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노스페라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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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데이지가 본가에 돌아와서 긴장하는 게 큰일은 아니었던─본인 입장에서는 큰일이겠지만─것을 확인한 후, 나 역시 긴장을 풀었다.
다름 아닌 나의 충실한 메이드이자, 내 여자, …그러니까 아내가 될 사람인 데이지가 자신의 본가와 사이가 좋지 않다면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으아앙~! 저희 빨리 가면 안 돼요?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잖아요!”
데이지가 칭얼대긴 했지만.
애초에 데이지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 걸 알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는 걸 알아서, 입술 삐죽대는 그녀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달랬다.
지나가는 길이 맞긴 하지만, 이곳에 아주 볼일이 없는 건 아니라서.
“씨이. 난 몰라요. 나중에 잔뜩 안아주세요.”
“잘못은 그런 편지를 놔두고 온 네가 한 건데.”
“아앙. 몰라요! 해주세요!”
“그래, 그래.”
끝내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서운해 하는 데이지도, 이젠 그걸 빌미로 나한테 잔뜩 안겨드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나저나. 이제 보니, 데이지가 껄끄러워 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철 없는 편지를 써두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인 것 같다.
평생 저택 안에 머무르다, 세상으로 나오고 나니 자신이 써두고 온 편지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달았다거나.
하긴 정말 보는 사람이 어지러운 내용이긴 했어…….
그 편지 내용 때문에 가문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화낼 거라 생각하는 것보다, 그런 철부지 같은 편지를 썼다는 사실로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놀릴 게 걱정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데이지! 너 이 녀석, 그런 편지를 놔두고 가버리고 말이야! 좋았냐, 어? 좋았겠지?!”
“아, 오빠, 부끄럽게 뭐하는 거야~!”
“크으윽……! 네가 멋대로 계승권을 포기하는 바람에, 나는 꼼짝 없이 소가주가 되어서 마음대로 영지를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고! 원래는 성인식을 하고 나면 체페슈령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내가 알 바야?!”
“이 오빠가 얼마나 체페슈령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했는지 알면서 너느은─!”
이 가문.
진짜로 이상해.
진짜로, 진짜 데이지가 남긴 편지를 승자의 도발 같은 걸로 받아들인 거였다고?
“크흑. 데이지 아가씨가 경쟁자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
“우리도 체페슈에 가고 싶었는데…!”
옆에선 분하단 듯 중얼거리는, 방계로 보이는 이들까지.
진짜 뭔데.
“나 어지러워요.”
“나도 그렇다만. 그래도 싫지는 않아. 맹목적이라는 건 좋은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따라준다는 건, 기쁜 일이지.”
“…….”
에일린이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작게 덧붙였다. 잠깐 멍한 얼굴을 하던 에일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듣고 보니….” 그리곤 작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우, 우리 마탑 늙은이들도 만만치 않거든요.”
딱히 그런 어필을 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렇구나. 체페슈에는 블랙우드가 있듯 마탑에는 늙은 원로들이 그 역할을 해준다는 건가.
생각해보니 크로이체프 역시 아일라노바가 있지 않은가. 안나의 절친한 친구, 사샤의 가문.
역시 삼대 가문이라고나 할까.
황실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공작위를 받은 다른 가문들과는 확실히 차별점이 눈에 들어온다.
“주, 주인니임~! 보고만 계시지 말고 도와주세요, 좀!”
아. 사색에 잠기다 보니 그만. 다만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던 것이, 데이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자마자 그녀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 블랙우드의 소가주, 에반이 곧바로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블랙우드의 소가주가 진정한─.”
“아니, 됐다.”
여기 들어오면서 성대한 환영 인사를 받은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나랑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다시 허리를 숙일 줄이야.
아까 에일린에게 조금 질려도 기분이 좋다고 했는데, 이 정도면 재고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체페슈 공작 전하의 앞에서,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사죄도 됐다.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의 앞이니 그럴 수도 있지.”
블랙우드와 체페슈의 관계는 다소 특이하다.
그것은 아르카디아 대륙의, 정확히는 제국의 특이성에 기인하는데, 대개 황권이 강하면 지방 귀족의 힘이 약해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대륙 하나를 영토로 삼은 제국은 대륙 곳곳의 지방까지 그 영향력을 끼치기가 힘들기 때문에, 황실의 힘과는 별개로 영주들의 힘 역시 온전한 것이다.
지방 영주들의 힘이 강한 상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대개 ‘대귀족’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힘이 약한 영지의 귀족들을 아래로 들이는 것이다.
그 대표가 바로, 북부의 크로이체프.
한때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부터 북방의 끝을 지키던 크로이체프는, 왕국이 제국이 되고, 그 강토가 대륙의 극단까지 닿았음에도 여전히 북방을 지키는 칼이다.
그 이유가 바로, 제국의 ‘북부’라고 불리우는 모든 영토를, 그들의 휘하로 삼았기 때문에.
제국의 중심부, 수도의 북문을 넘어가는 순간. 그곳부터 북방의 모든 영토는 크로이체프의 것.
그것을 위해 크로이체프는 북부의 모든 귀족을 휘하로 들였다.
제국의 4분의 1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크로이체프니까 가능하지.’
여신이 점지해준 ‘검성’의 가문. 똑같이 여신의 가호를 내려받은 황가에게 있어, 크로이체프만큼 믿음직한 아군은 없으리라.
실제로도, 어떤 일이 벌어져도 크로이체프가 제국을 배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도 했고.
그것은 지난 천년의 역사가 증명해주었다.
‘아무튼. 크로이체프는 어쨌거나 북방의 주인으로써 북부 전체를 자신의 휘하로 삼았지만, 반대로 말하지만 북부 밖의 영지에는 일말의 관심도 안 줬단 말이지.’
프리드리히 역시, 마탑이라는 자체적인 세력이 있긴 하나, 그들은 대신 프리드리히령 외에 휘하에 받아들인 다른 영지는 없었다.
가문을 나왔거나, 영지가 없는 일반 귀족들이 마탑으로 들어와 세력을 이루긴 했지만.
그에 반해 블랙우드는?
‘체페슈와 아무 연관도 없었지.’
영지가 가깝지도 않고, 혈귀와 연관이 있는 가문도 아니다.
하지만 블랙우드는 체페슈를 모시기로 했다. 체페슈 역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득한 옛날에, 크로이체프가 왕국의 북부를 지키던 시절에, 고립된 블랙우드를 구한 것이 체페슈였기 때문에.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그래도 이건 좀 과한데.”
영지 전체가 나서서 체페슈 덕질이라니. 그럴 수 있나? 천 년 전의 은혜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진심으로 갚으려 한다니.
데이지에게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과하지 않나.
하루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의아해진 나는 가주를 찾아갔다.
원래는 데이지랑 투닥대던 소가주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왜 그렇게 체페슈한테 충성하는 거냐’라는 뉘앙스로 물어봤더니, 충격 받은 얼굴이 되어선, ‘저, 저희가 부족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라며 벌벌 떨길래…….
여하튼 가주를 찾아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아. 그것이…….”
다행스럽게도 소가주처럼 충격을 받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시 말을 머뭇거리던 가주, 로건이 답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역식 그렇지. 뭔가 이상했다니까. 다른 목적이 있어서 블랙우드에 찾아오긴 했지만, 기왕 온 김에 이 문제까지 해결해두고 가야겠다.
“원래는 전하의 용모를 그린 초상화를 벽에 걸어두거나, 전하의 일대기가 담긴 책을 발간해 사용인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거나, 음유시인을 불러 전하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영지민들이 듣게 해 자연스럽게 전하의 위업을 알 수 있게 만드는 정도였습니다만…….”
뭐라고.
“최근엔 불길한 일들이 꽤 많이 벌어지고 있어서,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전하의 모습을 담은 석상과, 전하의 모습을 축소시켜 실내에 장식할 수 있는 자그마한 조각상, 그리고─.”
“그, 그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지하는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진심으로 당황해서, 떨리는 목소리를 조절하지도 못했다.
뭐라고 한 거냐, 지금.
그러니까, 초상화를 그리거나, 책을 배포하거나, 음유시인을 통해 노래를 만드는 정도는 평소에도 있던 일이라는 거지?
게다가 지금은 내 1대1 사이즈 석상과 내 피규어를 만들어서 배급 중이라고?
왜?
이유가 뭔데, 대체.
“예? 그거야 ‘체페슈 가(家)’가 있어 지금의 블랙우드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 사실을 잊은 자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지요.”
무척 당연한 사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오히려 왜 그런 게 궁금하냐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로건의 대답.
나는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쨌든 지금 뭔가 이상현상이 벌어지긴 했다는 거지?”
“예. 그래서 체페슈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그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로건의 뇌절을 끊어낸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묻자, 표정이 어두워진 그가 답했다.
“……노스페라투.”
낯익은 이름.
“노스페라투가, 최근 영지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여튼.
제 버릇 남 못 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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