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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52화 (152/199)

〈 152화 〉 준결승 (3)

* * *

사샤가 콧노래를 불렀다.

“흐흥, 흥, 흐흥…!”

내 마력 장벽을 깼다는 사실이 그리도 좋은지,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는 모습이다.

기분이 좋은 것은 이해한다. 그래도 ‘첫개통’ 같이 오해 살 법한 단어는 자중해줬으면 좋겠는데.

“에헤. 공녀님보다 제가 한 발 빨랐어요. 그렇죠? 그렇죠?”

아직 끝맺음을 짓지도 않았거늘, 이젠 아주 나한테까지 들이대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승패의 결과보다도, 자신을 늘 고생케 하는 안나를 놀릴 거리가 더 중요한 듯 싶었다.

너무 신나서 그런지.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참고로.”

“네헤?”

신나서 방방 뛰는 사샤의 모습이 보기 좋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오해를 하나 정정해주기로 했다.

물론 아카데미 안에서 내 마력 장벽을 부술만 한 사람이 거의 없긴 하지만.

“네가 최초는 당연히 아니고, 마찬가지로 너 뿐인 것도 아니다.”

“…응? 으응?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이다. 이윽고 내 말의 뜻을 겨우 이해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곤.

“누, 누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아직 공녀님한테는…. 아, 혹시 아이리스 황녀님…?”

그 말대로.

아직 화력이 부족한 안나는 역부족이다.

솔직히 안나도 ‘영구동토의 활’ 수준의 보구를 들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니콜라이가 내어주지 않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뭐.

아무튼 안나는 아니다.

허나.

“한 학년 위에 누가 있지?”

“…아앗.”

나의 누님.

내가 사랑하는, 나의 레티시아.

잊고 있었다는 듯, 사샤는 고개를 떨궜다.

“그, 그분은 조금 논외….”

“마찬가지. 아이리스도 가능하거든.”

“…우리 공녀님 어떡해요?”

안나의 측근으로서, 나와 안나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알고 있는 사샤는, 결승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무조건 아이리스를 거쳐가야 하는 제 주인이 안쓰러웠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사실 안나가 결승에 올라오지 못해도, 개인적으로 시간을 낼 생각이었지만….

미리 말해둘 필욘 없겠지. 일단 안나가 바라는 것은 결승에서 나와 마주 서는 것일테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사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그 아가씨는 왜 그런 소리를 하셔가지고."

모시는 사람 이전에 친구. 허물 없이 대할 수 있는 벗의 입장으로써, 자신의 친구가 걱정되는 듯 했지만.

“아무튼 뭐…. 그분 일은 그분이 알아서 할 문제고요….”

아무튼 그건 뒷일. 그렇게 속으로 결론 낸 사샤가 다시 한 번 영구동토의 활을 들어올렸다.

끄그그극. 다시 활시위를 당긴 사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최초도 아니고, 유일도 아닌 제가 얻을 수 있는 업적이 뭐가 있을까요?”

“글쎄. 내 장벽 하나 깬 걸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뭘 모르시네요.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그 ‘체페슈 공작’의 마력 장벽이라고요? 이만한 스펙을 또 어디서 얻겠어요.”

글쎄.

지체 높은 후작가의 따님이 신경 쓰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문제 같은데….

스펙 운운하는 것은 그야 농담일테지만.

그래도. 남들 앞에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업적이라고 한다면, 과연 가슴이 뛸 법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숨겨놓은 거라도 꺼내면 뭐라도 되지 않겠어?”

빙그레 웃으며 그리 말했더니. 사샤가 안색을 살짝 굳혔다.

“…그런 거 없는데요.”

“정말?”

끄덕.

끄덕?

끄덕….

이런.

아무래도 보구의 진명까지 개방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외에도 더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쉬이 드러낼 순 없는 부류의 것이겠지.

“역시 여기까지인가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비록 숨긴 패를 모두 드러낸 것은 아니어도, 비장의 무기라 할 수 있는 보구까지 꺼냈는데도 제 생각보다 결과가 신통치 않으니 아쉬운 듯 해보였다.

“잘했어.”

“네?”

괜히 기운이 팍 죽어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게 안타까워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 날 보던 사샤가, 이윽고 픽 웃곤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아깝다.”

기권이었다.

짧은 경기였지만 그녀의 보구 덕에 볼거리는 꽤 많았던 싸움이었기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멋지다!”

“다음에 또 멋진 모습 보여줘!”

“1학년 생도의 자랑! 사샤!”

들려오는 환호성 속에서 한 문장을 캐치한 내가 사샤에게 말했다.

“1학년의 자랑이라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사샤가 슬쩍 나를 흘겨보았다.

“전하도 1학년 생도시거든요?”

“나는 조금 논외라며.”

“그건 그렇지만….”

입을 오물거린 사샤가, 끝끝내 말을 잇는 대신 옷을 탁탁 턴 뒤 공손히 내게 허리를 숙였다. 마치 평소 안나의 곁을 지키던 모습처럼.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녀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빨리 바뀌지.

손에 무기가 없어서 그런가.

*

안나 크로이체프.

북부의 지배자. 천년 제국의 시작을 함께 한, 뿌리 깊은 대가문 크로이체프 대공가(家)의 유일무이, 적법한 후계자.

그 핏줄에 흐르는 검성의 자질.

아마 그녀는 별다른 굴곡 없이, 단순한 단련만을 반복하더라도 몇 년 뒤면 당연하다는 듯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찬란한 재능이기에.

안나는, 차기 검성은, 자신의 재능에 취하지 않고, 일검(一?)을 휘두를 때마다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정진해온 나날들이기에.

그녀는 비로소.

드높은 경지에 올라, 서열전에 올라온 쟁쟁한 상대들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전부 ‘단 일 합’만으로 꺾을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준결승.

무대의 위로 올라온 안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결계. 어지간한 공격으론 흠집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를 확인한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이번 결투는 중요했으니까.

그 분을 만나기 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

연적이라면 연적.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사람. 제국의 황녀, 아이리스. 그녀가 바로 안나의 이번 상대였다.

이미 아이리스와 안나의 대결은 꽤 큰 호응을 이끌었다.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사샤와, 그 분… 스칼렛의 결투 역시 꽤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는 했으나.

그 누구도, 체페슈의 가주가 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아이리스와 안나의 결투는?

아무도 결과를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누가 승자가 될 지 감히 점칠 수 없는 상황.

그런 상황이기에,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끄러워.’

술렁이는 사람들의 목소릴 들으며 안나는 생각했다. 다른 때보다도 무척 날카롭게 가다듬은 감각이 선명했기에.

그리고.

다가오는 인기척.

술렁이던 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고, 마침내 조용해진 무대에서.

“….”

안나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검기가, 그녀의 손을 타고 검신에 피어올랐다. 그 절제된 부드러움이 그녀의 경지가 얼마나 드높은지를 표현했다.

‘마스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대륙 전체에서도 대접 받을 수준의 강자.

그럼에도.

‘언제….’

안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언제 저렇게….’

안나 역시 저렇게 오러를 뿜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오러의 양을 늘리는 정도라면, 오러를 다루는 실력만 받춰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얘기하곤 했다.

‘황녀와 공녀 중 누가 더 강한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녀와 아이리스 두 사람 중 누가 더 강할지, 사람들은 그 의문을 해소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화륵!

입장하면서부터, 검신에 오러를 피운 채 걸어올라오는 아이리스의 모습을.

마치 성화(?火)를 들고 입장하는 것처럼.

검신에 금빛 오러를 피어올린 채 입장하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찬란하게 빛을 뿌리며, 거칠게 피어오른 빛의 오러.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오러의 양.

아이리스가 비스듬하게 들어올린 검이 뿌리는 찬란한 황금빛의 오러에, 침묵하던 주변이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허어….”

“아무리 오러가 많아도 저렇게까지는….”

원래부터 타고난 자질을 활용해, 오러의 양과 질 모두를 앞세워 압도하는 식의 전투 방식을 고수하던 아이리스를 알고 있는 이들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평소에도 오러를 낭비하듯이 싸웠다고한들. 어디까지나 싸움이 시작된 이후의 얘기가 아닌가.

준결승. 이곳까지 올라오며, 이토록 많은 양의 오러를, 그것도 채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찬란할 정도로 피어올린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광경은 뭔가.

저것은 마치.

다들 아이리스가 피어올린 오러의 압도적인 양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안나마저도, 그랬다.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많은 오러의 낭비.

입장하고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꺼뜨리지 않고,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

‘…벽을 넘은 거야.’

마스터의 경지.

진정한 의미에서, ‘초인’이라 불리우는 자들.

한 학년 위의 레티시아가 그러했으며, 제국의 황제와 기사단장과 같은 높이.

언젠가 안나가 다다르고자 한 목표에 아이리스는 이미 도달한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결과가 명백했다.

아이리스가 이겼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안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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