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준결승 (2)
* * *
아무리 보구를 꺼냈다고 한들, 사샤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스칼렛도, 심지어는 당사자인 사샤조차도.
그녀는 감히 자신이 스칼렛을 이길 거라고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질 땐 지더라도, 제대로 한 번 들이받아보고, 기왕이면.”
“기왕이면?”
“인정도 받아보고 싶고요.”
아까도 했던 말이다.
낭만.
대륙 어딜 가도 그 이름을 들어볼 수 있는 전설적인 존재와 이렇게 마주 서서, 설령 상대가 진심이 아닐지라도, 자신만큼은 전력을 다 해 부딪히고, 그리고.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무인에게, ‘싸우는 자’에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을까.
스칼렛의 눈가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평소에는 안나가 사고라도 칠까봐 안절부절 못하던 사샤가, 이토록 호전적인 면모를 드러낼 줄 몰랐으니까.
과연 북부의 사람이라는 건가.
잘 생각해보면 안나도 그랬다. 간도 크게 대공이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 말을 주저하지 않고 했었으니.
첫 번째가 아니어도 좋다.
당찬 얼굴로 그렇게 말하던 안나를 떠올리니, 스칼렛은 그만 쓰게 웃고야 말았다.
‘하여튼 북부 사람들이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브에 꾹 눌러 담았던 마력을 단숨에 펼친다. 순식간에 오브에서 흘러내린 마력이 바닥에 스며들어, 먹물이라도 뿌린 듯 필드의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읏.”
요동치는 마력에 예민하게 기감을 세운 사샤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 이상 반응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반응할 틈도 없었어….’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완벽하게 필드를 장악해버린 것이지만.
사샤가 입술을 짓씹었다. 보구까지 꺼냈는데, 완전히 말리는 기분이었다.
“이거 반칙 아닌가요?”
“마법사가 필드를 장악하게 놔둔 게 잘못이지.”
“이러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준 차이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사샤가 투덜거렸다.
그녀도 내심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지금껏 스칼렛이 보여준 반칙 같은 모습들이 모두, 순수히 그의 힘이란 것을.
그토록 그녀의 벗, 주인, 공녀가 동경하는 영웅이 아닌가.
눈 앞의 괴물이 지금껏 해온 위업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분열한 밤의 통일군주’
선대에 기울었던 가세를 일으키고, 분열했던 밤의 세력들을 규합해 밤을 지배하는 세 가문 중에서도 우뚝 서게 만들어 혼란스럽던 대륙의 이면을 평정한 위업.
‘검은 숲의 정복자’
제국의 손이 닿지 않던, 대륙에 몇 없는 「블랙박스」 중 하나인 검은 숲을 개척했기에 얻은 칭호.
‘대호수의 귀인’
분노한 대호수의 드래곤을 회유하고 그와 벗의 증표를 나눈 그에게 허락된 이름.
그리고.
‘대륙 유이의 그랜드 아크메이지’….
이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암암리에 아는 사람들만 아는 사실.
대륙을 한 번 구했던 사내.
그것이 바로, 눈 앞에서 그녀를 향해 희미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는 사내의 정체인 것이다.
굳이 안나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특히 척박한 북부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사샤 역시, 그를 동경할 수밖에 없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따스하고 위대한 영웅의 존재를 동경하는 법이니까.
으득…,
사샤는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주고서, 깨끗하게 승복하고 싶었다.
“내가….”
그녀가 보구, ‘영구동토의 활’을 들어올렸다. 설원의 정기를 머금은 보구답게, 관중들마저 시릴 정도의 한기가 흘러넘쳤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인지. 아니면, 코퀴토스를 움켜쥔 손에서 들려온 소리인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력으로 만들어낸 얼음 화살이 활시위에 걸렸다.
“내가 먼저…!”
끼이이이익─!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 마치 태풍을 부르듯, 화살촉을 중심으로 대기가 비틀렸다.
바짝 당겨져 팽팽해진 상태로, 가히 돌풍과도 같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바람의 마력.
그것이 사샤의 속성이었다.
거기에.
이것도 끝이 아니라는 듯, 화살촉 끝이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중 속성…!”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토했다. 바람과 얼음의 이중 속성.
단순히 마법사들이 마력을 변화시켜 만들어낸 원소가 아니라, 순수하게 개인의 마력이 두 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설마하니 사샤가 이중 속성의 보유자라는 사실에, 지켜보는 이들 사이에서 재차 열기가 달아올랐다.
“와라.”
지켜보던 스칼렛 역시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이런 캐릭터가 원작에서는 비중 없는 조연이라고?’
속으로는, 무척 당황한 채였지만.
이미 ‘원작’ 같은 것이 의미 없어진 지 오래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미리 선점해둔 정보’가 지닌 값어치를 포기할 수 없기에, 필요할 때마다 원작의 정보를 사용했기에.
‘등장인물’인데다, 이토록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별다른 활약이 없이 묻혔다는 게….
‘아니지.’
물론 중요한 일은 맞지만.
우선은 눈 앞의 사샤에게 집중한다. 그게, 전력으로 부딪혀 올 그녀에게 예의일테니. 스칼렛은 마음을 다잡고, 바닥을 침식한 그림자를 움직였다.
츠츠츠츳.
손을 들어올리자, 그의 앞으로 촘촘하게 마력의 장벽이 세워졌다.
한 겹, 두 겹, 세 겹. 이윽고 덧씌운 장벽의 수가 두 자릿수를 넘어 아득하게 겹겹이 감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단 일 초.
그리고 그 순간, 사샤가 만들어낸 회심의 일격이 완성되었다.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쏴.”
“…!”
피잉!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샤가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토록 막대한 힘을 머금고 있던 화살을 쏘아낸, 거의 격발(??)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일격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소리였다.
그러나.
폭풍을 머금은 얼음의 비수.
지금은 그 막대한 에너지를 얇은 몸뚱이에 아득하게 압축해둔 상태. 표적에 닿는 순간 그 봉인이 풀리고 일대를 초토화 시킬 것이다.
“대단한데.”
스칼렛이 감탄했다.
키이이잉!
고요하게 쏘아진 화살과 달리, 그것을 감싼 폭풍은 주변을 갈아버릴 듯 맹렬했다.
미친 듯이 회전하는 폭풍의 마력.
속히 네임드라고 불리우는 '용사'나 '검성'이라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 1학년 중 그녀 수준의 화력을 보일 수 있는 생도는 없으리라.
다만 일격에 마력 장벽이 뚫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보구를 사용했다한들, 스칼렛과 사샤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게 있었다.
쿠웅.
화살촉의 끝이 장벽에 닿았다. 회전하는 폭풍과, 서리를 뿌리는 얼음. 두 가지 속성의 마력이 마력 장벽을 갉아먹고, 비집어 들어오려 했다.
크그그극.
살짝 긁히는 장벽의 표면.
"설마 체페슈 공작의 마력 장벽이 뚫리는 건가?"
의문, 의심, 그리고 기대.
제각각의 감정들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칼렛에게 전해졌다.
스칼렛은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스칼렛이 봐주는 게 아닌가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샤의 화살이 그의 장벽을 뚫어 새로운 영웅이 되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들은, 스칼렛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오로지.
눈 앞의 소녀만을 바라본 채.
‘어떡할 거지?’
마치 어린 아이가 어려운 문제를 앞에 뒀을 때 어떻게 반응할 지를 보는 어른과 같은 태도.
처음 한 발. 아직까지 무난하게 막아내곤 있지만, 몇 차례 더 같은 일격을 먹이면 마력 장벽도 깨질 것이다.
애초에 내구도를 신경 써서 만든 게 아니라, 재생력을 위주로 만들어낸 장벽을 여럿 겹쳐 계속해서 재생하며 공격을 막아내는 용도였으니까.
정도 이상의 공격을 당하면, 그야 깨지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보구 레벨 씩이나 되는 공격이면, 깨지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지.’
보구를 사용한 일격. 그 일격의 강함만 따지자면, 그녀의 주인이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안나마저 뛰어넘으리라.
‘물론 당장 끝을 내라면 낼 수는 있겠지만.’
바닥을 물들인 마력을 움직이기만 하면, 무방비하게 새로운 화살을 장전 중인 사샤를 쓰러뜨리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허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재미의 영역이긴 하지만, 사샤가 꽤 마음에 든 것이다. 스칼렛은 싱겁게 끝내기보단 그녀의 전력을 더욱 끌어내고 싶었다.
“다시 한 발!”
때마침 장전이 끝났다.
마력을 때려넣는다. 막대한 마력을 압축시켜뒀어도, 날뛰는 바람의 마력만큼은 멋대로 풀어두었던 첫 발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바람의 마력마저도 한껏 압축하고 압축시킨다.
서리 화살 위에, 폭풍의 마력을 한없이 눌러 코팅이라도 하듯 두른다.
그 파괴력도 상당할 터,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과연 스칼렛의 장벽이 뚫릴 것인가에 온 신경이 쏠린 듯 했다.
그리고.
사샤가 손을 놓았다. 마력 장벽을 긁어대던 첫 번째의 화살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그녀가 쏜 두 번째 화살이 날아꽂혔다.
파앙!
‘역시.’
장벽이 한 장 깨졌다.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구를 사용한 공격이 연달아 두 발씩 꽂히니, 결국 깨지고 말았다.
"됐다!"
사샤가 짧게 환호했다. 일격에는 무리였어도, 이격째에 스칼렛의 장벽을 깬 것이 몹시 기뻐 보였다.
“후, 후후. 보셨죠, 제 비장의…!”
슈욱.
맛보기였다는 듯, 여전히 폭풍과 한기를 뿌려대며 스칼렛에게 돌진하던 화살을 냉큼 집어삼킨 흑색 구슬만 아니었다면, 좀 더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히죽히죽….
사샤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흐, 흐흐. 뚫었다구요, 제 화살이!”
스칼렛은 만일 시커먼 남자가 저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댔다면, 그것도 자신의 마력 장벽을 깨서 그런 거라면, 냉큼 그림자로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쁘니까 봐줘야지.’
고운 소녀의 미소란 그토록 사람의 자비를 쉽게 이끌어내곤 하는 법이다.
“아카데미에서는, 저밖에 없다구요. 그쵸?!”
스칼렛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사샤가 방방 뛴다.
“공녀님도 저한테 졌네요~! 으히히. 딱 대! 공작 전하 장벽 첫개통은 바로 저라구요!”
원래 저렇게 입이 험했나?
아니. 그보단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발언이었다.
북부 사람은 과연 이런 녀석들밖에 없는 건가….
스칼렛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진 순간이었다.
왠지 검성이 억울해 하는 소리가 들린 듯 했지만,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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