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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54화 (154/199)

〈 154화 〉 준결승 (5)

* * *

쾅! 쾅! 콰앙! 연달아 터져나오는 굉음. 아카데미의 생도들조차 눈에 쉬이 담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검격이 오간다.

“와. 미쳤다.”

“야. 너는 좀 보여?”

“좀 흐릿하긴 한데….”

오러의 잔상만을 보며 대충 상황을 파악하는 생도들도 있고, 실기 성적이 우수한, 개중에서도 마법학부를 제외한 전투학부의 생도들만이 겨우겨우 흐릿하게나마 따라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맞지?”

“어.”

“미쳤다 진짜. 황녀님 우리랑 나이 비슷하지 않나?”

“너보다 두 살 어리지.”

대화를 나눈 생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 생도 역시 나름 우수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뜻임에도, ‘진짜 재능’을 눈 앞에 두니 절로 겸손해지고 만다.

갓 스물이 된 나이로 오러 마스터가 된다.

매 세대마다 꾸준히 마스터를 키워낸 황실도, 대대로 후계자에게 검성이란 칭호를 물려준 북부의 대공가에서도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당장 대륙 유이의 그랜드 마스터인 북부의 대공마저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렇다면 아이리스는 그 북부 대공이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소모한 시간의 절반만으로 그와 똑같은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 어린 탑주님 못지 않은 재능이구만….’

혀를 끌끌 차는 마탑의 마법사. 저 건너편에서 체페슈 공작의 싸움을 보고 있을 작은 탑주를 떠올린 마법사의 눈이 아이리스를 쫓았다.

마탑 역사상 유례 없을 재능.

아크메이지였던 전 마탑주에도 비견 될 마나 감응력과 지배력. 그것들을 보며, 이 이상의 재능을 보게 될 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마법사의 눈이 안나를 향했다.

“공녀도 만만치 않은데.”

“그러게. 진즉 끝날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관중들이 술렁였다. 마스터와 그 벽을 넘지 못한 자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그렇기에 아이리스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을 알았을 때.

안쓰럽지만 모두가 안나의 압도적인 패배를 예상했다.

헌데.

“…성장하고 있다?”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전투학부 출신이 아니라, 두 사람의 격전을 봐도 직관적인 이해는 모자라다 하여도, 대신 마법사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꿈틀거리며 조금씩 몸집을 불려나가는, 정순하고 밀도 높은 안나의 마력이.

‘…괴물이 또 있었군.’

이토록 찬란한 세대가 또 있었던가.

마법사는 쓰게 웃었다.

*

크그그극! 검날이 부딪쳐 긁히는 소리와 함께, 부딪힌 오러의 파동에 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안나의 몸이 유려하게 움직인다. 최적의 검로를 찾아 검극을 꽂아넣는다.

카앙!

아이리스가 무심하게, 빈틈을 노려 들어온 검을 쳐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방금까지 안나의 검이 들어오던 검로를 파고들어, 반격하듯 찔러들어온다.

“흐읍!”

안나 역시 쉽게 당하진 않았다. 몸을 빙글 돌린다.

크로이체프 류(?)

그림자 베기

흐릿해진 신영.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오는 아이리스의 검을 가까스로 빗겨나가며, 다시 한 번 깊게 파고든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오러의 형상이 검날의 위로 새파랗게 압축되었다. 범위를 줄이고, 오러의 소모력이 빨라지는 대신, 그 파괴력을 극대화 시킨 것이다.

화악!

아이리스의 검이 빛났다. 안나가 압축시킨 오러의 밀도에 맞춰, 아이리스의 금빛 오러 역시 그 색채를 더했다.

안나와의 차이점은, 그녀가 오러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조건을 더한 데에 비해, 아이리스의 오러는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

쿠웅!

재차 검이 부딪힌다. 정확히 똑같은 밀도의 오러는 어느 한 쪽이 밀리는 일 없이 팽팽히 맞섰다.

“…크읏!”

안나가 이를 악물었다. 아이리스가 부드럽게 검을 물린다. 안나 역시 거기에 휩쓸리는 대신 자세를 가다듬었다.

퉁. 가볍게 뒤로 물러난 아이리스. 안나는 자만하지 않았다. 마스터가 된 아이리스라면 분명 쉽게 받아치고 반격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는 대신 뒤로 물러난 걸까.

“후우, 후우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안나가 검을 고쳐쥐었다. 땀방울을 손으로 슥 닦고는, 지친 기색 하나 없는 황녀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는 거예요?’

정작 아이리스는 속에서 자꾸 말을 걸어 자신을 방해하는 여신에게 투덜거리는 중이었지만.

쉽게 받아칠 수 있던 상황에서도,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신의 탓에 쉬이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혼란스러운 와중이라도 순식간에 판을 끝낼 수 있으리라.

마스터란 그런 존재이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져주는 건 너무 어색하단 말이야. …그렇다고 여기서 이기는 것도 그림이 좀 별로고.’

말했다시피 아이리스는 굳이 안나를 이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시작하자마자 검의 영역을 전개했으면 됐을 일이었다.

원래 천성이 착하기 때문인지, 져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신이 말한대로, 왠지 자기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적이라 할 수 있는 여자한테 쉽게 져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다.

「아이리스….」

‘좀 조용히 해주세요.’

마치 재밌는 소재의 치정극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태도의 여신까지.

불경한 말이지만, 솔직히 좀 민폐다.

그렇게 시간을 꽤 오래 끌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안나와 아이리스 사이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리스가 어설픈 연기로 져준다고한들 그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당사자인 안나조차 쉬이 인정할 수 없으리라.

「끄응.」

그 점은 여신도 인정하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곤 잠잠해진다.

‘져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계기가 있어야….’

정말 당연하게 ‘져준다’라는 표현을 할만큼 현재 안나와 아이리스 사이의 격차는 컸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아이리스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만 될 뿐.

‘차라리 그냥 내가 이기면 안 되나?’

결승에서 만나기로 한 건 내가 아니라 저 여자 사정인데?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아냐. 나도 오빠랑 지금 같은 관계가 아니었으면 어떤 심정일지 몰라.’

아무리 그래도 비슷한 사정인데…. 라며 측은한 마음에 이만 져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아파…! 그러게 오빠는 왜 그런 약속을 해가지고…!’

여자를 꼬실 줄만 알고 뒷마무리는 할 줄 모르는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이렇게 자기만 난감해지고.

“후우우.”

아이리스가 그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안나는 주의를 놓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굴욕적이긴 하나, 그럴만 하다고도 생각했다.

그 정도의 격차가 있었으니까. 인정하기 싫어도, 이 정도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더 약하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추월해버리면 된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서,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 내고….

“…어?”

순간, 안나가 벙찐 목소리를 흘렸다.

아이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저 여자가 갑자기 왜 그러나 하는 얼굴이 됐다. 안나는 그조차도 눈치 채지 못하고.

“…스칼렛 님?”

아이리스에게도 참으로 낯익은 이름을 뱉었다.

“…그런 식으로 저를 속이려 해도─.”

순간 안나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불쾌함에 눈썹을 찌푸린 아이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이미 경지에 오른 그녀였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아마 저 멀리서, 이곳을 천리안으로 내다보고 있을 뿐.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에서야 느낄 수 있는, 세계의 흐름을 뒤틀어놓는 거대한 존재감.

저것이 기억을 잃고 나약해진 상태라는 것을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지금이다! 아이리스!」

‘네, 네? 아. 방심한 틈에 접근해서 이기라는….’

「아니. 방심한 상태니까 져주라는 뜻이다! 그럼 스칼렛도 좀 더 네게 신경을 써줄 거 아니니.」

‘아.’

그러니까. 여신이 말하는 것의 요지는 그거였다. 안나에게 져주는 모습을 보여서, 스칼렛의 호감을 사라는, 한 마디로 ‘뒷바라지 해주는 착한 아내’를 연기하라는 건데.

‘오빠가 그걸 좋아할까요?’

「싫어할 남자가 어딨겠니. 적어도 네가 손해 볼 건 없단다.」

손해가 없다니.

솔직히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만약 안나의 계획대로 된다면 아이리스의 입장에선 무시할 수 없는 연적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고.

스칼렛이 좋아해준다면 눈 딱 감고 저지르지 못할 것도 없으나….

만일 그가 ‘신성한 싸움에서 일부러 져주다니!’라며 화를 내면 그야말로 얻은 거라곤 없이 손해만 막심한 것 아닌가….

「다 방법이 있단다, 아이리스.」

‘뭔데요?’

「원래 남자란 약간의 호의는 짐짓 마음에 안 드는 척 할 수 있어도, 감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군침 도는 호의는 모른 척 받기 마련. 네가 그에게 사근사근 달라붙어 ‘오라버니~♡’하며 애교만 부려도 잘 통할 거란다.」

‘아니.’

아이리스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리 그녀와 여신이 이제 거의 한 가족과 다름 없는 사이일만큼 친해지긴 했다지만, 대륙의 주신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의 여신이 이토록….

그러니까.

저속한 표현을 하다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궁금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서, 아이리스가 조용히 물었다.

‘…제가 어떡하면 되는데요?’

「잘 듣으렴. 잘만 하면, 화를 내긴커녕 밤새 예쁨 받을 수 있을테니까.」

밤새?

아이리스는 그 마성의 단어에 혹하고 말았다.

소곤소곤.

속닥속닥.

끝끝내 여신의 설명을 모두 들은 아이리스는, 결국 행복한 미래를 떠올리며 힐쭉 웃고야 말았다.

「침 닦으려무나.」

‘…스읍.’

사정은 모르겠지만 아이리스가 한참이나 멍을 때리는 것을 본 안나가 검을 다잡았다. 희미하지만 스칼렛의 기척이 느껴져 자신 역시 멈칫하긴 했으나 아이리스는 정도가 심했다.

순간 자신을 속이려는 연기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경지의 차이가 크다 해도 연기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기에. 명백히 ‘반격할 의사가 없음’을 읽어내곤.

도약한다.

그리곤 빈틈으로 찔러들어오는 안나의 검을 아이리스가.

“…!”

타앙!

생각보다 너무 강하게 들어와서, 제대로 쳐내지 않으면 위험할 뻔 했다.

‘뭐, 뭐죠?’

「그새 성장했구나.」

‘제가 얼마나 힘들게 마스터가 됐는데! 드래곤한테 죽을 뻔도 하고!’

「보통은 거기서 벽을 넘는 게 아니라 죽는단다.」

아무튼.

순간 위협을 느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안나의 모습에 분통을 터뜨린 아이리스였지만. 일단 당장의 승패보다는 여신과 함께 꾸민 계획에 더 정신이 팔린 상태.

“…?”

결국 방심한 탓에 아슬아슬한 차이로 져버린 모습을 연기한 아이리스가 아쉽단 얼굴로 내려가고.

어리둥절. 자신이 어쩌다 이긴 건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안나가 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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