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드라쿨레아 (3)
* * *
데이지의 고백 아닌 고백. 내게 이마를 툭 대었던 그녀가, 나를 살짝 올려다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죠?”
이거 참.
여기서 어느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말해주는 여자를,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살짝 컬이 들어간 분홍빛 단발 머리에 손을 얹어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데이지는 제 머리색처럼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곤, 내 손바닥에 머리를 살짝살짝 부벼댔다.
“헤헤. 좋아요.”
“…이만 가면 안 될까 우리?”
심기가 불편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린 누나가 우리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흥. 아가씨도 오시겠어요? 저는 아가씨도 좋아요.”
“뭐어…?”
마찬가지로 누님을 돌아본 데이지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누님은 순간 벙찌더니, 아주 싫진 않은 듯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데이지니까 봐주는 거야.”
“네에.”
누나와 아이리스였다면 신경전이 아주 치열했을텐데, 원래부터 사이 좋은 두 사람이어서 그런가.
다툼이 있을 법 하다가도 한 쪽이 먼저 양보를 해주니 딱히 갈등이 없는 모습이다.
일전에 셋이서 해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내 여자들의 사이 좋은 관계를 위해서 고민에 잠겨 있자, 누님의 손이 내 뺨을 쭉 꼬집었다.
“윽.”
“다른 여자 생각하기 있기 없기?”
끄덕끄덕. 데이지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내 품에 안겨서 그렇게 엄한 얼굴 해봤자 하나도 무섭지 않지만, 아무튼 잘못한 건 맞으므로 고개를 끄덕….
“…다른 여자 생각한 건 어떻게 알았어?”
“유도심문이었는데. 진짜로 했구나?”
“아니 그럼 확신도 없는데 뺨을 꼬집─.”
꼬집.
화끈한 통증이 뺨에서 느껴졌다. 한 쪽은 누님이, 한 쪽은 데이지가 죽죽 당기고 있었다.
“바람둥이 동생 같은 건 이렇게 마구 꼬집어 버려도 돼.”
“맞아요.”
합심이라도 한 듯 똑같이 고갤 끄덕끄덕 하는 두 사람.
“미안해. 많이 서운했어?”
“으, 응? 아니…. …그냥 장난으로 한 소리잖니! 데이지가 맞장구 치는 바람에!”
“제, 제 탓이라구요? 아가씨가 먼저 하신 거잖아요…!”
꼬옥. 안아주며 사과하니 되려 당황하는 건 두 사람이다.
사실은 장난이었다. 괜찮다. 당황하며 그렇게 말하는 누님과 데이지.
“그래도. 꼭 지금 일만 아니어도, 이것저것 다 합쳐서 말이야.”
“….”
꿋꿋이 사과하자, 그제야 둘은 입을 다물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이래도 돼?’하고 묻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이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심 아닌 척 해도, 실상은 나한테 어느 정도 불만이 쌓여 있다는 것을.
어찌 됐든 나한테 불만이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장난식으로라도 내게 불만을 표현한다는 게 다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마저 장난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니까.
“고마워.”
“…뭐가?”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누님. 꼼지락, 불안한 기색이 엿보여서, 고개를 숙여 하얀 이마에 입술을 포갰다.
“읏.”
“전부 다.”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나를 훔쳐보며, 내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주인님.”
“응?”
“저는요?”
기대감에 반짝거리는 눈동자.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기대 어린 표정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지한테도 고마워.”
쪽. 누님에게 해줬던 것처럼, 데이지의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데이지는 살풋 웃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총총 떨어졌다.
그리곤 제 앞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핀을 맞춰 고정한 뒤, 여전히 내게 안겨 있는 누님을 떼어냈다.
“이제 다시 출발하셔야죠, 아가씨.”
“으으.”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떨어지는 누님.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한참을 걸어, 숲의… 아니지. 정글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됐다. 저길 넘어가면 돼.”
“완전 질렸어요.”
“동감이야….”
마침내 여정의 끝이 보이자 혀를 내두른 데이지와 누님.
나도 동감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출입을 거르기 위해 만들어둔 주술과 마법진 따위는, 유일한 인간인 데이지마저 나의 권속이기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음에도, 숲 자체의 울창함 탓에 우리는 곤욕을 치뤘다.
불편하다기보단,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혀를 내두르게 되는 느낌.
지형이 불편하고 험난한 것만 따지자면 용의 산맥이 훨씬 더하겠지만.
“어딜 가도 나무 뿐이고, 미로 같은 게 딱 질색이야.”
누님이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용의 산맥과는 다른 의미로 이곳은 최악이었다.
가진 힘과 체력만 충분하다면 돌파가 가능한 용의 산맥과 달리, 이곳은 아예 미로처럼 가야 할 길이 명백하지 않으니, 돌파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정신적인 피로만 따지자면 이곳이 더할지도.
“아예 확 다 태워버릴까 싶었지만….”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누님이 정말로 다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가 겉잡을 수 없어질까봐 말리긴 했지만.
“그냥 태울 걸 그랬어요….”
다크써클까지 내려온 데이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다 왔잖아.”
“으으. 그래. 스칼렛, 어서 가자. 누나 힘들어.”
칭얼대는 두 사람을 이끌고, 숲의 출구에 발을 탁 디뎠다.
화악!
어둑어둑하던 숲의 어둠이 가시고, 눈 앞으로 환한 빛이 밝았다.
“와아.”
“쯧.”
데이지의 경멸 어린 감탄과, 혀를 차는 누님.
나 역시 눈 앞의 광경을 보고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지금껏 숨겨져 있던 게 이상할만치 거대한 성채. 드워프들의 손길이 닿았을 게 분명한 견고하고도 크고 웅장한 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지간히도 부려먹었나봐? 10년 전만 해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겁이 나셨을까.”
작은 목소리로 비아냥대는 누님. 데이지의 눈 역시 싸늘한 채였다.
그때였다.
“왔는가! 체페슈의 어린 친우들이여!”
높디 높은 강철의 성 위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성채의 벽 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거한의 남자가 있었다.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겉보기엔 중년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소리쳤다.
“스칼렛, 레티시아! 이렇게 만나는 것도 10년만이지 않은가!”
이런.
누님을 돌아보자, 누님이 내 귀에 작게 속닥거렸다.
“드라쿨레아의 가주야. 이름은 루펭. 얼마 전에 가주를 물려받은 걸로 알아. 나이는 칠백쯤.”
그렇군.
나는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우리에게 있어 10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아직 어린 그대들에겐 10년도 무척 긴 세월이지 않은가? 하여튼간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구만!”
쓸데없이 시끄러운 흡혈귀로군.
인상을 살짝 찡그린 누님이 뒤이어 말했다.
“10년 전에 만났을 땐 놈이 가주가 아니었어. 그래서 나이 어린 네게도 존대를 했었는데, 지금은 동등한 위치라 생각하고 신난 모양이야.”
그렇구만….
누님과 내가 자꾸 속닥대자, 남자가 쩌렁쩌렁 외쳤다.
“거기서 속닥대지 말고 들어오게! …이제 보니 옆에 인간도 한 명 있었군?”
데이지는 대답 없이 공손히 고개를 까딱 숙였다.
드라쿨레아의 가주는 물끄러미 데이지를 내려다보다, 이윽고 손바닥을 두들겼다.
“아아아, 블랙우드의 여식이로군? 너도 들어오거라!”
쿠구궁! 그가 손을 들자, 육중한 성채의 문이 열렸다.
그나저나, 순혈의 흡혈귀가 아니면 아예 취급도 않는다더니 그나마 블랙우드는 인정해주는 건가.
처음엔 아예 인식조차 하지 않은 걸 보면 그마저도 겨우 그 수준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는 데이지를 돌아봤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의연하게 대답하는 데이지.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데이지. 이 언니만 믿고 있으렴.”
누님 역시 제 가슴을 통통 두들겼다. 출렁거리니까 밖에서는 가급적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후흐. 네, 아가씨. 주인님.”
그래도 데이지가 웃었으니까 됐나.
“들어가자.”
우리는 성채의 안으로 들어갔다. 팟, 파앗! 마치 우리를 환영하듯 성채의 불이 환하게 밝혀지며, 엘프들이 우르르 나열했다.
“위대한 삼대 혈귀의 일각! 체페슈의 가주, 스칼렛 체페슈 님과 그 일행분이 입장하시었습니다!”
앞으로 나서 큰 목소리로 외치는 집사복의 엘프.
이제 보니 성체 안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들이 모두 엘프였다.
“겉보기에 좋으니 옆에 두고 부린다 이거지….”
차갑게 중얼거리는 누님의 목소리. 옆에 서 있는 나조차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으나, 무척 싸늘했다.
“하하하! 왔는가, 나의 어린 벗들!”
위에서 막 내려온 듯 한 중년의 흡혈귀가 허허 웃으며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러자 우리가 입장했을 때 큰 소리로 외쳤던 엘프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키웠다.
“위대한 삼대 혈귀의 일각! 드라쿨레아의 가주, 루펭 드라쿨레아 님이 납시었──.”
“시끄럽게.”
콰직!
후두둑.
….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양 옆으로 죽 나열해 있던 엘프 집사도, 메이드들도,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그저 우리만이, 튀어버린 핏물과 육편에 할 말을 잃었을 뿐.
“하하. 미안하네. 체페슈는 이런 허례허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미리 말해뒀는데 말이야. 기분 나빴나? 이렇게 사과하지. 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거 부담스럽지?”
정말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메이드가 내민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을 슥슥 닦은 루펭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가.
“미친새끼.”
누님이 작게 읊조리자, 루펭이 눈을 크게 떴다.
“어허, 레티시아가 아무래도 기분이 영 나빴나보구만. 미안허이. 나도 평소에 막 이렇게 손을 쓰진 않아. 아무렴 자식 같은 친구들인데 그러겠나?”
다만.
루펭이 히죽이죽 웃었다.
“체페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응당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지. 안 그런가?”
그런가.
순혈이 아니면 취급을 않는다.
동격으로 치는 건 삼대 혈귀 뿐.
그게 이 뜻이었나.
“그렇군.”
“오. 스칼렛은 이해해주는 거지? 이야, 어린 친구라 그런지 이해심이 깊다니까.”
이거 참.
조용히 받을 것만 받고 돌아가려 했는데.
이 새끼를 어떡해야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