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준결승 (4)
* * *
솔직한 심정으로. 안나는 지금 이 상황이 꼭 누군가 자신을 악의적으로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마음을 다잡았는데. 멋지게, 아니 멋지게는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이겨서. 그리고 결승전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다. 결승전에서 온 힘을 다해 부딪친다. 비록 그를 이기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검을 맞대는 것으로 전해지는 순수한 진심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딸아. 기억해두거라. ‘검’에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단다. 네 솔직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을 때, 한 번 진심으로 검을 맞대 봐라. 그럼 상대도 네 마음을 알아줄 거다.’
과연 검성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그런 아버지가 언젠가 해주었던 충고를 떠올린 안나가, 며칠씩이나 고민한 끝에 용기를 내었던 일이었다.
자신이 수줍게 마음을 고백하면, 스칼렛이 받아준다. 이미 그들은 치열하게 검을 맞대 서로의 진심을 교환한 상태일테니까.
다른 사람이 봤을 땐 무척 어설프고 엉망진창인 계획이지만, 아무튼 안나에겐 그런 계획이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화륵!
마치 불꽃처럼 피어오른 오러가, 안나의 눈에 들어왔다.
‘마스터’의 경지라는 게, 그토록 쉬운 것이었나?
당장 논외 취급 받는 체페슈 남매는 그렇다치고, 불과 올해 입학 때만 해도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던 아이리스가 어느새 벽을 넘어 아득히 멀리 가버리고 말았다.
원래도 어느 한 쪽이 우열이라고 볼 수 없는 사이였다.
그 날 하루의 컨디션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그야말로 라이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관계.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안나조차, 아이리스가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 찬란한 오러를 보라. 지금 이 순간조차 숨이 아득해질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의 오러를.
안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과시였다.
아이리스의 과시.
자신이 가진 힘을, 그리고.
‘오빠는 내 거예요.’
사랑하는 남자와의 관계를.
아이리스가 스칼렛과 함께 자리를 비운 몇 주. 그 사이 아이리스는 벽을 넘어 경지에 올랐다.
라이벌이라고, 연적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사실은 가진 힘도 관계도 모두 자신을 아득하게 넘어서고 있었다.
그 시간들이, 그 사실들이 안나를 초조하게 했다.
안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할 수 있을까?’
기다려달라고 했다.
찾아가겠다고 했다.
이미 모든 걸 다 가진 남자다. 안나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지만,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 하나 없다고 해서,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초라했다.
그 사람한테 자신은 없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하지만.
그래도.
“어쩌라고.”
“음?”
중얼거린 말이 들려서일까, 아이리스의 눈이 꿈틀거렸다. 빠른 반응이었다. 안나가 움직이기도 전에, 극도로 발달한 마스터의 육감이 아이리스의 몸을 움직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채앵!
선공은 안나.
하지만 먼저 받아친 것은 아이리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서, 눈 앞에 찬란히 빛나는 오러의 크기에 안나가 이를 갈았다.
“나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입이 열리기도 전에, 아이리스의 날카로운 반격이 들어온다.
“읏!”
작열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오러의 빛이 안나의 검을 잡아먹을 듯 넘실거린다. 그 상태로, 힘싸움에서 이긴 아이리스가 바짝 파고들어왔다.
“흣.”
아주 가벼운 기합.
아니. 웃음소리에 가깝게 들리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아르카디아 제국 칠검.
제 삼검(? 三?)─땅 긋기.
생각을 이을 겨를도 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상황에서 명백한 하수는 안나.
잡생각 따위를 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호흡을 정리한다.
자세를 잡는다.
아르카디아 제국 칠검.
대대로 여신의 축복을 물려주는 황가의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 검술.
여신의 축복을 받아, ‘마스터’의 자질을 타고 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검술인 그것이야말로, 가히 제국 최고의 검술이라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아이리스의 검이, 제국 최고의 검이라면.
자신의 검은.
북부의, 검성의 검은.
제국 최강의 검이다.
크로이체프 류(?)
초승달 베기.
콰앙!
오러와 오러의 부딪침. 돌풍이 일었다.
“…큭!”
안나는 짐작했다.
방금의 합에서 자신의 오러가 깨지지 않은 것은, 상대가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오러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반면, 아이리스의 오러는 오히려 한층 더 크기를 키워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듯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었다.
검을 부딪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안나는 대공의 조언이 재차 떠올랐다. 확실히, 아이리스와 검을 겨루니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도둑고양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썩 기분이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역시, 검을 겨루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것으로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알 수 있다.
지금 자신과 겨루고 있는 것이 아이리스가 아니라 스칼렛이라면 좋았을텐데. 안나는 묘한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꿈틀.
아이리스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뭐지?’
왠지 모를 기분 나쁨.
사실, 아이리스는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안나를 막아설 생각이 없었다. 그냥 져주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만일 진다면 지는 거겠지만, 일부러 져줄 생각이 굳이 없을 뿐.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쁘지?’
방금 전 나눴던 일합. 거기서 뭘 느낀 건지는 몰라도, 얼굴이 환해졌다가, 이윽고 다시 기운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푹 쉬는 안나의 모습이 괜히 기분이 나빴다.
꼭, 정말로 도둑고양이가 자신의 것을 탐내는 것 같은 느낌.
‘내가 무슨 생각을….’
천성이 착한 아이리스다. 사람을 더러 도둑고양이라고 생각하고는, 지레 놀라고 말 정도다. 아마 아이리스 혼자였다면 쉽게 마음을 다잡을 터였다.
혼자였다면.
「아이리스.」
‘…여신님?’
아이리스는 의아했다. 요즘들어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별달리 말을 걸지 않는 여신이었기에. 오랜만에 들려온 여신의 목소리가, 아이리스의 의식을 살짝 빼앗았다.
‘빈틈…!’
그리고 아무리 마스터가 된 아이리스와 현재 격차가 심하다한들, 마찬가지로 약간의 계기만 있다면 벽을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안나가 그 빈틈을 놓칠 리 없었다.
파앗! 날카롭게 압축한 오러가 검신을 감싼 채 안나가 도약했다.
“아. …흡!”
허나 잠깐 의식이 흐트러졌던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자세를 잡아 안나의 검을 쳐내는 아이리스. 묵직한 충격이 필드의 바깥까지 퍼져나갔다.
“윽. 여기까지 저릿저릿 한데.”
“예상 외로 공녀가 선전 중이야.”
규격 외로 평가받는 이들에 비해 색이 바랠 뿐, 아카데미의 생도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대륙에서도 그 재능을 인정받은 이들이기에, 충격파를 능숙하게 흩뜨린 이들이 말했다.
‘…칫.’
절호의 기회를 손쉽게 받아넘긴 아이리스의 모습에 혀를 찬 안나. 정작 아이리스는 중요한 순간에 말을 건 여신의 탓에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아이리스, 네가 저 아이를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여기는 것은 알고 있단다. 하지만….」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도, 도둑고양이라니. 아무리 안나 양이 얄미워도 그렇지….’
「나는 얄밉다는 말은 한 적 없단다….」
‘….’
여신은 아이리스의 편이다. 스칼렛의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것은 알고 있고, 그 사실에는 엄연히 여신 자신의 탓도 있는데다, 그는 그 정도의 보답을 받아 마땅한 남자이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신의 본심은, 그녀가 밀어주는 ‘히로인’은 아이리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인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신은 나름 자신이 만든 세상의 아이들인만큼, 모두를 아끼는 자애로운 여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는 루나 테일러라거나.
그런 아이들에게는 좀 더 관심을 쏟긴 하지만.
어쨌든 가장 밀어주는 히로인은 아이리스다.
헌데 지금 상황을 봐라.
꼭 안나가 ‘시련을 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위해 꿋꿋이 일어서는 히로인’ 같고, 아이리스는 ‘히로인에게 시련을 내리는 악역’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아이리스 말고 다른 아이들도 좋아하는 여신의 입장에서 차라리 연적이 늘면 늘었지, 아이리스가 악역 같은 포지션을 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연적이 생기면 하렘러브코메디가 되지만, 히로인을 괴롭히는 악역이 되면 장르가 아예 바뀌어 버리니까.
「꼭 네가 나쁜 악역영애 캐릭터가 된 것 같지 않니!」
‘죄송하지만 여신님. 악역영애가 뭔지, 또 악역영애면 악역영애지 악역영애 캐릭터는 또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물론 아이리스는 미칠 맛이었다.
아까부터 여신이 말하는 것들이 도대체 뭐가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구마를 먹이는 히로인은 인기가 없느니, 하며 부산을 떨다가도, 이내 ‘정의로워야 할 용사가 질투심에 나쁜 짓 하는 것도 의외로 먹히지 않을까…?’ 같은 소리를 하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끄응…!”
결국 아이리스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사람들의 눈에는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던 오러가 살짝 시들해진 듯 보였다.
‘지친 건 아니야.’
물론 마스터의 경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고 있는 안나는 그것이 아이리스가 지쳤다거나 해서가 아님을 알았다.
‘노림수가 있나? 유인?’
잠깐 고민하던 안나가 눈을 빛냈다. 검성의 직감이, 여기서 파고들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앗!”
쾅! 콰아앙! 아이리스와 안나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터져나오는 굉음이 살벌했다.
일격일격이 어지간한 기사가 몸속에 담아둔 오러를 단 번에 뿜어냈을 때에야 나올 법한 파괴력을 보였다.
「아이리스! 역시 여기서는 조금 져주는 게…!」
“흐아압!”
양쪽에서 자신을 통 괴롭게 하는 터라, 아이리스는 울상을 지었다.
“아 진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