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75화 (175/199)

〈 175화 〉 노스페라투 (1)

* * *

날이 좋았다.

“…거짓말. 인상 엄청 쓰고 계시잖아요?”

“거짓말은 아니지. 내 기준이 아닐 뿐.”

적당히 낀 구름과, 맑은 햇빛. 그야말로 ‘놀러 가기 좋은 날’ 그 자체다. 다만 옆에서 핀잔하는 에일린의 말대로, 흡혈귀인 내게는 딱히 좋지만은 않은 날씨이기도 했다.

“그래도 도움 많이 주시는데. 싫은 티 내면 서운할 거 아냐.”

“…? 아, 네.”

살짝 고개 기울이던 에일린이, 이윽고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대로, 태양 자체는 그닥 좋을 것 없으나….

‘여신이 내 편이니까.’

솔직히 날 챙겨주는 건 내게 지은 죄가 많아 보여서 그렇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아이리스 못지 않게 날 신경 써주고 챙겨주려 하는 것 역시도 사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좋은 날씨다, 라는 거지.”

“여신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으음. 그런가요. 저는 여신님의 옥음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뒤에서 은근하게 맞장구를 치는 데이지와,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지만 그닥 와닿지는 않는 것 같은 에일린.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셋이 일행의 전부다.

악마 강림 사건.

아직 제국 전체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그것도 조만간이다. 제국 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 그 힘을 뻗친 황가와 삼대 가문의 협력하더라도, 소식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으리라.

그만큼 아카데미의 한복판에 벌어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특히나 ‘악마’의 존재가 여태껏 숨겨져 왔기에 더더욱.

‘마스터’ 수준의 경지이거나, 혹은 특수한 성질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살갗을 뚫고 데미지를 주는 것조차 불가능한 이계의 생명체들.

그들의 존재가 아카데미의 생도들과, 그 날 참석해 있던 귀족들에게 알려지게 된만큼, 제국은 상당한 진통을 겪게 될 것이다.

‘황가는 악마라 불리우는 생명체에 대해 알고 있었나?’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것이지?’

‘…다른 가문들은? 체페슈나, 프리드리히, 크로이체프는 어떤가? 다른 공작가는?’

같은 내용의 불만이 퍼지거나.

‘그래도 여태껏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건, 그만큼 황가나 삼대 가문에서 적절히 미연에 사고를 방지해두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그 정도의 괴물이다. 어중간한 힘으론 부딪쳐봤자 꺾이기만 할 터…. 여기선 역시 황가와 삼대 가문에 머리를 숙이는 편이.’

그 와중에도 빠르게 흐름을 읽고 우리─황가의 아이리스, 크로이체프의 안나, 프리드리히의 에일린이 모두 내 여자이므로 ‘우리’라는 표현은 가히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 들거나.

그 외에는.

‘우리도 몰랐어! 젠장. 아무리 삼대 가문, 삼대 가문 한다지만, 그래도 제국의 일곱 기둥이라 한데 묶이는 우리들에게도 아무 말 않다니!’

같은.

자신들이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놈들도 있을 터.

‘황가의 핏줄’ 말곤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에, 라는 심정이지만.

어쨌든 나는 바로 그 ‘황가와 삼대 가문’ 중, 그 일각인 체페슈의 수장인 몸이다.

사고를 해결한 몸임과 동시에, 아카데미의 학장, 그리고 아카데미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황제와 더불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몸인 바.

그 책임을 통감해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막 학사를 나온 참이다.

“…보통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게, 교수 같은 직위면 모를까 학부생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슬슬 그만두시려던 참에 사고가 터져 적당히 끼워맞춘 거면서.”

“그런 건 사소한 문제지.”

옆에서 핀잔하는 에일린의 말이야 옳은 말이나, 애당초 나를 순수하게 ‘아카데미의 생도’로 보는 시선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인간과 인외 사이의 연결고리’로써 맺은 친선의 교류. 그 오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히 아카데미에 걸음을 옮긴, 제국을 넘어서 대륙의 실세 중 한 명.

황제가 직접 세운 제국의 법도로 인해 학부생의 신분으로 수학하여 성적을 매기긴 했지만, 정작 교수들조차 성적을 매기는 행위 자체를 부담으로 여길 정도로.

“그러니까 내 자퇴는 의미가 크다. 특히나 악마의 존재에 대해 알려져 대륙에 불안감이 조성된 상태에서는.”

“…아. 전설의 대륙여행담?”

“그건 또 무슨.”

낯설면서도 뭔지 알 것 같은 단어에 눈쌀이 찌푸려졌다. ‘누나’와 함께 대륙의 히든 피스를 찾아다녔을 적의 이야기. 그 과정에서 대륙 곳곳의 사건사고들을 해결했던…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험담이다.

정작 내게 그때의 기억은 없지만.

아무튼 그 이야기는 ‘스칼렛 체페슈’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위업을 모아둔 것이기도 해서,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다.

그런 내가, 아카데미를 나와 종적이 묘연해진다면.

‘아, 체페슈 공작이 옛날처럼 대륙 순회를 돌고 있구나.’라는 인식이 퍼질 거다.

막연하게 불안해 할 서민들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을 귀족 계층 사이에서도 소식이 퍼지면 잠잠해지겠지.

“윗선에서 나서 얘기를 퍼뜨릴테니.”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이보다 적절한 선전이 어딨을까.

‘이거 꼭 흑막이라도 된 기분인데.’

제국의 황실과 유력가문들을 포섭해, 떼려야 뗄 수 없는 유착 관계를 만들어내 제국 내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한다니.

마왕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스토리상 중반부까지 주인공을 방해하는 흑막이나 어울릴 법한 캐릭터다.

‘정작 주인공마저 내 편이란 말이지.’

즉, 완전한 내부의 결속.

불만을 품은 몇 세력이 남아있긴 할 테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

만일을 대비해, 정치적인 조율은 누님에게 맡겨두고 왔으니, 변수라곤 남지 않은 상태…….

“아가씨는 괜찮으실까요.”

“누님을 걱정할 게 뭐가 있어? 시트리도 지금은 제 힘을 못 쓰는 상황일텐데.”

“아뇨. 주인님이랑 꽤 오래 떨어져 있게 될 테니까 하는 말인데요….”

걱정스런 데이지의 목소리. 확실히 걱정할 게 있다면 누님의 신변이 아니라 나랑 떨어져서 스트레스를 가득 받을 누님이 주변에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나랑 떨어진다고 해서 큰 사고를 치진 않을테지만. 최근 들어 누님이 묘하게 집착하는 정도가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문기술자」 특성이 어느새 A랭크까지 오른 것은 나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그림자를 통해 만나거나 해야지.”

“그림자요?”

에일린이 귀를 쫑긋거렸다. 데이지는 눈을 감았다. 에일린은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저, 저 궁금해요. 그림자로 어떻게 만날 수 있나요? 두 분의 그림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연결은 항상 유지되는 건가요, 아니면 두 분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그때 그때 일시적으로 연결되는 건가요? 만일 후자라면──.”

“그만. 하나씩만.”

그래.

씹덕이었다.

시트리가 고위 혈귀 특유의 외모나 분위기를 좋아하는, 흔히 ‘빠순이’나 ‘사생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부류의 씹덕이라면.

“네, 네에. 흥분했네요…. 휴우, 그치만 항상 상상만 하던 것을 실제로 두 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탑에 이름을 둔 흡혈귀가 없진 않은데, 안 그래도 은둔하는 성향이 강한 마법사가 종족까지 흡혈귀라 그런가 약간 대인기피증이…. 헉, 이, 이건 딱히 종족차별적인 의도로 말한 건 아니구요!”

에일린은 ‘인외종’… 그 중에서도 특히나 흡혈귀에 대해 학술적으로 집착하는 부류의 씹덕이었다.

평소에는 속으로만 말하고, 말할 때도 머릿속에서 필터를 몇 번 거쳐 말하면서, 좋아하는 주제가 나올 땐 필터고 뭐고 없어져 듣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에일린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쉴 새 없이 조잘거리자, 익숙하다는 듯 눈을 감았던 데이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림자를 통해 아가씨와 밀담을 나누시고 나면, 다른 분들께서 섭섭하게 여기실텐데요.”

“누님한테 다른 아이들이랑도 연결해달라고 해야지.”

“헉. 같은 흡혈귀가 아니어도 가능한 건가요?”

정확히는, 저쪽에서 연결을 받아줄 사람, 그러니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누님이 나와의 연결을 유지한 채 다른 여자들의 그림자에 이중으로 연결을 이어주는 경우의 얘기다.

“…아가씨께서 과연?”

데이지는 과연 레티시아가 밤 중 나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을 순순히 다른 여자들과 나눠주겠냐는 표정이다.

나도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없긴 한데.

“아앙! 두 분이서만 아는 얘기 하지 말구요! 저도, 저도 껴줘요~!”

…일단, 방방 뛰면서 매달리는 에일린부터 어떻게 하고.

*

밤이 깊었다.

날뛰며 내 몸을 해부하려들 기세이던 에일린의 몸을 주무르고, 물고 빨아주는 걸로 진정시킨 다음.

“헤윽, 윽, 앗, 거기잇… 응, 앙…!”

옆에서 지켜보다, 불퉁해진 얼굴로 난입한 데이지까지 잔뜩 보내버리고.

“저, 저만 맨날 빼놓으시고, 주인님 자지 주세요 얼르은…! 앗, 흐윽! 왔다아…!”

수컷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는 증거를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잔뜩 흔적 남긴 채 드러내고 있는 두 여자가 사이 좋게 누워 기절한 사이, 하룻밤을 보낼 베이스 캠프를 만들었다.

‘나도 좀 자둘까.’

사실은 레티시아를 만나러 갈까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내 아래 깔려 허덕이다 까무룩 기절한 여자 두 명을 두고 다녀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양심에 찔려서.

두 사람이 몸을 좀 회복하고 나면 그때 다녀오자. 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바스락.

“…….”

눈을 감은 지 얼마나 됐다고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

“……헤헤.”

여전히 색색 잠들어 있는 에일린과 다르게, 빠르게 회복한 데이지가 이불 속에 파고들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요망하게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