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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66화 (166/199)

〈 166화 〉 설원에 핀 꽃 (1)

* * *

레티시아 스칼렛.

그녀의 등장만으로 전황은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사브나크가 방심한 틈을 타 전장에 난입한 레티시아의 그림자가 칼날이 되어 마족의 군세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사브나크의 육신까지 두부를 뭉개듯 분쇄했다.

「빌어먹을 년이…….」

빠르게 육체를 재생한 악마의 눈에 흉포한 살의가 깃들었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사브나크의 기감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레티시아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기에 생긴 실착이었다.

“흡혈공주……!”

“레티시아 님!”

안나와 에일린은 반갑게 레티시아를 맞이했다. ‘흡혈공주’라는 별명은 조금 부끄러워서 부르지 않았으면 했지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에일린에게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레티시아는 고개만 살짝 돌리고 말았다.

“늦어서 미안해. 수고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쉬어도…….”

“─아뇨.”

“……응?”

레티시아가 날개를 접고 땅을 딛으며 뱉은 말을 끊고서, 안나가 단호히 말했다. 살짝 당황한 레티시아의 앞으로 안나가 다가갔다.

“……저한테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막상 레티시아의 앞에 서니 자신감이 살짝 꺾인 듯 약해진 목소리이나, 그 뜻은 확실히 전해졌다. 두 눈을 크게 뜬 레티시아가, 비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믿어도 될까?”

“……꼭 혼자일 필욘 없죠?”

레티시아와 안나, 두 사람의 시선이 에일린을 향했다. 이제 좀 숨을 돌리려나 싶던 에일린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화들짝 놀라고는.

“아, 그, 그럼요! 같이, 같이 잡아요!”

얼떨결에 그리 뱉고는 속으로 후회했다. ‘…저 악마를 둘이서 잡아? 왜? 악!’ 물론 레티시아도 안나도 들을 수 없는 외침일 따름이다.

「이 오만방자한 것들이…….」

그들의 대화에 불쾌해진 것은 사브나크 역시 마찬가지다.

레티시아는 자신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냉정하게 따졌을 때, 승률은 3할 이하이리라.

그런 괴물을 불러놓고, 도움을 받지 않겠다?

게다가 뭐라. 잡아? 마치 사냥감을 대하는 것 같은 표현에, 사브나크가 격노했다.

「자기 분수도 모르는 하찮은 것들…….」

다만, 그 분노를 속으로 가라앉힌다. 분노에 몸을 맡기는 마족과 고귀한 악마의 차이란 바로 이것이리라.

사브나크에게 있어 레티시아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되려 좋은 일이다. 자신의 불쾌함과 별개로, 사브나크는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대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양분 삼아, 건방진 인간 계집 둘을 씹어먹으리라.

‘엄청 노려보고 있다.’

에일린은 긴장한 듯 낯빛이 굳었다. 다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로브에서 길다란 스태프를 꺼내쥐었다.

“그건?”

“, 프리드리히의 보물.”

영롱한 빛을 발하는 푸른 보석이 달린 스태프를 본 안나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답했다.

비록 기사라 마법사들의 도구인 스태프를 쓸 일은 없을 터이나, 그것과는 별개로, 과연 프리드리히의 보물답게 겉보기에도 전율이 돋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보구였다.

“아크메이지가 아니면 쓸 수 없다고 들었는데.”

레티시아가 흥미롭단 듯 중얼거리자, 에일린이 쓰게 웃었다.

“체페슈와는 알고 지낸지 너무 오래 돼서 그런가. 아는 게 너무 많아요.”

반대로 말하자면 프리드리히 역시 체페슈에 대해 어느곳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레티시아의 말대로, 아직 에일린에게 를 다룰 자격은 없다.

다만.

“단순히 사용하기만 할 뿐이라면, 할 수 있어요. '프리드리히'니까.”

사용 후의 리스크만 감안한다면, ‘프리드리히’의 적법한 후계자인 에일린은 의 주인으로써 그 힘을 빌릴 수 있을 터다.

자신의 가문에 대한 긍지가 엿보이는 대답에 레티시아는 말을 더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사람만 믿을게.”

“맡겨주세요.”

“무운을.”

레티시아가 날개를 펼쳤다. 그녀는 원래 자신이 상대했어야 할 사브나크는 에일린과 안나에게 맡긴 채, 레티시아의 등장과 함께 기세가 기울긴 했으나, 여전히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향했다.

“그럼.”

“네에.”

안나와 에일린. 두 사람은 굳이 서로를 보지 않고도, 어딘가 통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 사브나크. 레티시아의 등장과 견제로 한동안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악마가, 레티시아가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사납게 기세를 부풀리고 있었다.

“못 당할 거 같은 상대가 있을 때는 사리고, 만만하니까 으르렁 댄다 이거죠.”

에일린이 질린 목소리로 중얼댔다. 사브나크가 듣기에 그것은 노골적인 조롱과 도발이었다. 정작 에일린은 긴장한 나머지 속마음이 새어나온 것 뿐이지만.

「….」

사브나크는 쉬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너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이런 것에 넘어간다면, 마왕에게 총애 받는 대악마의 이름이 아깝──.

“저런 치졸한 녀석을 밑에 둔 마왕이란 작자의 수준도 짐작이 가는데요.”

타앙!

사브나크의 신형이 튀어나갔다. 주군의 모욕을 당해 분노한 기사처럼, 모욕을 감내하던 것이 무색하게, 에일린을 향해 돌진했다.

“──.”

에일린은 피하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굳은 얼굴로 를 붙잡은 채 입술을 달삭거렸다. 고속영창에 따라, 그녀의 주위로 푸르른 마나가 휘몰아쳤다.

두렵지 않거나, 근접한 악마를 상대로 방도가 있어서 피하지 않은 게 아니다.

“어딜……!”

안나가 재빠르게 사브나크의 돌진 경로에 섰다. 무게중심은 아래로, 자세를 잡고서, 베는 게 아니라 오로지 흘려내기 위한 검로??.

「비켜라!」

“비키겠냐!”

안나가 소리 쳤다. 완력으로 따지자면 악마에게 한 수 밀리는 그녀에게, 이를 악물어도 모자랄 마당에 소리를 지를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 오직 기합이다. 악으로, 폐부를 쥐어짜내며, 악마의 외침을 받아치고선.

“네 상대는…… 바로 나야……!”

카가가가가각! 사브나크의 손톱, 아니, 송곳처럼 뾰족한 무언가가 수십 개씩 매달린 살덩어리를 안나의 검격이 쳐냈다.

「무슨……!」

끝내, 안나의 검이 사브나크의 육중하고도 빠른 몸뚱이를 흘려내 완전히 궤도를 바꿔버리자, 사브나크는 당혹스럽게 외쳤다.

당장 레티시아가 난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공격을 막기 급급하던 여자였다.

그마저도 에일린의 버프가 있었기에 겨우 버티던 것. 그러던 안나가, 이제는 버거워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공격을 쳐냈다는 사실이 사브나크에게 모종의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성장 속도다.

이 여자를 이대로 두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이곳에서 죽인다!’」

그것이 경배하는 마왕, 바알을 위하는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사브나크의 기세가 달라졌다.

“큿!”

안나가 신음을 삼켰다. 강렬해진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니, 절로 검을 쥔 손에 땀이 맺힌다.

허나, 물러설 수 없다.

두 눈에 굳센 결의가 깃든다.

고집을 부려서 얻어낸 기회다.

안나에게 사브나크는 버거운 상대다. 레티시아도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남매가 쌍으로, 사람을 미치게 해요 정말……!”

닥쳐오는 공격을 빗겨낸다. 폭발하는 살의가 안나의 생존본능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못 이긴다.

하지만.

‘믿어도 될까?’

‘믿을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다.

‘할 수 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안나가 차마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에일린의 보조가 없다면, 안나는 사브나크를 상대로 잠시 버티는 것마저 버거웠을 터였다.

“하아아아……!”

푸른 오러가 피어오른다. 미칠 듯 타오르던 오러는 어느새 한 없이 정제 되어, 하얀 빛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스칼렛이 안나에게 이곳에 남아달라고 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구는 그 사람이라면, 아마 이곳에 악마가 강림하리라는 것도 예측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예측했을 것이다.

안나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따라서, 스칼렛이 안나에게 이곳을 맡기고 갔다는 것은.

그리고, 레티시아가 스스로 나서는 대신 안나와 에일린에게 사브나크의 상대를 맡겼다는 것은.

“내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천천히 힘을 푼다. 손아귀 뿐 아니라, 전신에서 힘을 빼낸다. 다리의 균형을 잡고, 허리를 비틀어서, 강에서 유?로.

“블리자드Blizzard──!”

때마침, 에일린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빙결계 최고위 마법.

「……!」

단숨에 사브나크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그와 근접전을 벌이던 안나 역시 냉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순간 무아지경에 빠진 안나는 개의치 않았다.

‘팔이 아파.’

관절 부근이 얼어붙은 탓이다. 안나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애초부터 오러의 속성부터가 ‘빙결’인 그녀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얼음과는 상성관계인 사브나크가 전신을 가둔 얼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쩌저적! 냉기의 영향으로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자, 살갗이 찢어진다. 떨어지는 핏방울마저도 얼어붙는다. 극한의 냉기 속에서, 안나의 몸이 잔상을 그리며 유려하게 움직였다.

몸상태는 좋지 않다. 이곳저곳에 충격이 누적되어 있고, 아무리 같은 속성이라 해도 궁극마법의 지근거리에서 영향을 받았다. 아무리 안나가 축복 받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여기까지 오면 무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언제 몸이 덜컥 제동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가벼워.’

뭔가, 뭔가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우연에 우연을 겹치고, 행운과, 또 축복 받은 재능이 합쳐져서.

기묘할 정도로 가벼운 몸을 움직여.

오직 지금 한 순간.

안나의 검극(??)이 하나의 섬광이 되었다.

“───크로이체프 류.”

오의

설화雪?

만개??.

서걱───.

악마의 목이, 팔이, 다리가, 사지가 끊어져 나가며, 그 위로 얼음꽃이 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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