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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21화 (121/199)

〈 121화 〉 시간 신전 (1)

* * *

산맥의 돌파는 어렵지 않았다. 누나가 부리는 정령들이 길을 찾아주기도 했고.

그럼에도 산맥을 넘어서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다른 드래곤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들을 일부러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칼리아의 부탁을 받아 성체급 드래곤 몇을 상대하긴 했지만, 굳이 내 쪽에서 다른 드래곤들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산맥의 지형이 워낙 험준하기도 했다. 마법사답지 않은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는 나나, 애초에 기사인 아이리스와 달리, 누나는 전형적인 정령술사였다.

아무리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움직인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

게다가 누나는 얼마 전까지 마왕의 저주로 아예 걷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저주를 해주하고 체력을 회복하긴 했으나, 그게 험난한 산맥을 돌파하는 데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예 정령을 몸에 강령시켜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흔히 여주인공은 직접 몸 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클리셰 때문인지.

대정령사의 자질을 타고 난 루나 테일러에게 부족한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제 몸에 정령을 강령시켰을 때의 적합도였다.

불가능한 건 아니고, 한 번 했을 때의 효율은 어마어마 하지만, 대신 강령이 끝나고 나서 엄청나게 후유증이 온다고.

덕분에 정령식으로 신체를 어느 정도 강화하거나, 물과 바람과 땅의 정령 따위를 부려 몸을 움직이거나 하는 식으로 움직이는 게 누나의 최선이었다.

대신 누나가 부리는 정령들이 있어 우리가 산맥을 최적의 경로를 따라 움직일 수 있었기도 하고, 잠을 잘 때도 정령들의 도움으로 편하게 잘 수 있었다.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 몇몇만으로도 하룻밤 머무를 캠프가 쉽게 지어졌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산맥을 넘어섰다.

“…와.”

피곤한 얼굴이던 누나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누가 먼저 탄성을 뱉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리스도, 누나도, 그리고 나도. 모두 눈 앞에 드러난 웅장한 신전의 모습에 감탄하고 말았으니까.

시간 신전.

말만 들어보았던, 전설 속에서나 언급 되던 그곳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설마 제가 정말로 시간 신전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제국의 국교이자 대륙 전체에 가장 세가 넓은 태양 신전이나, 그보단 못해도 이름 있는 달의 신전과는 달리, 시간 신전은 그 존재를 아는 이조차 무척 드물다.

아니. 그들조차 시간 신전은 신화의 시대에나 존재하던 것이라 알고 있을테니.

여신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당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도 이렇게 신전에 도착하기는커녕 헤매기만 했을 것이다.

아이리스도 감회가 새로운 눈치다.

용사인 그녀의 입장에서, 여신의 계시를 받아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신화 시대의 신전까지 오게 된 것이니까.

“존나 크네.”

누나가 투덜거렸다.

“여신이 경고해준 건 뭐 더 없어? 안에 존나 위험한 게 뭐가 있다던가.”

괜히 불안한 듯 누나가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아이리스는 딱히 들은 게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었어요.”

“그렇단 말이지….”

여신이 안전을 보증했으니 괜찮겠지.

신전에 들어갔다. 분명 수백 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었을 게 분명한데도, 바닥에 먼지 한 올 없이 깨끗했다.

순백의 신전은 그 자체로 웅혼함을 갖추고 있어서, 감히 신전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품게 만들었다.

특히, 신전의 중앙에 서 있는 여신상을 보고 있자면 더더욱.

“…아.”

아이리스가 멍하니, 탄성을 뱉었다.

“…제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꼭 여신님 같아요.”

태양의 여신, 미트라.

아이리스는 눈 앞의 여신상으로부터, 그녀에게 성검을 내려준 여신을 떠올린 듯 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여신의 목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으니 그런 말을 들어도 별 느낌은 없었다.

“확실히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나와 달리 기억이 온전한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걸 보니 아이리스의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아이리스는 이곳이 더더욱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성물은?”

누나가 신전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이리스는 눈 앞의 여신상에서 여신 미트라를 떠올려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든 말든, 누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성물을 챙기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내 기억을 빨리 찾아주고 싶어?”

“아니거든?”

앙칼진 대답.

칼리아의 영역에서 몸을 섞은 뒤, 조금 태도가 바뀌었나 하다가도, 부끄러운지 오히려 이전보다 틱틱대는 누나다.

그래도 뭐.

“기억 찾는 거 싫어?”

“…아니. 그건 아니고.”

이렇게 찔러주면, 전보단 한풀 꺾여선 내 눈치를 살핀다. 괜히 내가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하는 게 귀여웠다. 내가 이런 걸로 기분이 상할리도 없는데다, 누나가 그럴 모르진 않을텐데도.

사랑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던가.

아무튼 변한 누나가 귀엽기도 하고, 예뻐 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변한 건 누나 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저기요?”

내가 누나와 시시덕 대고 있었더니,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아이리스였다.

“그만 시시덕 대시구 성물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러 가시죠?”

여기서 아니라고 말할만큼 내가 배짱이 있진 않았다.

다만.

“흐응. 왜요? 질투나서 그러나?”

오히려 누나가 코웃음 치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둘은 일단 서로에게 존대를 했는데, 신분상으론 누나가 아이리스에게 감히 반말을 할 수가 없고, 아이리스 역시 나의 누나인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며 겉으로는 존중해주었기 때문이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만큼 큰 갈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둘이 아주 사이가 나빠지진 않았다. 대신….

“질투요? 제가 왜 질투를 해요?”

“그럼 질투가 아님 뭔데요?”

꼬옥. 누나가 내 팔을 세게 당겼다. 아담한 가슴에 닿았다. 좋은 티를 낼 수도 없고, 모른 척 하고 있으니 두 사람의 신경전이 거칠어졌다.

“질투가 아니라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래요? 이렇게 팔짱 끼는 게 부러운 거 아니고요?”

꿈틀. 아이리스의 입가가 떨렸다. 살짝 웃고 있던 눈꼬리에 험악한 기색이 서렸다.

“…글쎄요? 팔짱 껴도 아무것도 안 느껴질 것 같은데. 굳이 부러워 해야 하나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꾸욱….

아프다.

내 팔을 끌어안고 있던 누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서, 내 팔을 부러뜨릴 듯 조이고 있다. 내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몸이었다면 아예 팔이 분질러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나는 누나를 슬쩍 내려봤다.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역린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보였다. 그 틈을 타, 아이리스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렇잖아요? 어디 닿을 게 있어야 뭐라도 느끼지. 안 그래요, 오빠?”

노골적인 도발이자 어필이었다.

슬슬 내 팔에 손톱이 파고들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피를 보게 생겼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서 피가 나는 게 아니라 내 피라는 게 다행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흐응.”

누나가 콧소리를 흘렸다. 가늘게 눈을 뜨고는, 아이리스를 지그시 응시한다. 아이리스 역시 지지 않았다. 눈을 돌리지 않고, 서늘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정적. 겨우 5초 정도밖에 안 되는 침묵이었음에도, 무척 길게 느껴졌다.

“둘 다 그만.”

더 이상 보고만 있기도 영 그래서, 이쯤 끼어들기로 했다.

“흥.”

“쯧.”

둘 다 내가 끼어든 뒤에도 신경전을 벌여봤자 얻을 게 없는 걸 아는지, 영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눈싸움을 멈췄다.

“성물부터 찾자.”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함께 산맥 속에서 동거동락한데다, 두 사람 모두 공과 사의 구분은 철저하니만큼, 감정적으로 조금 상한 일이 있어도 같이 일을 할 땐 철저하겠거니 싶었다.

그럼 같이 일하면서 조금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르고.

물론 내가 따로 케어해주기도 할 예정이기도 했다.

“…그래. 성물부터 찾자.”

누나 먼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아이리스의 동의를 얻은 우리는 신전의 안으로 진입했다.

“위험한 건 없다고 했지?”

“네.”

“이상한데.”

이런 신전에 가디언 같은 게 없을 리가 없는데.

특히 성물을 보관해두는 장소면 더더욱.

내 의문에, 아이리스가 답했다.

“인도를 받아 정당하게 찾아온 거니까, 가디안도 막아서지 않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가.

아무튼 수색을 이어나갔다. 신전이 워낙 넓긴 하여도, 우리 셋 모두 초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으니만큼 성물의 위치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신전의 지하.

시간의 성물을 보관해둔 성소.

“찾았다.”

“저것만 들고 가면 되는 거지?”

오래 걸리지 않고 목표했던 것을 찾아 들뜬 우리가 성소에 진입하려던 그 때.

나는 순간 등골이 저릿함을 느끼곤, 그림자로 누나와 아이리스를 바짝 당겼다.

“막아!”

반사적으로 옵시디안의 배리어가 펼쳐지고, 아이리스의 신성력이 그 견고함을 강화한다.

펠그리온을 상대하면서 합을 맞췄던 연계였다.

콰앙!

배리어가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 강력한 충격이었으나, 배리어는 멀쩡했다.

펠그리온과 싸울 때에도, 고룡의 브레스를 막아냈던 배리어다. 셋 모두 눈에 띌 정도로 성장한 지금이니만큼 배리어가 멀쩡한 것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다만 누가 공격했냐는 것인데.

“…아이리스.”

“…네.”

“가디안이 왜 우릴 공격하지?”

“글쎄요….”

「침입자. 격퇴한다.」

거대한 검과 방패를 든 골렘.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성체급 드래곤 그 이상의 프레셔를 내뿜으며, 신전의 가디언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트라한테 전해줄래?”

“원래 여신님의 귀명을 그렇게 막 부르면 안 되지만… 뭔데요?”

나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일 좀 똑바로 하시라고.”

“불경한 말이지만.”

아이리스가 멋쩍게 답했다.

“마침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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