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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29화 (129/199)

〈 129화 〉 드라쿨레아 (1)

* * *

푹 쉴 생각이었지 이렇게 뒹굴 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미 저질러 버린 걸 어쩌겠는가?

우리는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잠이 깨고 말았다.

밤이 새도록 나와 뒹군 아이리스나,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혼자 자위한 누나.

심지어 누나는 나한테 자위하는 걸 들키기까지 했으니, 잠에서 깬 우리 일행 사이엔 어색함이 감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괜찮은데 누나와 아이리스가 민망해 하는 중이었다.

“….”

“….”

정리를 끝내고, 신전에서 나와 되돌아 가는 길.

어색해 죽을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걷는 아이리스나, 이따금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면 슬쩍 눈을 피하며 정령들과 얘기하는 누나.

쯧, 혀를 차곤, 이대로 둘 게 아니라 일단 뭐라도 말문을 트는 게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어젯밤의 일을 직접 언급했다간 둘 다 아주 부끄러워서 수치사라도 할 것 같으니 최대한 언급을 피해서.

“아이리스.”

“네헷?”

화들짝. 어깨를 떤 아이리스가 나를 슬쩍 돌아봤다. 울망이는 벽안이 내게 애원하는 것 같았다. ‘제발 부끄러우니까 말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나를 애절히 바라본다.

물론 그랬다간 언제고 이런 상황이 이어질테니.

“누나.”

“….”

못 들은 척. 손 위에 올라 탄 작은 정령과 교감하듯 눈을 슬쩍 감는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게 연기에 소질은 영 없어 보인다.

“아이리스가 누나 좀 불러볼래?”

“…아 왜.”

어젯밤 나와 아이리스의 정사를 보며 자위하다가 내게 들킨 누나다. 내가 아이리스를 시켜 말을 붙이려 하니, 곧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나를 죽일 듯 쏘아보는 게 꼭 ‘말하기만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걸 말할 이유가 내게 뭐가 있겠느냐만.

누나 입장에선 확실히 걱정이 될 만도 하겠지. 아무렴 ‘내가 너랑 떡치는 걸 누나가 보다가 나한테 걸렸단다.’라고 내가 아이리스에게 말한다?

만일 내가 누나였으면 혀 깨물고 자살했을지도 모르는 얘기다.

“둘 다 아무 말이 없길래. 지금 우리가 어디 가는 지는 알지?”

“…드라쿨레아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는 드라쿨레아.

체페슈, 노스페라투와 함께 밤의 주인으로 불리는 명가(名家)이다.

다만.

“누나랑 아이리스는 먼저 돌아가.”

“…네? 왜요?”

아이리스가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는 듯 이쪽을 돌아봤다. 방금까지는 부끄러워서 눈도 못 마주치더니, 지금은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며 눈을 크게 뜨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를 돌아보니, 누나 역시 탐탁지 않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왜냐니.

“체페슈의 일이니까.”

정확히는 바알의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 필요한 보물을 빌리기 위함이다.

그것을 아는 두 사람이기에,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체페슈’의 일이라기엔, 아이리스도 누나도 당사자이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드라쿨레아에서 두 사람을 환영하지 않을 거야.”

그렇다.

인간과 교류 하는 것은 체페슈 뿐.

동족과 하인을 늘리는 데에 치중해 세력을 불려 온 노스페라투.

그리고 엘프와 드워프, 웨어울프 등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드라쿨레아.

애초에 원래부터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굳이 인간과 교류까지 하는 체페슈야말로 밤의 일족에게는 별종이나 다름 없다.

어찌 밤의 주인이라 불리는 이가 밤이 아니라 낮의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과 어울리려 한단 말인가?

그런 인식이, 그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자연히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의 혈족에게 인간은 낯설고 먼 존재이다.

그나마 아예 인간을 먹잇감 취급하는 노스페라투보단, 그저 교류하지 않을 뿐인 드라쿨레아 쪽이 아무래도 낫지만.

어쨌든 두 사람을 데려가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그나마 체페슈의 시종으로 오랜 세월 흡혈귀 세력 내부에도 잘 알려진 블랙우드의 딸, 데이지라면 모를까.

“…으응.”

“하기사….”

아이리스는 아쉬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누나는 ‘그러고보니 그랬지….’하며 수긍했다.

“너무 아쉬워 말고 라비타에 가서 워프 게이트로 먼저 돌아가 있어.”

용의 산맥과 이어진 탐험의 도시. 우리가 지나온 곳이었다. 그곳에서 헤어지기로 하니, 막상 두 사람 모두 아쉬움이 얼굴에 서렸다.

“네에….”

“그래….”

얘네를 어떡하지.

하긴 몇 주 동안 아주 꼭 붙어서 잠도 같이 자고 야한 짓도 하다가 떨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쉽고.

하지만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참자. 금방 다시 만날테니까.”

둘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같이 귀환하는 길에 좀 친해지면 좋을텐데.

혹시 싸우지는 않겠지?

*

“빨리 와야 해요.”

“준비 해놓고 있을게.”

라비타의 워프 게이트 앞에서 나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떠나는 순간까지 내 손을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올려다 보던 아이리스나, 툴툴 대면서도 할 일을 해놓고 기다리겠다는 누나를 보니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둘이 돌아가는 길에 싸우지 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겠거니 싶다만.

“안 그래요!”

“그래. 걱정 말고 너나 잘 해.”

아무튼 확답을 듣고 나니 안심이 됐다.

화악! 때마침 빛에 감싸이는 두 사람. 워프 게이트가 작동해, 두 사람의 몸이 사라졌다.

텅 빈 게이트를 슬쩍 보곤, 괜히 허전해진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괜히 기분이 좀 그러네.

그래도 두 사람을 데려갈 순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야 할 일도 있고.

나는 한참이나 두 사람이 있었던 자리를 지켜보았다.

그리곤 자리를 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이곳에서 맞이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

백은발의 머리칼을 치렁이며,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레티시아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돈 후 옆에 선 데이지에게 물었다.

“어떠니, 데이지? 예뻐?”

“음.”

데이지는 신중한 얼굴이었다. 아이리스가 차가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격이라면, 데이지는 차갑기보단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얼굴에 허당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데이지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해 보여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무척 중요한 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는 그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고민 중인 것 뿐이었지만.

“레티 아가씨.”

“응?”

“저희는 놀러 가는 게 아닌데요.”

결국, 데이지가 택한 것은 솔직한 대답이었다.

신이 나서 빙글빙글 돌던 레티시아는 그제서야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 그렇지. 놀러 가는 게 아니지….”

사랑하고 동경하는 동생이 불러서, 동생을 돕기 위해 데이지와 함께 짐을 추리던 중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 신이 나버려선 그만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로 꾸미고 말았지만….

“주인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진 않네요.”

“응….”

아니. 스칼렛이라면 분명 좋아할테지만.

오히려 그 편이 더 미안하다. 비록 신이 나서 무리수를 두긴 했지만, 스칼렛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착한 스칼렛이라면 분명 예쁘다고 칭찬해주리라.

물론 레티시아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입어도 아름다운 자신이다. 이렇게 꾸민다면, 스칼렛의 취향에 맞으면 맞았지 아닐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때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지 않은가.

“다른 걸 찾아보자.”

“네.”

레티시아는 시무룩해져서, 데이지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벗었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서, 그림자 속 남아도는 여분의 아공간에 벗어둔 드레스를 집어넣었다.

언젠가는 입을 일이 오겠지….

“아가씨. 이건 어떨까요?”

“으응? 아, 괜찮다! 활동하기 편해보여.”

기사인 그녀이니만큼,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고는 흡족해 한다.

마찬가지로 무가(?家)의 딸인 데이지 역시, 레티시아가 입을 것만 아니라 자신의 몫까지 챙기는 것을 보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어때?”

“잘 어울려요.”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레티시아는 자신이 걸친 옷을 요모조모 살피더니 화색이 됐다.

“자체수복 능력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하면 그것도 의미 없겠지만.”

“얘도 참! 그런 일이 얼마나 있다고!”

“수련하시겠다면서 최근에 찢어먹은 것만 몇 벌이었죠?”

“으응? 모, 모르겠는데?”

스칼렛은 이번의 여행길에서 급격하게 경지가 오른 아이리스가, 레티시아와 대등해지거나 혹은 그 이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가씨가 체페슈가 아니었다면 진즉 황천으로 건너갔을지도 몰라요.”

“안 건너갔으니까 된 거 아닐까?”

레티시아에게는 「헌신」이 있다.

마음을 바친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특성.

오러 마스터가 되고 나서는 경지의 상승에 그닥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안주하던 그녀였다.

그것보단 동생과의 하루하루가 더욱 좋았으니까.

오러 마스터쯤 되면, 안주하더라도 상관 없는 경지이기도 했다. 수십 년을 보내도 그녀의 발 밑조차 따라오지 못 하는 이들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그녀가 위기감을 느끼는 상대가 생기고 말았다.

마법사라면 상관 없다. 그녀는 기사고, 마법은 그녀가 아니라 동생의 영역이다.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연적은 하나 같이 검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단련을 시작했다.

지난 백년간 단련해온 어느 때보다 더욱 치열하고, 피 튀기도록.

“부러워요.”

“뭐가?”

“저는 그렇게 몸을 굴리면 죽어버리니까요.”

레티시아는 샐쭉 웃었다.

“거짓말.”

“네?”

“그렇게 단련할 수 있어서 부러운 게 아니잖아.”

데이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단련해서, 스칼렛이랑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게 부러운 거겠지.”

데이지가 눈을 감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레티시아는 소리 내 웃었다.

“하여튼 너나 나나 미친년들이라니까.”

“…네.”

미친년들이죠, 우리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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