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55화 (155/199)

〈 155화 〉 준결승 (6)

* * *

밤.

준결승이 끝나고, 준결승에서 떨어진 아이리스의 소식에 밤을 양보해준 레티시아와 데이지의 빈자리에 묘한 온기만 머무른 채.

스칼렛은 아이리스와 함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이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살짝 당황한 듯 흠칫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스칼렛은 난감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아이리스.”

“왜요?”

“…이쪽 봐.”

“흥.”

스칼렛의 달래는 목소리에 넘어갈 뻔 했지만,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한다.

아이리스도 내심 조마조마했다. 여신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일단 저지르긴 저질렀으나 스칼렛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다.

「그래서 한다는 게 스칼렛이 따지지 못하게 먼저 분위기를 잡고 있는 거니?」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여신의 핀잔에 아이리스는 기분이 상했다. 자기가 누구 말에 넘어간 건데. 적어도 여신님께선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다가도.

“…별일 아니에요.”

괜시리 사랑하는 남자한테 투정을 부리는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입술을 댓발 내밀고선, 고개를 돌려 스칼렛과 눈을 맞췄다.

“별일 아니면 뭔데?”

스칼렛은 또 그녀가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안나에게 진 게 분해서 그런가 했다. 방심하다 진 것도, 진 거니까. 사실 스칼렛으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방심을 했어도 아이리스가 안나에게 질 리가 없으니까.

아니면.

일부러 져줬거나.

“…킁.”

아이리스가 헛숨을 삼켰다. 스칼렛의 붉은 눈동자가 괜히 무서웠다.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여 치맛자락을 살짝 구겼다.

“…맞아요. 제가 져준 거.”

“그랬구나.”

아이리스가 용기 내어 사실을 밝혔다. 스칼렛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지 않고 물끄러미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재차 손가락이 꼼질거렸다.

“괜찮아.”

그가 뻗어온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손등을 감싸곤, 손가락 사이사이 틈새로 파고들어 약하게 깍지를 꼈다.

서늘한 감각이 아이리스는 왠지 안심이 됐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조금씩 입을 열었다.

“…제가 일부러 져주는 걸 오빠가 좋아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응.”

“오빠가 좋아하지 않아도, 오빠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어요.”

“그래.”

“…제가 너무 주제 넘었나요?”

스칼렛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환해지려는 찰나, 스칼렛의 입이 열렸다.

“다음 번엔 그러면 안 돼.”

“…응.”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이리스가 슬쩍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뜻이었다. 스칼렛은 군말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비비적…,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비비던 아이리스가 그를 올려다 봤다.

“오빠.”

“응.”

“화났어요?”

“아니라니까. 뭐가 그렇게 걱정 돼?”

“응….”

말끝을 흐리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그제서야 스칼렛은 그녀가 무언가 숨겨놓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너 뭐가 있구나.”

“…뭐, 뭐가요?”

“지금 나한테 화났냐고 묻는 게, 진짜 화났으면 어쩌나 싶어서 물은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물론 아예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닐 터.

다만 두 사람이 지금껏 교감해 온 시간들이, 아이리스는 스칼렛이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했고.

마찬가지로 스칼렛 역시 아이리스가 속내에 뭔가 감춰두고 있음을 눈치채게 했다.

“있잖아요.”

결국 채근당한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기색이 뭔가 찔려서라기보단, 무언가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라.

“…오, 오라버니.”

“응.”

부끄럼 가득한 얼굴로, 잠잠해졌던 손가락이 다시 꼼질거리기 시작한다. ‘오라버니’라고, 요즘에는 잘 부르지 않던 호칭으로 부르기까지 하면서.

“…제가 준비한 게 있거든요?”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리스가 말을 잇기만을 기다리자, 결국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말했다.

“눈 좀 감고 있어주실래요…?”

“그래.”

스칼렛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처음엔 얘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준비한 게 있다니 조금 기대가 되었다.

화? 애초에 화난 적 없었다. 아이리스가 안나에게 일부러 져준 것 정도는 굳이 그녀가 자백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괘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테지만.

그것보단,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적이 될 여인을 보내는 아이리스의 심정을 짐작했다.

오로지 스칼렛을 위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

스칼렛은 아이리스가 마음 고생이 심했으리라 생각했지만.

‘…다, 다행이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있으마.」

정작 아이리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직전, 안나에게 져주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말해 괜찮지 않았다. 정의로운 용사고 뭐고, 자애로운 황녀고 자시고, 그냥 싫었다.

안 그래도 나 말고도 많은데, 여기서 또 늘리게 둬야 해? 그런 마음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결국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지금은 자신이 앞서 나가고 있지만, 아이리스는 알고 있다. 안나가 끝내 자신이 내려다 볼 수 없는 경지에 오르리란 것을.

언젠가 다시 서로의 경지를 대등한 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날이 생각보다 머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여신이 말해주지 않아도, 아이리스는 알고 있다.

축복 받은 재능.

대대로 황가에 전해져 내려오던 재능이, 오직 아이리스 한 사람에게만 발현했다. 거기에 여신의 선택까지 받았다.

그에 비견할 정도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검성의 핏줄 속에서 유달리 빛나는 검의 재능.

여신의 축복, 선택, 가호. 그런 것들과 비교해도 전혀 빛 바래지 않는…. 아이리스는 문득 자신과 싸우면서도 순식간에 성장하는 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을 다루는 재능 하나만큼은 나보다 월등해.’

아이리스는 안나가 스칼렛의 곁에 있기에 전혀 모자람 없는 여자이긴 하다는 것을, 인정하긴 싫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스칼렛과 운명으로 묶인 루나와 레티시아, 그리고 아이리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미 예전부터 그를 위해 봉사해 온 데이지나 크리스티나보단 못할 지라도.

‘느, 늦게 왔으면, 조금쯤은? 구박도 받고….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안나를 제외하면 아이리스가 제일 늦었다.

사실 정을 맺은 순서만 따지자면 루나와 순서가 어떻게 될지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으나, 아이리스는 루나보다 자신이 앞섰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야 그녀가 처음 루나를 봤을 때, 두 사람 사이에 기류를 생각하면.

게다가 한참 예전부터 알던 사이이기도 하고.

아이리스는 설마하니 루나의 첫경험이 자신의 첫경험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시점이라곤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리스가 가장 마지막.

그러니 늦게 왔으니 구박을 받아도 된다는 건, 그저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한 자기 최면일 뿐.

굳이 변명하자면, 자신은 세계가 점지해 준 스칼렛과 운명으로 엮인 사이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편안해졌다.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안나의 마음을 막아서는 것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칼렛 밀어내기만 하는 것은 역시 불편할테고.

보아하니 어느 정도 받아줄 마음이 있어 보였으니까.

‘하여튼 바람둥이.’

아이리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행동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냥 저질렀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스칼렛의 여인 중 누구 하나가 나서서 언젠가 했을 일이었다.

저지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게다가 스칼렛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이리스에겐 굳이 따지자면 가장 베스트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여신은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는 연인 간의 시간이 될 테니까.

아이리스가 아공간에서 준비해 온 옷을 꺼냈다.

‘…이, 이런 걸 어떻게 입어?’

아이리스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매끄러운 검은 천의 감각이 괜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척 봐도 살을 가리는 면적이 무척 적어서, 이게 속옷인지 옷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여, 여신님! 여신니임!’

「…왜 부르는 거니.」

‘왜 부르자마자 깨어나시는 거예요! 눈 감고 계신다는 게 정말 눈만 감고 계신다는 거였어요?!’

「네가 깨웠으면서….」

혼란에 빠진 아이리스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눈을 감고 있으마….’라고 말한 여신의 말투는 누가 듣더라도 자신의 의식을 재워놓고 있을테니 맘 놓고 뭐든 하라는 말투였기에.

그런 여신이 부르자마자 냉큼 대답했으니 아이리스가 수치심에 화를 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지금까지 쭉 주무시는 척 하고 다 보고 듣고 계셨던 건…?’

「…그보다 왜 불렀는지 얘기해보렴.」

‘여신님?!’

아무튼.

이런저런 투닥거림이 있었으나, 더 지체되었다간 스칼렛이 지루해 할 것이라는 여신의 조언에 아이리스는 울상인 채 옷을 벗어 바닥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스륵, 스륵….

옷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 은밀하면서도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에 스칼렛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오. 스칼렛이 반응했단다.」

‘그, 좀, 조용히 해주시면 좋겠어요….’

여신이 입을 다물고. 아이리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이 가져온 옷을 들어올렸다.

“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이미 하기로 한 것을 물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척 봐도 스칼렛이 무척 기대 중인 게 느껴져서….

…게, 게다가.

‘…이런, 이런 걸 입고, 오빠한테 예쁨 받으면.’

꿀꺽.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살색의 향연에 절로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

시간이 몇 분 흐른 뒤. 아이리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다, 다 됐어요. 눈 떠도 돼요 오빠….”

스칼렛이 눈을 떴다.

그의 눈 앞에 보인 건 한 마리 토끼였다.

“…어때요?”

바니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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