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드래곤 하트 (2)
* * *
어찌어찌. 내 가랑이에서 자꾸 눈을 떼지 못 하는 아이리스를 달랬다. 칼리아의 두 눈이 꼭 나를 한심스럽게 보는 듯 했다.
「정 정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내가 알아서 정해주겠다….」
늙은 용이 지친 듯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 재물에 욕심이 없는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그대는….」
현기를 띤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대가 아니라 용사에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만…. 약속은 약속이니 내어주마.」
어차피 용사인 아이리스가 나의 일행이었다. 칼리아 역시 그것을 알기에 크게 고민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지금 바로?”
늙은 용의 선언에 내가 되물었다.
내가 받기로 한 것이 다름 아닌 드래곤 하트라는 점에서, 나는 그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줄 용의가 있었다. 칼리아도 나도, 그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억지로 며칠 더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가 당황하는 게 우스웠는지, 늙은 용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조용하고 안락한 마지막을 위해 해온 노력이 있는데.
드래곤에게 있어 조용히 자연으로 되돌아 가는 최후의 순간은, 모든 개체가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당연하게 맞이해야 할 마지막’이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의 자연물로써 세상의 변화를 느릿하게 관조하며, 끝내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 가는 것.
칼리아 역시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지 않았나?
늙은 용이 말했다. 나의 의문을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그대가 늑장 부릴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 정돈, 이미 알고 있었다.」
「늙은이의 개인적인 고집과 욕심을 위해 그대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기엔, 그 어깨에 짊어진 게 참으로 많구나.」
나는 그가 내 몸에 걸린 시간 제한을 알아봤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도 빠듯하게 맞추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칼리아는 그런 나를 배려해준 듯 했다.
그의 몸이 희미한 빛에 감싸였다.
툭, 툭, 용의 비늘이 떨어졌다. 워낙에 거대한 몸집이어서인지, 비늘 하나하나가 무척 커다랬다.
「미리 전해주어야겠지.」
몇 장의 비늘이 형태를 바꿨다. 아이리스의 몸에 맞춰서, 고급스런 원단으로 지어진 제복의 형태를 갖췄다.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을 써서인지 아이리스의 머리색과 어울리는 새하얀 제복이 되어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건….”
엘더급 드래곤이 스스로의 비늘로, 직접 만들어내 준, 세계에 단 하나 뿐일 보물.
제국의 보물고를 뒤져봐도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몸에 착 달라붙는 제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려다 본 아이리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내어준 비늘을 제외하고선, 이미 대부분의 마력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드래곤은 하나의 거대한 마력 덩어리다.
그렇기에 진조와 같이, 최고위 정령으로 분류가 가능한 존재들.
늙은 용의 몸을 구성하던 마력이 천천히 자연으로 되돌아 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는 주먹만 한 보석.
그 안에 담긴 막대한 마력.
저것이 바로 드래곤 하트였다.
늙은 용의 두 눈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몸은 거진 대부분 투명해진 채였다. 어쩐지, 정작 반대로 나의 속이 그에게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스윽.
드래곤 하트가 날아서, 내 손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또 한 번 마력으로 변해서, 내 몸에 깃들었다.
막대한 마력이 나의 몸을 휘감는다.
「그대들이. 세상을. 구할 수. 있기를.」
뚝뚝 끊기는 목소리.
그것이, 일만 년이 넘게 살아온 늙은 용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파앗…. 그리 눈부시지도 않은, 은은한 빛무리가 그의 몸을 빛내곤, 천천히 자연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빠.”
아이리스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내가 대답 대신 그녀를 보자, 아이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꼭 성공해요.”
그래.
그러자.
*
드래곤 하트를 얻어, 막대한 마력을 얻었다곤 하나,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내 몸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고, 기억마저 불완전한 상태였으니.
그래도 드래곤 하트의 막대한 마력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구적으로 손상되었던 내 힘을 회복시켜주었던 ‘최초’를 마셨던 때처럼, 잠재력이 개방 된 듯 했다.
거기에 마력이 큰 폭으로 늘었다거나.
특성에 「노심(S+)」이 생기기도 했다. 아직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S+랭크지만, 제대로 몸에 소화시킨다면 SS랭크로 승격할 예정이다.
거기에 기억을 되찾아 「아크 메이지」에서 「그랜드 메이지」로 승격하고 나면, 잃어버렸던 스펙,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일단 해야 할 일들이 많긴 했지만.
그 외에도 몇 가지.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코나가 누나와 계약했다.
「칼리아 님과 함께 하던 보금자리를 떠나는 건 마음 아프지만…, 칼리아 님도 저한테 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하셨으니까요!」
밝게 웃으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있는 코나의 손을 누나가 꼭 잡았다. 내가 신경을 안 쓰고 있는 사이 꽤 유대 깊은 사이가 된 듯 했다.
「우오옹….」
왠지 누나의 애정 순위에서 뒷순위로 밀려난 듯 보이는 옵시디안의 구슬픈 울음이 신경 쓰였지만.
뭐, 터주대감이니만큼 알아서 잘 하겠지. 지금이야 코나가 상당히 외로워 하는 듯 해서 챙겨주는 것일테니, 누나도 나중에는 공평하게 대해줄 거다.
“잘 부탁드려요, 코나. 저는 아이리스라고 해요.”
「와! 잘 부탁드려요! 그러고보니 저희는 이게 첫인사네요!」
아이리스와 코나도 정답게 인사를 나눴다. 둘 다 성격이 좋은 편이라 잘 지내겠거니 했다.
“다들 준비는 다 됐지?”
아이리스는 그 며칠 사이 마스터의 초입에서 벗어나 슬슬 완성된 마스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력 소모가 심하던 ‘검의 영역’을 펼치는 것도 이전보다는 수월해졌고, 그 상태서 다섯 번째 검을 사용하는 것도 익숙해진 듯 했다.
새끼용 뿐 아니라 성체급 드래곤을 몇 번 상대하며 비약적으로 실력이 상승한 것이다.
지금 수준이라면 아마 레티 누님과 싸워도 호각, 혹은 레티 누님이 정체된 상태일 경우 아이리스 쪽이 우세일 것이다.
누나는 말할 것도 없이 최상급에 가까운 코나와 계약했다. 산맥에 들어와서 계약한 수십의 중소정령들보다도, 코나 하나를 얻은 것이 최고의 성과였다.
특히 그녀가 처음으로 계약한 최상급 정령인 옵시디안과도 상성이 최고이니만큼, 그 시너지는 더 좋겠지.
거기에 나는 드래곤 하트를 얻었다.
일행의 컨디션은 최고에 가까웠다.
“가자.”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서, 우리는 칼리아의 영역을 나섰다.
「와아! 저 여기 밖으로 나가는 건 처음이에요!」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코나는 무척 들뜬 듯 했다. 그게 꼭 첫 여행이란 단어에 들떴던 아이리스처럼 보였다.
“좀 닮지 않았어?”
“네? 뭐가요?”
그래서 슬쩍 아이리스 옆으로 가서 말을 걸었다. 아이리스는 신나보이는 코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내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꼬았다.
“너랑 닮았어.”
“…뭐. …무슨 소리예요?”
아이리스가 샐쭉 나를 노려본다.
“애처럼 신나보이는 거 말이야.”
“안 그랬어요.”
“그랬어.”
“안 그랬다니까요?”
이걸 안 했다고 인정을 안 하다니. 보니까 귀까지 빨개진 게 다 알면서도 부끄러워서 우기는 모양이다.
“그래. 안 그랬던 걸로 치자.”
“안 그랬다니까요 정말.”
“알았다니까. 코나랑 달리 아이리스는 어른스러웠던 걸로 해.”
“아 아니라구 진짜!”
옥신각신 아이리스와 투닥거리고 있을 때, 코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여러분! 이거 봐요!」
코나가 우리에게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화룡의 영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꽃을 머금었다 알려진 약초의 꽃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의 영역에서만 평생 살아온 그녀였으니, 생소하고 낯설은 꽃이리라.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 신기한 물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순수한 모습이 귀엽게 보일 수밖에. 아이리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네? 예쁘진 않아요!」
“…네?”
아이리스가 순간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코나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좀 신기하긴 한데, 칼리아님 영지에 있던 설초가 훨씬훨씬 예쁜걸요? 다음 번에 기회가 되면 보여드릴게요!」
“…아, 그렇, 그래요. 네에. 기대되네요.”
아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도 못했던 대답이라 조금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읏.”
코나를 쓰다듬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코나는 다시 포르르 누나 쪽으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자기 계약자는 누나이니까 누나 옆에 있는 게 더 편한 듯 했다.
“옳지. 잘 했어.”
「저 잘 했나요?」
누나가 코나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는 못 들은 것 같지만, 내 귀에는 미세하게 들렸다.
“그래. 둘이 얼레리꼴레리 못하게 앞으로도 네가 잘 막아줘야 해. 알았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루나! 루나는 제 친구니까!」
이런.
하여튼 방심할 수가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