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서열전 (2)
* * *
“저랑──.”
점점 다가오는 여름. 한 해의 절반을 넘기기 전에, 소녀가 내게 말했다. 백색에 가까운 하늘빛 머리, 푸르른 하늘빛 눈동자. 여름날의 화창한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소녀였다.
정작 그 본인은 해조차 쉬이 뜨지 않고 온종일 눈보라 치는 설원의 태생이지만.
꾹. 소녀가, 안나 크로이체프가 긴장한 듯 자신의 두 손을 쥐었다.
그럼에도 결연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는, 떨리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언제 말을 더듬었냐는 듯, 아주 매끄러운 발음이었다.
“다시 한 번만 대결해주세요.”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떠올려보면, 한창 아카데미 밖에서 이래저래 치고받다 돌아와보니, 어느샌가 학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 뭔가.
매 학기의 막바지에 열리는 아카데미 최대의 이벤트.
서열전.
특히 1학년 1학기의 서열전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게다가 올해는 1학년의 면면들이 화려하기도 했다.
체페슈의 나.
황가의 아이리스.
크로이체프의 안나까지.
세간의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다.
들뜬 생도들이나, 아카데미에 출입이 가능한 사람들이 모이거나 하면, 다들 모여 소근소근 떠들어 대는 것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어차피 체페슈 공작이고. 그럼 두 번째는?’
그런 주제가 아카데미 안에서 유행이다.
여하튼.
결국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건 내가 아니라 아이리스와 안나였으므로, 게다가 서열전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기도 했던 나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내 연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데에 열중했다.
서열전에 관심이 없는 데에는, 조만간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밑준비를 위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원래라면 마왕의 강림은 내년이었으니만큼. 게다가 대부분 사건의 중심이 아카데미이기도 했으니.
그걸 감안해서라도 그동안엔 나름 충실히 아카데미에 다닐 생각이었지만, 나와 누나가 기억하던 ‘원래의 역사’ 따윈 이제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미 비틀릴대로 비틀린 전개.
거기다 새롭게 얻은 「천리안」의 탓에, 마왕이 내 존재를 한층 더 경계하게 되었으니.
느긋하게 아카데미에서 1년을 보내며 노닥거릴 수는 없게 됐다.
그래서.
사실 내가 고를 선택지라곤 ‘서열전이 끝나고 나서 자퇴한다’와 ‘서열전 개막 전에 자퇴한다’ 정도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고른 것은 ‘일단 내 여자들이랑 시간을 보낸다’였다.
자퇴의 시점 같은 건 조금 나중에 골라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며칠 정도는,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쉬는 것 정돈 괜찮을테니까.
아카데미 밖에 너무 오래 있느라, 크리스티나의 경우엔 다른 아이들보다도 너무 오랫동안 못 보기도 했고.
해서, 오랜만에 만난 크리스티나와 나란히 서열전의 개막 준비로 바쁜 아카데미를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얘가 좀 쌀쌀 맞게 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간 잘 지내셨죠?”
“음.”
아닌가. 평소랑 같나?
“다른 여자들이랑 잘 지냈냐구요.”
아니군. 삐졌다.
빙그레 웃는 얼굴이면서도, 싸늘한 한기가 깃든 듯, 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 후후. 저는 여기서, 독수공방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벅. 한 발자국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내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사랑하는 임은 다른 여자랑 밖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했어요 안 했어요.”
“일을….”
“그거 말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샐쭉 나를 흘겨보던 크리스티나가, 뺨을 감싼 손바닥을 슬쩍 내려 내 옷깃을 붙잡곤, 발꿈치를 들어올려서.
“…그만큼 나한테도 잘해야 해요.”
쪽.
내 입술을 훔치곤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다른 여자들은 알고 있는 사실들…. 악마와 마왕의 존재, 그리고 내가 마왕의 숙적이라는 것과, 또 내가 겪은 일들.
그것들을 얘기해줄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나에 대해 알고 있던 레티 누님과 누나, 그리고 데이지. 그리고 여신에게 선택 받은 용사로써 나와 엮인 아이리스와는 달리, 크리스티나에겐 지금까지 얘기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크리스티나.”
“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따스한 분위기. 풍만함도, 나긋나긋한 몸짓도, 감은 눈도, 모두.
내가 지켜줘야 할 것들이었기에.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가볍게 허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갠 뒤에 속삭대자, 크리스티나의 허리가 살짝 떨렸다.
“…가, 갑자기. 이런 곳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좋으면서 아닌 척 하긴.
아무튼.
지금껏 얘기하지 않았던 것들과 함께, 곧 자퇴할 생각이라는 것도 얘기해줄 생각이었다.
왜 이제야 말했느냐며, 서운해 할 것은 알지만.
아마도,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나를 붙잡는 대신 따라 오겠다고 하겠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순히 내게 안긴 여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했다.
“오늘 밤에 시간 나?”
“아. 네, 네에….”
“그래. 착하다.”
꼭 어르는 것 같은 목소리. 크리스티나가 나를 꾹 밀곤, 흘깃 노려본다.
“애 취급 하지 말아요.”
“애 맞는데.”
“도둑놈.”
장난 치듯 툭 건드렸다가 반격이 강하게 들어왔다.
확실히 백년 넘게 살긴 했는데….
조금 억울한 마음에 입을 다물자,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크리스티나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슥슥 부드럽게 긁었다.
“…삐진 거 아니죠?”
“안 삐졌어.”
“삐졌잖아요.”
가늘게 뜬 실눈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그런 모습이 또 귀엽고 기특해서, 픽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
“…그, 그래요? …옆구리는 만지지 말아줄래요?”
“왜?”
안심한 듯 표정을 풀다가도, 내 손길에 몸을 슬쩍 비틀어 피하며 내게 툴툴거리던 그녀가, 내 물음에 서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뺨을 꼬집었다.
“으븝.”
“여자 옆구리는 함부로 만지는 거 아니에요.”
아프지는 않지만.
괜히 여기서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가 큰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크리스티나가 살풋 웃으며 내 뺨을 놓고는, 살살 뺨을 어루만졌다.
“응. 착해요. 다른 여자들한테도 조심하세요?”
왠지, 가르침을 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더러 애 취급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가 좋았다.
그래도.
분명 질투하고 있으면서.
다른 여자…. 나와 관계 된,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연적들까지 신경 써주는 모습에, 나는 작게 웃었다.
미안하면서도, 또 고마워서.
“고마워.”
“흐흥…. 뭘요.”
슬쩍 커다란 가슴을 과시하듯 어깨를 펴곤,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러곤 어깨에 힘을 뺀 다음, 내 가슴에 이마를 툭 댔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칼렛 님. 당신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 정도뿐이니까.”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요.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한들, 내 주변의 면면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편이었다.
제국의 황녀이자 용사, 대정령사와, 웨폰 마스터까지.
그나마 데이지가 있지만. 데이지는 내 그림자와 같은 존재인데다, 본인 역시 명망 높은 무가(?家)의 차기 후계자였다.
살짝 떨리는 어깨가 크리스티나의 심정을 표현했다.
나는.
“…바보 같긴.”
“…네?”
백 마디 말보단, 한 번의 행동으로.
하지만 기왕이라면.
둘 다 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읏.”
도망가지 못하게 내 품에 가두듯 끌어안고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아?”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간 참으로 그녀를 외롭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깊이 반성하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세상 어느 누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같은 걸 사랑하는 사람한테 따지겠어?”
“…아.”
멍해진 크리스티나를 보며,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어서 마왕이고 뭐고,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겠다.
그래야 마음 놓고 내 여자들이랑 같이 행복하게 살 거 아닌가.
*
크리스티나와 밤에 만나기로 하고, 그녀를 배웅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다.
내 여자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소홀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돌아가서 데이지와 누님도 조금 더 챙겨줘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던 와중.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목에서 익숙한 인기척을 느끼곤 멈춰 섰다.
“…안나?”
“…오랜만이에요. 스…. 전하….”
이름을 부르려다 우물쭈물, 다시 ‘전하’라고 부르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못 본 사이 또 그새 부드러워진 그녀의 발음에 확실히 내가 밖을 많이 다니긴 했구나, 생각하면서도.
항상 같이 다니던 사샤도 없이, 홀로 내 앞에 선 안나의 모습에 나는 의문을 느꼈다.
“사샤는?”
“사샤는 곧 있을 서열전에 대비한다고 훈련하러….”
아, 그렇구나.
내게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 아카데미의 생도인 사샤에게 첫 학년 첫 학기의 서열전은 꽤 의미가 클 수도 있겠다.
평생 북부에서 살아왔고, 졸업하고나면 아마 또 남은 평생을 북부에서 살아갈 그녀에게, 대륙에서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수 있는 몇 번 안 되는 기회일테니까.
“…그럼 너는?”
그렇게 따지면, 안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의문을 담아 물으니, 안나의 하늘색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당황한 듯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안나가 잠시 입술을 오물대다,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스칼렛.”
“네, 네헤?”
뭔가 나한테 부탁하려는 낌새여서, 먼저 선수를 쳤다.
이쯤 되면 슬슬 이름을 부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제자리 걸음인 게 안타깝기도 하고.
“스칼렛이라고 부르면, 들어줄게.”
“저, 저 아직 용건도 얘기 안 했는데욧….”
옆에 사샤가 보고 있었다면 어서 부르라고 안나의 옆구리를 찔렀을텐데.
아무튼 나는 모르겠다며 팔짱을 끼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니, 안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스, 스칼레엣….”
그리곤.
“오, 오, 오빠….”
…오빠는 안 해도 되는데.
아이리스의 견제인가?
“…그래서, 부탁이 뭔데?”
일단 시킨대로 했으므로, 들어주겠다는 제스처로 팔짱을 풀고 물으니, 마치 “됐다!”라고 말하는 듯 안색이 밝아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랑.”
그렇게.
“저랑──.”
언제 말을 더듬었냐는 듯, 아주 매끄러운 발음이었다.
“다시 한 번만 대결해주세요.”
선전포고였다.
서열전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