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준결승 (1)
* * *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지금껏 체페슈 공작의 모습을 보고자, 더 나아가 그가 부리는 마법을 보고자 하는 기대를 품고 모여든 사람들.
지금까지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상대측이 번번이 기권하는 바람에 보지 못 했던 바로 그것을.
오늘에서야,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작의 준결승 상대인 소녀, 사샤 아일라노바가 기권하지 않고 나와줬기 때문에.
“사샤! 사샤! 사샤!”
신이 난 생도들이 소녀의 이름을 연신 외쳐댔다. 딱히 사샤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님에도, 이 상황 자체를 즐기다보니 절로 그녀를 응원하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공작의 마법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겠어!”
흥이 오른 것은 여타 생도들 뿐 아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수많은 귀빈들 역시 두 눈을 빛내고 있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생도 신분이라한들, 체페슈 공작은 대륙 전역에 그 이름을 떨친 전설적인 사내다.
백 년이 넘는 세월간 제국의 밤을 지배해온, 이곳에 방문한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위상을 가진 자.
“소문으로만 듣던 전설을 오늘 드디어 보게 되는 건가….”
“너무 기대하진 말게. 상대가 생도이니만큼 공작 전하께서도 힘조절을 하시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구만.”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귀족 사내는, 옆에서 핀잔하는 친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였다.
좌중에 기대 어린 열기가 감도는 그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거니 판단한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1학년 서열전의 준결승의 두 주역을 모시겠습니다!”
뒤이어 양측의 이름을 호명한 진행자가 무대에서 냉큼 내려오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왔다…!”
스칼렛 체페슈와, 그 상대인 사샤 아일라노바가 준비된 무대의 위로 올라왔다.
“저것이, 공작의 ‘그림자’인가….”
사람들의 사이에 낀 채 스칼렛을 응시하던 에일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일렁이는 그림자. 공작의 다리를 감고 올라와, 허리와 어깨까지 휘감은 검은 장막.
그녀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완벽한 공방일체(??一?)의 무기.
그에 대비해 활 한 자루만을 들고 스칼렛의 앞에 선 사샤. 이곳에 있는 그 누구조차 그녀에게 ‘공작에게서 승리할 것’이란 기대 따윈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의 분전은 바라고 있었기에.
“저걸로 충분하겠어? 일 초만에 끝나는 건 아니지?”
누군가의 불안한 목소리가 그들의 심정을 대신하는 듯 했다.
일 초만에 끝나버렸다간, 그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공작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테니까.
사샤는 쓰게 웃었다. 저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기대가,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인기 많으시네요, 공작님….”
괜히 스칼렛에게 툴툴거린 그녀가 활을 들어올렸다. 선명하게 맺히는 마력으로 빚어낸 화살.
“봐주시면서 할 거죠?”
“아니.”
“너무해.”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두 사람의 준비가 끝났다고 여긴 진행자가 외쳤다.
“A조 준결승…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샤가 뒤로 크게 물러섰다. 타앗! 거리를 벌린 그녀가 주저 없이 스칼렛에게 화살을 쏘았다.
‘꽤….’
겉보기에도 고순도의 마력으로 짜여진 화살의 맹렬한 기세에 작게 감탄하며, 그림자를 움직여 화살을 쳐냈다.
콰앙! 화살이 부딪친 소리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큰 폭음.
바닥에 꽂힌 화살의 마력이 형태를 잃고 사라지기 전에, 두 발째가 날아왔다.
아니.
세 발, 네 발.
사각에서, 스칼렛을 노린 채 연달아 화살이 쏘아졌다.
쾅! 쾅! 콰앙!
“흡!”
앞선 공격들이 모두 막혔음에도, 사샤는 기죽지 않고 새로운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지금껏 쏘아보낸 화살보다도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는 화살.
‘뭘로 받아주는 게 좋을까.’
스칼렛이 잠깐의 고민 끝에 손을 들어올렸다. 손 끝에 맺히는 점. 하나, 둘, 셋…. 점점 그 숫자를 늘려나간 흑색의 ‘점’이, 하나둘 얽히기 시작했다.
점과 점을 이어, 선.
선과 선을 이어서, 면.
스칼렛의 마력이 공간 자체를 침식한다. 그를 중심으로 칠흑의 장막이 퍼져나갔다.
“…!”
당황한 기색의 사샤가 활시위를 손에서 놓는다. 파앙! 단순히 활시위를 놓는 것만으로 대기가 진동했다.
필시 어지간한 생도라면 받아내지도 못할테지.
“훌륭하다.”
허나, 「면」에 닿은 화살은 격돌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장막 안으로 삼켜졌다.
“무슨…!”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모든 걸 분쇄할 기세로 날아오던 화살마저 집어삼킨 칠흑의 장막이 이윽고 우리 둘을 완전히 감쌌다.
면과 면을 합치고, 잇고, 뭉쳐서.
하나의 구체가 만들어졌다.
「오브」
마치 공간 자체를 도려낸 듯 이질적인 칠흑의 구체가 스칼렛의 손 위로 떠오른다.
“…그, 그런 건 반칙이지 않나요?!”
관중석에서는 “오오….” 같은 감탄사나, “저것이 바로 공작의….”라며 분석하는 목소리 따위가 들려오고 있지만.
회심의 공격이나 다름 없던 것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브에 흡수 당하는 광경을 본 당사자, 사샤는 억울한 심정이었다.
빼액 소리친 그녀가 재차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슈욱! 슈욱!
“…악! 내 마력 그만 빨아먹어요!”
몇 발이나 쏴도, 하나 같이 오브에 잡아먹히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유효타는커녕 스친 적도 없으니 사샤가 역정을 냈다.
애초에 이길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생채기라도 내면 잘 한 거겠다 싶은 마음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가만히 서서 오브로 제 공격을 쏙쏙 잡아먹고만 있으니 이건 너무 얄밉지 않은가.
탁.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사샤가 샐쭉 그를 노려보았다. 활대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간 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얼굴이다.
“자.”
시작하고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스칼렛이 심드렁히 오브를 내밀었다. 키이잉…,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오브가 마력탄을 뱉었다.
“윽!”
사샤가 다급히 화살을 만들어내 받아치자, 쾅! 허공에서 부딪친 두 마력의 덩어리가 폭발했다.
‘이건….’
사샤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었다. 부딪힌 두 마력의 파장을 통해, 스칼렛의 오브가 뱉어낸 저 마력탄을 이룬 마력이, 바로 자신의 것임을 눈치 챈 것이다.
“이, 이건 반칙이야!”
빼액 소리 지른 사샤가, 활을 바닥에 내던졌다.
“기권할 셈인가?”
“확실히 저런 기술을 상대로 승산이 없긴 하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체페슈 공작을 상대로 무척 잘 한 거긴 하지.”
바닥에 무기를 던진 사샤의 행동을 기권으로 해석한 관중들이 아쉬워 하면서도, 이 정도면 잘 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아니야.”
“예?”
“기권 아니야.”
“뭐가 보이십니까?”
로브를 푹 눌러쓴 채 경기를 지켜보던 에일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와 함께 지켜보던, 마탑의 상급 마법사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마력의 움직임.
‘저건….’
에일린의 눈이 가늘어짐과 동시에.
“원래 이건 안 꺼내려고 했는데.”
달라진 사샤의 기세.
투덜거리는 말과는 달리, 두 눈은 무척 날카롭게 뜨여 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무척 잘 벼려진 칼같은 투기.
스칼렛은 쓰게 웃었다.
“비밀병기를 꺼내야 할 정도로 내가 미움 받을 짓은 안 한 것 같은데.”
“얄미워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기세를 피어올리던 사샤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점점 강렬해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투기다.
안나의 옆에 있을 때와는 또 색다른 모습이라고, 스칼렛이 작게 중얼거렸다.
“전설적인 인물한테 인정 받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꿈 꿔 볼만큼 낭만적인 일이잖아요.”
한 차례 무절제하게 뿜어져 나오던 투기가 갈무리되어, 사샤의 안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안나의 곁에서, 안나의 폭주를 절제시키는 역할이라고, 그녀에 대해 생각하던 스칼렛이기에.
“놀랐나요?”
“조금은.”
이토록 싸움에 즐겁게 임하고, 몰입하는 모습이 의외였다.
사샤는 그런 스칼렛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저 괴물 같은 공작님한테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뿌듯하고, 가슴이 간질거리고.
또.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 부딪혀 보고 싶었다.
"조금 더 놀라게 해드릴게요."
그녀가 일렁이는 허공에 손을 넣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마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스칼렛과, 에일린만이 눈치 챌 수 있었던 미약한 마력의 움직임이, 이제는 이곳의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해졌다.
아공간.
고위급 마법사 중에서도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위급 공간 마법임과 동시에, 흔히 ‘보구’라고 불리우는 무구들에 공통적으로 내장 된 술식.
스칼렛이 알기에, 사샤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ㅡ사샤가 아공간에서 거대한 활을 꺼내들었다.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그녀의 두 배는 더 돼 보이는 거대한 보구.
관중석이 술렁였다.
“저런 몸으로 저 크기의 활을 쏜다고?”
보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활의 크기에 놀라는 사람과.
“저건…?”
사샤가 꺼낸 활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의아함을 드러내는 사람.
‘영구동토의 활…!’
보구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한 에일린까지.
가지각색의 반응이 터져나오는 관중석을 무시한 사샤가, 그 거대한 활을 들어올렸다.
"어때요. 놀라셨나요?"
사샤가 히죽 웃었다.
고귀한 귀족이라기보단, 경박한 사냥꾼이라고 해도 어울릴 것 같은 미소에, 스칼렛이 그제야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아주 놀랐다."
북부의 사람들은 제 손에 익숙한 무기를 들려주면 본성을 볼 수 있다더니.
딱 그 말이 들어맞은 게 아닌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