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 설원에 핀 꽃 (2)
* * *
설화, 만개.
꽃이 피었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눈의 꽃이 피어올랐다. 그 자태, 검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맺힌 눈꽃의 형상을 한 오러의 결정.
「!」
사브나크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하고 얼어붙듯 멈췄다.
안나의 검이 베어낸 사브나크의 육신에 푸르른 오러의 꽃이 피어난다. 재생을 막듯 단면에서부터, 천천히 악마의 육신을 뒤덮어간다.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난 눈의 꽃들이 공간을 장악했다. 미숙하나마 공간마저 얼려버린 듯, 안나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한기에 잠식되어 멈춰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정순한 오러만으로는 불가능한, 오러와 검술이 하나됨으로써 완성되는 오의.
그야말로 아득할 정도로 드높은 검의 정수, 그 자체다.
우연이나 다름 없는 성공이었다. 홀린 것처럼 검을 휘둘렀던 안나조차, 자신의 손으로 펼쳐낸 궤적에 얼떨떨한 기색이다.
‘방금은?’
손끝에 남은 감각이 어색하다. 다시 해보려 해도, 지금의 경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리란 직감이 들 정도로.
언뜻 손 끝에 닿을 것 같이 느껴지던 마스터의 경지와는 또 달랐다.
그보다 한층 더 나아간, '그랜드'의 경지처럼 아득한 거리감.
“어, 어, 어떻게 했어요?!”
“저, 저도 잘?”
에일린이 두 눈을 부릅 뜨며 소리쳤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 부주의한 행동이라 할 수도 있으나, 에일린 뿐 아니라 전장의 모든 시선이 안나에게 집중된 상황이었다.
안나 역시 얼떨떨한 것은 마찬가지여서, 멀뚱한 얼굴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기적 같은 확률로 우연히 펼쳐냈다해도, 애초에 우연으로라도 가능했단 시점에서 저 아이의 재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그나마 전장의 상황을 가장 주의 깊게 살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레티시아마저, 안나의 재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만간 따라잡히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용사인 아이리스 뿐 아니라, 안나마저 무섭게 뒤따라오고 있다.
스칼렛을 위해 앞에 나서 싸워줄 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에는 흐뭇해 하면서도, 내심 이러다 추월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
슈르르르.
전장을 휩쓸던 검붉은 혈액의 파도가 레티시아에게 되돌아간다.
“다시 온다.”
콰앙!
레티시아의 읊조림과 동시에, 결계에 갇힌 듯 얼어붙었던 사브나크의 육신이 산산히 터져나갔다.
공간 동결. 그야말로 ‘그랜드’ 급의 존재가 부릴 법한, 세계를 뒤틀어 제 의지를 멋대로 강요하는 권능 그 자체나 다름 없는 수준의 기적이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동결되어버린 공간 속에서, 악마는 사고조차 멈춰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도 안 될 정도의 기적에 당해버린 악마─ 사브나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정답은.
「아아아아아─!」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이다.
그랜드급 권능에 당한 시점에서 온전히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 것이나 진배 없으니.
「내가, 이 내가……!」
얼어붙은 공간을 통째로, 의식을 위한 제물로 사용하여 더욱 상위 서열의 악마를 불러낸다.
진체로 소환된 이상,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즉 자신의 소멸을 뜻하나.
「아아, 폐하……! 이 불충한 사브나크가 먼저 떠나옵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대업을─!」
사브나크.
마왕의 충실하고도 맹목적인 광신도인 그는, 이대로 영원토록 동결된 공간 속에 갇혀있기보다, 사고마저 얼어붙기 전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기를 택했다.
서열 마흔네번째의 악마를 제물로 삼아 나오는 것은──.
「──아아. 당신의 충언, 잘 들었습니다.」
분홍빛 긴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뜬 여인.
한 손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활을 든 채, 스스로를 바친 한 악마의 뜻을 기리며.
「나 시트리, 사브나크의 유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반개한 붉은 눈동자가 안나를 향했다.
“……피해!”
파앙!
레티시아가 외쳤다. 다만 외침만은 공허하고, 이 자리의 누구도 서열 10위권의 악마가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공격을 막아내지도 피하지도 못하리라는 사실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크읏……!’
촤아아악──!
혈루血?. 흡혈공주의 권능이 펼쳐졌다. 시트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형태 없는 충격파를 막기 위한, 악마를 감싸는 형태로 펼쳐진 결계.
쾅! 아슬아슬하게도, 시트리의 충격파가 레티시아의 결계에 막혀 힘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제 역할을 다 해낸 그녀의 결계 역시 거둬들여져 다시 레티시아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흠.」
분홍빛 머리칼을 살짝 쓸어올린 악마가, 반쯤 뜬 눈으로 레티시아를 응시했다. 이미 그녀의 안으로 제물이 되어 흡수 된 사브나크의 흔적을 통해 알아본 바, 사브나크의 사인은 분명 ‘동결’이었을텐데.
「정작 ‘빙결’의 속성을 가진 것은 설익은 여자아이 하나 뿐……?」
의아한 듯 중얼거린 목소리. 공간마저 얼려버리는 그랜드급의 권능……. 그에 따라, 사브나크를 제물로써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는 급의 존재 중 일부러 가장 격이 높은 시트리 본인이 강림하였더니.
「없군요……?」
‘그랜드’급의 존재가.
그나마 방금 그녀의 간단한 공격을 막아낸 저 흡혈귀가, 어느 정도 격이 맞는 상대였다.
사브나크를 봉인한 ‘동결’의 권능은, 저기 쓰러져 있는 하늘빛 머리의 인간 계집애가 부린 듯 하였으나…….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썼으니 눈을 뜨지 못할테죠…….」
그렇다면 제외.
그 외에는, 그런 쓰러진 계집애의 옆에서 마력을 퍼부어 어떻게든 그녀의 몸상태를 호전시키려 하는 마법사 계집애 하나.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얼음 계집애가 죽지는 않을테지만, 시트리는 이해해주기로 했다.
어쨌든 저 아이도 제외.
그럼…….
시트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결국 흡혈공주 하나 뿐.
찬란한 금빛 머리칼, 시트리 자신과 똑닮은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시트리는 그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을까?
노스페라투와의 교섭담당이자, 그들을 후원하는 악마─ 레라지에로부터, 고위 혈귀의 미모에 대해 질리도록 들어온 그녀였다.
자랑 아닌 자랑을 들으며, 언젠가 한 번 그 아름답다는 고위 혈귀의 실물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서열 12위의 대악마는 마치 동경하던 이를 만난 소녀의 심정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열 한자릿수의, 군단장들도 상대하기에 버거워 하는 격상의 존재를 상정하고 온 터라, 저도 나름 긴장을 안고서 이 자리에 강림하였습니다만…….」
시트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대로, 눈 앞의 아름다운 혈귀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릴까요?」
악마가 우아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가슴골을 손바닥으로 살짝 덮어 가리며,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스커트 자락을 살짝 들어올린 채.
「폐하께 열두번째 좌를 내려받은, 정욕의 악마── 시트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비루먹을 인간놈들아? 그리고, 아름다운 혈귀 여성분?」
아무래도, 악마란 것들은 높은 서열일수록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린 놈들인 게 아닐까.
태연히 인사하면서, 고상한 얼굴과 말투로 폭언을 내뱉는 시트리의 모습은 그런 감상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
단지, 아무리 시트리가 그토록 태연자약한 자태로 폭언을 내뱉어도 이 자리의 그 누구조차 감히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느끼는 격의 차이가 듣높았을 뿐.
‘안 좋아…….’
시트리가 인정했다시피, 유일하게 그녀와 맞상대가 가능할 레티시아만이 입술을 깨물고 상황을 살폈다.
군단과의 싸움은 이쪽의 승리로 기울었다. 시트리가 자신의 군단을 소환한다면 또 다르겠으나…….
‘서열 사십 언저리의 악마를 제물로 열두번째가 소환됐으니……, 군단을 불러올만큼의 리소스는 없을 거야.’
추측에 불과했으나, 사실에 가까웠다. 다름 아닌 고위 서열의 악마를 ‘진체’로 불러오는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사브나크가 자신의 영멸을 대가로 시트리를 불렀다한들, 그 리소스가 충분할 리는 없었다.
이미 소환된 시트리가 자신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마계에 있을 자신의 군단까지 소환하기에는 아직 충전이 더욱 필요하리라.
단지.
‘저 괴물 하나만으로도 전황이 뒤집히게 생겼어.’
안나는 한계를 넘어선 이적을 벌이느라 리타이어. 에일린은 도움은 되겠으나 쓰러진 안나를 지키는 데에 급급할 터였다.
전장을 리드하며 존재감을 뽐내던 로베르 백작, 루펠드 후작 역시 아쉽지만 유의미한 전력이 못 된다.
그 실력은 둘째치고서, 우선 안나나 에일린과 같이, 악마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아──.」
언제든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긴장된 몸은, 악마가 따분하다는 듯 내뱉은 나른한 음성에마저 움찔 반응했다. 꽈악……, 으스러져라 쥔 붉은 창에 오러가 넘실거리며 흘렀다.
언제든지 튀어나가 눈 앞의 악마를 꿰뚫기 위해.
「응. 반가워요? 거기, 혈귀분?」
그런 레티시아의 살벌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시트리는 빙그레 웃었다. 악마만 아니었다면, 아니, 그녀가 악마─악마의 존재를 모르나 그 불길함에 몸서리치던 이들을 포함해서─임에도, 그 웃음은 매력적이었다.
시트리는 그저 자신의 인사를 무시한 레티시아에게 제대로 된 반응을 받아내고 싶었을 뿐이지만.
“……뭐야?”
레티시아는 경계를 놓지 않고 물었다. 살짝 비아냥대는 기색이 말투에 녹아있었다. 시트리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개의치 않았다기보다, 그게 뭐 어떠냐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호의를 받을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잘 알았다.
대신.
「이전부터, 고위 혈귀와는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습니다만…….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으로 만나니 무척이나 아쉽네요.」
쩌적, 쩌저적. 시트리를 중심으로, 일대가 천천히 일그러진다. 마치 거울이 깨지듯이.
“단순히 기의 방출만으로……!”
레티시아의 경악성을 뒤로 하고, 시트리가 아쉽다는 듯 한탄했다.
「레라지에 그년이, 자기가 만난 고위 혈귀의 얘기를 할 때마다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차라리 제가 노스페라투와의 교섭담당이 되었어야 했다며 후회하곤 했는데. 이렇게 당신을 만난 것을 보니 그게 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봐요!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미친 년……!”
상황과 동떨어진 말. 레티시아가 질린 기색으로 날개를 펼쳐 날아오름과 동시에, 그림자를 뻗어 다른 이들을 휘감아 허공에 띄웠다.
「사실 처음엔 좀 무서웠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랜드 클래스의 상대라면, 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적은 없었네요.」
어쩌면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사브나크의 간절한 부름에 응하기는 했으나, 시트리 역시 죽고 싶진 않았다. 그것이 영멸을 뜻한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이곳에 그녀를 위협할만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지금, 시트리는 욕망을 풀기로 했다.
「아아, 여성분이 아니라 남성분이셨다면, 제 첫경험을 드렸을지도 모르는데…….」
“첫경험?”
뚝.
시트리도, 레티시아도 굳은 듯 멈췄다. 누구 맘대로 첫경험을 남의 남자한테 주냐 마냐 따지려들던 레티시아의 입이 다물렸다.
시트리 역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자신의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숨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열두번째의 대악마가, 그것도 쾌락과 정욕의 악마가 첫경험? 그건 좀 흥미로운데.”
느릿하게,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대는 목소리. 아무 긴장감조차 없는 말투임에도, 시트리가 장악했던 공간이 야금야금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남의 영역을 파헤치고 집어삼키는 ‘격’.
「‘그랜드……? 아니, 아닙니다. 그랜드라고 하기엔 무언가 모자라요. 헌데 이 격은 대체……?’」
누구보다 이 자리에서, 그 힘의 존재감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시트리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랜드’라고 부르기엔 모자라다. 허나 그 격을 따져놓고 보자면 ‘그랜드’나 다름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대체 누구……!」
멋대로 움직였다간 죽는다. 그런 본능적인 경고조차 무시하고, 고개를 돌린 시트리가 본 것은.
“그래. 마음에 드나?”
「아.」
찬란함. 빛. 아니 흡혈귀니까 어둠. 아니 근데 완전 빛.
「나, 낭군님……?」
“진짜 누구 맘대로──!!”
침을 꿀꺽 삼키고 이 대치 구도를 지켜보던 레티시아가 빼액 소리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