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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44화 (144/199)

〈 144화 〉 서열전 (3)

* * *

“저랑──.”

점점 다가오는 여름. 한 해의 절반을 넘기기 전에, 소녀가 내게 말했다. 백색에 가까운 하늘빛 머리, 푸르른 하늘빛 눈동자. 여름날의 화창한 하늘과 구름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소녀였다.

정작 그 본인은 해조차 쉬이 뜨지 않고 온종일 눈보라 치는 설원의 태생이지만.

꾹. 소녀가, 안나 크로이체프가 긴장한 듯 자신의 두 손을 쥐었다.

그럼에도 결연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는, 떨리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내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언제 말을 더듬었냐는 듯, 아주 매끄러운 발음이었다.

“다시 한 번만 대결해주세요.”

말했듯,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

선전포고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거창한 무언가는 아니다. 곧 찾아올 서열전 때, 결승전에서 만나자는 뜻.

그렇게 생각한다면 또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얘기인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쉬운 얘기는 아니었다.

1학년 1학기의 서열전은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편성된 조를 확인했더니, 안나가 나를 만나기 위해선 그 전에 아이리스를 먼저 꺾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만, 결승전에서 그녀와 내가 만날 수 있게 된다.

아이리스.

학기 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아이리스는 안나에게 버거운 상대일 것이다.

실기 시험에서의 평가는 비등비등 했을지 모르나, 아이리스는 그 사이 나를 따라다니며 이미 '벽'이라 부르는 것을 뛰어넘은 상태였으니.

즉. 만일 안나가 여전히 벽을 넘지 못하고 답보 중인 상태라고 한다면, 안나가 아이리스를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다.

다만. 나를 보는 눈동자에 깃든 그 굳은 의지와, 결의.

그것을 떠올리면, 아이리스가 자신을 한참이나 앞질러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안나는 내게 똑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그 마음을 받아줘야 옳지 않을까. 적어도, 마주해야 하는 건 아닌가.

잘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진다. 어떡하는 게 좋을까. 나는 안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사실은 그냥 지금까지, 여러 변명을 대가며 그저 피하기만 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후."

머지 않은 마왕과의 결전이라거나.

잃어버린 기억이라거나.

비록 지금은 해결되었지만 천칭의 시련이라거나.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그런 문제들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다며 피해온 지난 시간들.

비록 내가 일부러 피하려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론 그렇게 된 행동들.

그런 것들을 되짚었다.

이미 짊어져야 할 것들이 많기에,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피하는 게 옳은가?

적어도,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고 마주봐야 하지 않나?

등을 기댄다. 등받이에 몸을 파묻곤,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뭐.

제대로 한 번 부딪쳐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렇게.

날이 밝았다.

*

와아아아─.

환호성이 울렸다.

서열전의 개막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환호했다. 비록 서열전이 하나의 시험이긴 하나, 반대로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거대한 이벤트이기도 했으니.

특히나 올해는 더더욱. 이미 했던 얘기이긴 하지만, 올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법한 멤버가 많았다. 황녀 아이리스, 북부 대공의 후계자 안나, 거기에 나까지.

학년을 올리면 누님도 있고.

사실 체급만 따지자면 나와 다른 둘을 감히 비교할 수도 없긴 하다.

다만 일반 생도의 입장에서, 나도, 다른 두 사람도, 모두 똑같이 아득할 뿐.

아무튼. 화제성으로 따지면 전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라는 거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아이리스와 안나 중 누가 더 강할까?'라고. 서열전이 흥행하는만큼, 덩달아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주제였다. 원래도 종종 거론되는 얘기기는 했지만, 이제는 생도가 둘 이상 모이면 꼭 한 번은 거론되는 주제가 됐다.

평소라면 감히 입에 담기도 조심스러울테지만, 큰 이벤트 앞에서는 그런 조심성도 조금은 희미해지고 만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강한가?

의견은 꽤 갈린다. 이는 아이리스가 벽을 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생도들은 제각각 자신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을 근거로 들어서, 누가 더 강한지에 대해 토론했다.

학기 중에 두 사람이 따로 충돌한 적이 없기도 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서열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내 예상은.

그야 현재로써는 당연히 아이리스의 필승. 말했다시피, 현재 의견이 갈리는 이유는 아이리스가 아카데미 밖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니까.

아무리 안나가 '검성'의 후계자라고한들, 지금의 아이리스를 이길 순 없다. 안나가 그 사이 혼자서 벽을 돌파했으면 또 모르겠다만.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무튼 안나의 바람대로 그녀가 나와 결승에서 만나려면 아이리스를 넘어야 했다.

생도들은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우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그 바람대로 되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강한 1학년은 누구인가?

아무튼 이것저것 제쳐놓고 따지더라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논외로 치고 있을테니, '두 사람 중 이긴 사람이 1위'라는 인식이 보통이다.

나는 아마.

생태계 교란종?

그런 취급이 아닐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도 서열전도 참가하지 않고 자퇴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까. 안나의 선전포고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거다.

물론 그거야 이제 어디까지나 if가 되어버린 이야기고, 나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도전자를 맞이하는 입장으로.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도 결승까진 올라가야 했다

결승까지 올라가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는 않을테지만, 그래도 기왕 하게 된 거 성의껏 상대해주는 게 좋겠지.

어느 정돈지 한 번 볼까.

“다음은, 제국의 일곱 기둥이시자, 적법한 체페슈 공작령의 주인이시며, 아르카디아 황실의 벗임과 동시에, 영원불멸 제국의 밤을 평화케 하시는 제국의 달! 스칼렛 체페슈 공작 전하십니다!”

마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대 위의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과연 아카데미 최대의 이벤트.

나는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

1학년 뿐 아니라, 2학년과 3학년의 생도들도 꽤 보였다. 드물긴 하지만 졸업반의 생도들까지도. 그 외에도 아카데미 밖에서 찾아온 외부인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특히 많이 보이는 외부인은 내 마법을 조금이라도 견식해보고자 하는 마탑의 사람들.

마탑에서 찾아온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랜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작고한 전 마탑주와, 아직 경지에 오르지 못한 그 후계자.

느낄 수 있다.

저 마탑의 로브를 뒤집어 쓴 무리 중, 안나와 아이리스 못지 않은 재능의 화신이 섞여 있다는 것을.

왜소한 체구.

뒤집어 쓴 로브로도 가리지 못 하는 풍만한 가슴과, 슬쩍 드러난 턱을 통해 알 수 있는 뽀얀 피부와 미형의 얼굴.

인식 저해 마법이라도 써둔 것 같지만.

그런 건 고위의 마법사에게는 원래 통하지 않는 법이다.

나중에 한 번 말이라도 걸어볼까.

나를 향한 선망의 시선.

손을 슬쩍 들었다. 경박하게 번쩍 들어 흔들지는 않았다. 나를 보는 사람도 많은데 공작씩이나 돼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품위와 위엄을 차려서, 손을 까딱 움직이자, 사람들의 환호가 다시 들려왔다.

“이, 이쪽을 보셨어!”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는 이쪽을 보신거야!”

굳이 대상을 고르자면 저기서 나를 보고 있는 마탑의 후계자한테 해준 것이긴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침 마탑의 후계자…. 기니까 그냥 마탑주로 불러야겠다. 아무튼 마탑주가 옆에 서 있던 로브 차림의 사람을 툭툭 건드리더니 귓속말을 소곤소곤 해댔다.

궁금해져서 훔쳐 듣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하게 기본적으로 깔아둔 결계가 있긴 했지만.

말했듯 이런 건 보다 고위의 마법사에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용은.

‘공작 전하께서는 사람들의 환호가 싫지 않으신가봐요.’

‘그런가 봅니다.’

‘아버지였다면 시끄럽고 천박하다면서 화내셨을텐데.’

‘….’

현 상관에게 전 상관이자 현 상관의 아버지인 사람(고인)의 험담을 듣는 로브가 좀 안쓰러웠다.

맞장구를 칠 수도 없고.

하여튼 그 영감,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결국 그 괴팍한 성격은 못 고쳤나본데.

그래도 아버지의 얘기를 하는 딸의 얼굴에 은근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걸 보면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사람이 좀 괴팍하고, 까탈스럽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좀 깔보는데다, 늙어서 고집이 억세다는 점만 빼면 사람이 나쁘진 않았다.

…?

…뭐지.

내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에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

흥이 오른 사회자가, 내 상대를 불러냈다.

“다음은! 샤론 가의 차남! 오스카 샤론입니다!”

나를 부를 때랑은 좀 많이. 아주 많이 다른 소개 문구였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이랑 그냥 귀족 영식을 소개하는 방식이 같은 게 더 이상하기도 했고.

…나는 일단 혼란을 접어두고, 떠오른 기억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입장한 곳의 반대편. 다른 한 곳의 입구에서부터, 나의 상대, 오스카 샬론이 올라왔다.

큰 키와 다부진 체형. 단단한 근육이 겉으로 보이는 그는 전형적인 전사의 상이었다.

전형적인 전사와, 마법사 사이의 대결.

비록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결과가 어떨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테지만, 일단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그림이 된다.

아무래도 제국의 큰 어른 취급을 받는 체페슈의 가주이기도 하고, 아크 메이지씩이나 되면서 재미 없게 일격에 끝내진 않을 거라는, 나에 대한 기대가 있기도 하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 모였다.

과연 어떤 화려한 싸움을, 화려한 마법을 보게 될 지!

나는 그들의 기대에 맞춰서, 위력은 변변찮아도 일단 복잡한 술식을 곁들여 화려한 모습을 연출하려──.

“항복하겠습니다──!!”

뭐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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