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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69화 (169/199)

〈 169화 〉 설원에 핀 꽃 (4)

* * *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 자신이 피어낸 얼음으로 빚어낸 꽃.

그 뒤의 기억은 없다. 다만 확신할 수 있다. 안나는 분명 그때, 단 한 순간이나마 ‘이치’에 닿았다.

악마를... 쓰러뜨렸다. 아직도 손 끝에 남은 감각이 낯설다.

‘여긴….’

감았던 두 눈이 뜨이고, 안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얀 설원.

북부, 크로이체프의 영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대륙 어느 곳보다도 척박한 땅이라며 은근히 멸시당하면서도, 안나는 고향이 좋았다.

아버지가, 크로이체프가 오래도록 지켜온 땅이 아닌가.

실제론 이곳, 대륙의 북쪽 극단까지 정복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곤 하지만…….

어쨌건 안나는 고향을 좋아했다.

오랜만에 보는 고향의 정경에, 그리운 기분이 든 안나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안나.”

한참 설원의 지평선 너머를 응시하던 안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무척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대공이 안나를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마치 단단히,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듯이.

동시에, 새하얗던 설원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보거라.”

여전히 눈이 내리고, 새하얀 설원이 저 끝까지 펼쳐져 있다는 것은 동일하나.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상처가.”

“그래.”

대공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새하얀 설원에 아로새겨진 균열이 있었다.

아주 거대한.

단순히 설원의 땅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공간에 새겨져, 허공에 쩌적 금이 간 것처럼 보이는 ‘상처’의 존재에, 안나의 다리가 떨렸다.

“괜찮으냐.”

“네, 네…….”

이래서, 이래서 아버지가 날 잡아주셨던 걸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안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꼴사납게 넘어진다고 해서 아버지가 저에게 실망하거나 하진 않을테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보거라.”

안나가 제자리에 똑바로 선 것을 확인한 대공이, 걱정스레 그녀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상처’를 응시했다.

“저것이 무엇인 것 같으냐.”

“……‘그랜드’급의 존재가 남긴 흔적? 뭔가, 엄청난…… 무언가를 발휘해서.”

안나의 말끝이 흐려졌다. 단어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랜드’급 존재의 몸에서 펼쳐 나오는 무?가, 정말 순수한 무술인가?

반대로, ‘그랜드’급이 펼치는 마법이, 정말 단순한 마법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단순한 분류, 기교, 위력……. 그 모든 것들의 울타리를 뛰어넘었기에, 비로소 그랜드 클래스─ 초월자라 불리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 안나는 세계에 저 어마무시한 흉터를 남겼을 ‘무언가’를, 감히 어느 하나로 콕 집어 부를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흐리게 된 것이다.

“반은 맞았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안나는 의아했다. 이 정도로 거대하고, 또 지워지지도 않는 흔적이다. 그랜드라면 그랜드이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그랜드급의 존재 둘.”

안나는 숨을 삼켰다. 안나는 자신이 ‘그랜드’급의 존재에 대해, 이 대륙에 있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자신했다.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크로이체프 대공이 바로 그랜드 마스터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랜드’급 존재 한 명의 힘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도 잘 알았다.

“둘 씩이나요?”

대륙의 역사 중, 한 세대에 두 명 이상의 그랜드 클래스가 존재한 적은 극히 드물다. 거의 없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러니 니콜라이와 스칼렛, 두 사람의 ‘그랜드’가 존재하는 현 세대가 대륙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라고 불리우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그랜드’가 둘? 둘이서 여기서 싸웠다고?

“대체 언제…….”

“아주 먼 옛날이다. 선대의 선대……, 그보다도 아득할 정도의 옛적. 크로이체프가 제국의 검이자 방패가 되기도 전의.”

정말 아득한 옛날이다. 크로이체프는 제국이 왕국일 적부터 존재했으며, 그때부터 지금껏 쭉 충성스런 신하였고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기에.

아연해진 안나에게 니콜라이가 말했다.

“제국의, 왕국의 크로이체프가 아니라한들, 우리는 북부의 수호자이니. 그 시절에도 ‘크로이체프’는 있었을 터다.”

니콜라이가 말끝을 흐렸다.

“천 년도 더 전의 크로이체프가 ‘무언가’와 싸운 흔적. 그것이 지금까지도 남겨져 있는 것이다.”

안나는 그 ‘상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것이 크로이체프의 극의. 자신이 다다를 수 있는 너머의 끝……. 세상에, 이 세계에 천 년이 넘도록 아로새긴 검의 잔상…….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음을 깨달은 대공이, 잔잔하게 웃었다.

“겨우 저것으로 만족할 셈이냐?”

“……겨우?”

안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공이 말을 이었다.

“네게는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재능이 있다.”

“그렇게 말해도…….”

아직 마스터조차 되지 못했다. 그런데 대뜸 그랜드 클래스의 얘길해도……. 안나가 입술을 비죽 내밀자, 니콜라이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봐라. 이미 너는 그걸 증명했지 않느냐.”

“……네?”

니콜라이는 대답 대신 손짓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눈을 돌린 안나가 “아.” 탄성을 내뱉었다.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새하얀 설원에서,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아카데미의 정경.

얼어붙은 악마. 그 육신으로부터 피어난 꽃. 피어난 꽃의 위로 또 새롭게 한 송이 피어나고, 그 위로 또 한 송이…….

그렇게 영원토록, 무한히 순환하며, 시간마저 얼어붙어버리는 영구동토의 결계.

안나가 단 한 순간이나마 펼쳐낸 기적의 형태가, 그 앞에 있었다.

“그렇지?”

흐뭇하게 웃는 대공의 목소리. 안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앗.”

직후, 세상이 산산히 깨짐과 동시에 안나의 두 눈이 떠졌다.

꿈.

꿈이었구나. 자각한 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이른 저녁이었다.

‘악마는 어떻게 됐지……?’

“다 잘 됐으니 누워 있어.”

문득 그녀가 쓰러지느라 미처 다 확인하지 못한, 얼려버렸던 악마가 떠올랐다. 만일 혹시 그녀가 무언가 실수해 봉인이 풀렸다면? 아니면, 다른 이유로……. 고민에 빠지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아.”

“눈 뜨자마자 일어나려 하네.”

파르르 떨면서, 팔을 짚고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를 다시 부드럽게 눕혀준 스칼렛이 혀를 내둘렀다.

“다 잘 해결됐어. 사브나크는 죽었고. 뒤이어 소환된 녀석은 도망가긴 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입을 열어 감사 인사를 전하려던 안나는, 괜히 목이 막히자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갈증에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물.”

감사합니다, 대신 재차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잔을 받았다. 분명 미지근한 물이었을텐데, 그녀의 손이 닿자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리자, 안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게 왜 이러지?

“아직 오러가 진정이 안 돼서 그래.”

그 말대로, 안나의 전신에서 미세하게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스칼렛이, 다시 그녀에게서 물잔을 빼앗았다.

“고개 젖혀.”

“엣.”

안나가 당황한 틈을 타,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살짝 뒤로 끈 스칼렛이 살짝 벌려진 입가로 물잔을 가져갔다.

“읍.”

그새 또 스칼렛이 힘을 써 미지근하게 식은 물이 안나의 입술을 넘어 목구멍으로 타고 흘렀다. 꿀꺽… 꿀꺽…. 몇 분 뒤 갈증이 어느 정도 가신 안나의 입이 열렸다.

“감…… 사, 합니다…….”

“뭘. 몸조리나 잘 해. 몸에 안 맞는 기적을 벌였으니 좀 오래 갈 거다.”

끙, 안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말대로, 겨우 눈을 뜨긴 했으나 몸이 제 말을 듣지 않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서, 이대로 몸이 회복되는 데에 얼마나 걸릴 지도 짐작이 쉬이 가질 않았다.

“아……. 결승은…….”

“내가 수석, 네가 차석. 결승 자체는 무효인데, 대신 지금까지 성적으로 정한다더라.”

안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욕심을 부릴 생각도 없었다. 스칼렛은 따지자면 논외라는 것이 학사 인물들의 공통보편적 인식이니, 안나는 따지자면 실질적 수석이 맞긴 하리라.

“네…….”

다만 안나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적보다 스칼렛과의 약속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칼렛이 혹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내주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며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참.

“그럼 푹 쉬고. 나중에 또 찾아올게. 사샤가 걱정 많이 하더라.”

“아…….”

머뭇머뭇 스칼렛이 먼저 말을 꺼내주지 않을까 기대하던 안나는, 막상 스칼렛이 일어서려하자 울상이 되어선 안타까운 탄식을 뱉었다.

이대로 가버리시나? 그럼, 언제 또 얘기하지? 혹시, 잊어버리신 건가……?

“아, 그…….”

“얘기는. 다 낫고 하자.”

애타는 마음에 어떻게든 스칼렛을 한 번 붙잡아 보려던 찰나. 스칼렛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앗” 하는 사이, 뺨을 감싸곤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빨리 낫고.”

“……네, 네엣.”

드르륵. 문을 열고 나간 스칼렛의 뒷모습을 보며, 안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꺄, 꺄아앗!”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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