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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48화 (148/199)

〈 148화 〉 서열전 (7)

* * *

실제로 확인해본 결과, 내 다음 상대였던 생도가 기권 의사를 밝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막 전해진 소식이라, 내게 전달하려 했는데 마침 내가 찾아왔다고.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부복하고 있는 오스카를 흘긋 보곤, 몸을 돌렸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군.”

심드렁하게 뱉은 한 마디. 놈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체페슈의 가주다. 놈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노스페라투와 동격의 존재.

내가 불쾌함을 표현하기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낮은 격의 흡혈귀는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한다.

놈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느껴졌다.

쿵!

다급히 머리를 박은 녀석이 외쳤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지레 겁을 먹은 오스카가 그리 외치긴 했으나, 나는 놈을 당장 벌할 생각이 없었다.

분명 놈이 명령 받은 것은, 나의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었다.

아주 특별히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지만, 죽이려면 못 죽일 것도 없는. 쉽게 말해 ‘거슬리는 짓’을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격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본능적인 공포에 굴복하긴 했지만. 아마 지금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자신에게 부여받은 역할을 위해 내 곁을 서성거리며 귀찮게 굴겠지.

따라서 나는 오스카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살려둬야 나중에 노스페라투를 낚을 미끼로 쓸 수 있을 거 아냐.

다만.

“나의 다음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가.”

“….”

놈이 입을 다물었다. 데굴…, 눈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분명 다음 상대한테까지 기권하라며 손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아, 아직 거기까지는….”

내가 평탄한 어조로 계속해 묻자, 무언가 희망을 느낀 듯 녀석의 얼굴이 펴졌다.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쯧.”

가볍게 혀를 차자 놈이 고개를 다시 처박았다.

“충성심이 과해 저지른 실수라 생각하겠다.”

다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초에 생각한대로 오스카를 당장은 살려둘 생각이었기에, 근신만을 명령했다.

근신 명령을 들은 놈의 표정이 꼭 ‘이럴리가 없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슬쩍 그림자를 움직여주니 잽싸게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으음.’

놈이 2차전이든 3차전이든, 항복을 받아온 것 자체는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4차전.

부르자면 준결승전. 그것만큼은, 녀석이 손을 대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설프게 없느니만 못 한 징계는, 놈이 내 눈치를 보지 않고 또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기에.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 속에서 ‘눈’ 부대의 까마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나이까.”

“저 놈의 그림자 속에 숨어라.”

“따르겠나이다.”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내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충실한 나의 시종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나 보러 갈까.”

발걸음을 옮겼다.

*

누구를 보러 갈까. 고민하다, 나는 안나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녀가 이번에 승리하게 되면 다음 상대는 아이리스였다. 그리고 나는 안나가 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즉. 그녀는 다음에 아이리스와 싸우게 된다.

내심 아이리스를 응원하고 있지만, 안나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게 그런 얼굴로 부탁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남은 김에,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안나 역시 대기 중이었다. 그녀의 대기실로 들어가자, 안나는 나를 발견하곤 바짝 굳어버렸다.

“으극.”

꼭 혀라도 씹은 것 같은 모습에 잘못 온 건가 싶어 한 발짝 뒤로 물리려던 그 때.

“어, 어어, 어서 들어오세요…!”

안나가 벌떡 일어나선,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자신이 부린 추태를 알아챈 안나가 ‘아’ 하고, 수치심에 겨운 탄성을 뱉곤 얼굴을 손에 묻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겨우 이런 걸로 죄송하면 세상 살 일 죄송한 일밖에 없게 되지 않을까. 됐다며 손을 휘젓자, 안나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뭐 그리 긴장을 하고 있어.”

“그게, 그게…, 찾아오실 거라는 생각을 못하기도 했고….”

했고…. 안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눈동자가 굴러갔다. 입술이 오물거린다. 내가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오물거리던 입이 열렸다.

“사샤도 옆에 없으니까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아주 작은, 나와 안나만이 들을 수 있을 목소리. 그럼에도 그 말 속에 담긴 뜻이.

너무 의외라서.

“큽.”

“우, 우, 웃지마세요…!”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다름 아닌 드넓은 대륙 북부의 차기 지배자인 안나다. 그런 그녀가, 항상 옆에 있어주던 소꿉친구의 부재만으로, 소통에 지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자백한 것이다.

아아. 사샤, 너는 대체.

문득 안나와의 첫만남이 떠오른다. 사샤를 옆에 대동한 채, 엉뚱한데다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을 태연하게 하면, 옆에서 사샤가 수습하곤 했다.

이제 와선 안나가 중앙의 말에 익숙해진 터라 사샤의 고생도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사샤가 없으면 그냥 소통 자체가 어려웠다니.

이건 니콜라이의 잘못이라고 봐야 하나?

하여튼 그런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안나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진 채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웃긴 일 없어요…!”

내가 한참을 웃고 있자, 안나가 씩씩 화를 냈다.

“제, 제가 아무한테나, 그러는 줄 아세요…?!”

그러고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콩콩 두들긴다.

누나를 제외하면 대체로 거유를 넘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뱉게 만드는 사이즈를 자랑하는 내 여인들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지만, 나름 보기 좋은 볼륨감을 가진 안나의 가슴이 가볍게 출렁였다.

내 눈이 그쪽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가슴을 쭉 펴려다 한쪽 팔로 가슴을 슬쩍 가린 안나가 나를 샐쭉 노려봤다.

“변태야.”

“음. 그래서 뭐라고 했지?”

“…아무한테나 그러는 줄 아느냐구요.”

그런다는 게 뭔가. 잠깐 생각에 빠졌던 나는, 그것이 안나의 소통장애를 지칭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무하고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나한테만 그런다?

“…칭찬으로 받아야 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랑은 괜찮은데 너랑 있으면 말하기 불편해’ 같은 말 아닌가.

아무리 이유가 이유여도 그렇지. 순순히 기뻐하기엔 참 오묘한 말이었다….

“…누, 눈 앞에 있으면, 심장이 막, 쿵쿵 뛰고…. 그런단 말이에요.”

내가 미묘한 느낌에 잠시 입을 다물자, 안나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나를 보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사, 사샤가 있으면… 그래도 의지가 돼서… 괜찮은데, 지, 지금은 사샤가 없으니까….”

나는 지금까지 안나가 내게 했던 수많은 언행들을 떠올렸다.

‘제가 사랑이라 생각하는데. 제 심장이 그리 말하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옆에만. 있겠습니다.’

‘첩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다섯 번째든. 아니면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괜찮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도 보통 깡으로는 못 할 말들이었던 같은데.

차기 대공이 첩실로도 괜찮으니까 받아달라는 말까지 했으면서, 그게 사샤가 있으면 의지가 되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사샤가 없으면 부끄럽고 떨려서 그런 말 못 한다?

사샤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저, 저도 알아요…. 그,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사샤가 옆에 없어도 괜찮은데….”

나는 눈 앞에서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손을 뻗어서 콧등을 꾹 눌렀다.

“…? …!”

갑작스런 접촉에 잠시 멀뚱거리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더니, 내게서 훌쩍 도망가버린다.

“사샤… 어딨어… 큰일났어…. 스칼렛 님이랑 닿았어….”

“스칼렛.”

“스칼렛이랑 닿았어….”

말은 잘 듣네.

정말.

보면 볼수록 뭔가 새로운 게 나오는 여자다. 확실히 넘칠만큼 매력 있는 여자였다. 단순히 외모나 그 배경 뿐 아니라, 그 내면까지도.

“…히윽!”

장난스럽게 그림자를 움직여 포니테일로 묶어 드러난 뒷목을 살짝 건드리자, 꿍얼거리던 안나가 신음을 뱉었다.

그냥 장난을 치려던 나도, 신음을 뱉은 안나도 당황할 정도로 야릇한 신음.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었던 나는,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뒷목이 성감대였구나. 몰랐어.”

“…나, 나, 나!”

나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

“하아, 하아아….”

쫓겨나듯 도망간 스칼렛의 등을 바라보던 안나가, 마침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떨었다.

분명 단 둘이 만나게 될 때를 생각해 몇 번이나 거울을 보며 연습했는데.

심지어 사샤가 스칼렛을 대신해 연습 상대까지 해줬는데.

‘공녀님, 저 말고 친구 없는 티 자꾸 낼래요? 이런 말 안 하려 그랬는데 진짜 찐따 같아요.’

‘사샤 네가 뭘 알아…!’

‘뭘 알긴요. 지금 저한테는 방구석검성 되셔서 온갖 패악질을 부리시지만 정작 스칼렛 전하 앞에만 서면 요조숙녀는커녕 입 벙긋 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하신다는 건 잘 알죠?’

‘이이익!’

…그냥 나한테 스트레스를 푼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쿵.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흐아아….”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어깨도 축 늘어진 게 사샤가 본다면 ‘왜 그렇게 처량한 모습으로 있어요? 전하한테 차였어요?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닌데 기운 내셔요.’라고 말 할 법한….

…그 녀석 지금 생각해보니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안나는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비록 연습한대로 능숙하게 스칼렛을 맞이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아무튼 스칼렛이 자신을 보러 찾아온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자신의 연적은 훨씬 앞서 나간 상태에서, 겨우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신세가 처량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겨야지.”

안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

그리곤 괜히 간질거리는 기분에 뒷목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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