대상에 올라갈테니, 첫 일격이 가장 좋은 기회였다.

물론 스칼렛 역시 드래곤 하트에 달린 기능을 알고 있으니만큼 실패할 확률이 크다 여겼고, 그런 의미에서 셋이서 고룡을 공략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일격이 통한다면 혼자서도 충분하겠지만.

결국 실패했으니, 이제는 정말 시간을 끌어야 했다.

스칼렛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날개를 다쳤으니 조만간 내려올 거야. 그때까진 방어만 해.”

마력으로 비행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끝 없이 마력을 충전해주는 드래곤 하트가 있다지만, 회복할 틈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격렬한 전투 중 비행에 상당량의 마력을 할애하기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밑에서 버티며 놈이 내려오길 기다린다.

스칼렛의 말에 아이리스와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쾅! 쾅!

펠그리온의 공격이 몇 번이고 배리어에 막혔다. 허공에서 때리는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분개한 용이 독기를 뿌려 주변의 땅을 오염시키자, 아이리스가 신성력을 퍼뜨려 정화하는 것으로 막아냈다.

점점 시간이 흐르자, 펠그리온도 저 아래 침입자들의 의도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잔꾀를 부리기는!!」

흑룡이 포효했다.

이윽고 비행을 포기한 흑룡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왔다. 다친 날개에서 독을 품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오빠.”

스칼렛이 땅에 내려온 흑룡을 상대로 움직이려 할 때, 아이리스가 한 발 앞서 나섰다.

“…제가 해볼게요.”

찬란히 빛나는 성검을 든 채.

“지금이어야 할 거 같아요.”

쿵 쿵. 아까부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에, 숨을 작게 몰아내쉬며.

“지금이, 제가 벽을 넘을 시기인 것 같아요.”

흑룡의 앞에 섰다.

고대로부터, 사악한 용을 처치하는 것은 선택받은 용사이기에.

아이리스는 굳은 얼굴로 성검을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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