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83화 (183/199)

〈 183화 〉 노스페라투 (9)

* * *

모두 좋게 끝났다.

겸사겸사 썩은 뿌리들을 도려내 영지의 치안과, 그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통해 영지 내부의 경제적인 안정성을 올렸다.

당장은 영향력 있는 상단 몇몇이 정리당하면서 약간의 타격이 생기기야 할테지만.

그 정도야 뭐.

“체페슈의 이름으로 물자를 대줄테니, 적절하게 나눠주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체페슈령에서 남아도는 물자를 지원해주면 깔끔하게 해결이다. 이것이 바로 부와 권력의 힘? 참을 수가 없구만.

가주 역시 내가 주는 지원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하긴, 나한테 보여준 모습이 영 못 미더워서 그렇지, 그 역시 제국 내에서 내로라 하는 대귀족 중 한 명이다.

믿고 맡겨도 되겠지. 데이지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적어도 그가 나한테 보여준 체페슈에 대한 충심만큼은 어딜 내놔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체페슈 전하께선, 곧바로 떠날 예정이신지요.”

“눈치 챘나.”

“예. 무척 서두르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노스페라투를… 감히 전하의 영역에 지저분한 흙발을 내딛은 후안무치한 역도들의 목을 치러 가시는 것일테지요.”

표현이 좀 과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실로 그렇다.

딱히 블랙우드에 기어들어오지 않았더래도 숙청하러 갔을테지만. 죄목이 더 늘어났다는 게 옳은 표현이겠지.

어제 데이지의 칼끝에 생을 마감한 한 흡혈귀가 떠올랐다.

문득, 내가 「진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진정한 밤의 주인, 달 아래에 가장 위대한 자…. 결국 삼대 가문이 언제나 다투던 이유는, 누구 하나 진정한 「진조」의 후계임을 밝혀내지 못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새로운 「진조」가 나타났다는 사실만 안다면.

──아니.

“역시 안 되겠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이제 와선 모두 늦었다는 얘기다. 놈들은 선을 넘었어.”

만일 녀석들이 새로운 진조의 앞에 모여 머리를 조아리고 그 아래 복속되기를 바란다 하여도, 내가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게다가, 놈들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마왕과 손을 잡기로 했으니. 내가 용서할 리 없을 뿐더러, 내가 아니더라도 대륙의 모든 세력이 놈들을 적대하고 말살하려 들 게 분명했다.

이제 놈들에게 남은 유일한 아군은, 차원의 벽 너머에 있는 마왕과 악마들 뿐.

“자진해서 외톨이를 자처할만큼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었을텐데.”

“……그만큼 폐하의 위명이 무척이나 무겁고 찬란하기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는 무슨. 원래대로 불러라. 난 황실이랑 적대할 생각일랑 없으니.”

“…예.”

로건이 조용히 읍소했다. 딱히 내가 「진조」로 탈각하였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음에도, 내 말 속에 담긴 은근한 저의를 파악한 듯 빠르게 날 부르는 호칭이 변해 있었다.

과연 눈치 빠른 귀족다운 처세술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체페슈 광빠돌이답다고나 해야 할까.

둘 다겠지. 여하튼 내 사람이니만큼 나쁘게 볼 필요도 없다.

“이제 노스페라투에 대한 얘기는 됐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 다른 얘기나 하지.”

“다른 얘기라고 하심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노스페라투를 숙청한 이후, 그 혼란이 만만치 않을텐데.”

드라쿨레아 때와는 다르다.

드라쿨레아는 말했듯 인간은 건드리지 않는 편인데다, 놈들의 본거지 역시 애시당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다만 노스페라투는, 그 본거지는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한들, 그 단말들이 대륙 곳곳, 제국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구석구석 수준이 아니지.

“귀족 작위를 달고 거들먹 거리는 놈들 중에서도 꽤 있을테니, 이 정도면 아주 대놓고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서열전 때, 이름도 잘 기억 나지 않는 그 녀석. 그 녀석의 가문처럼, 버젓이 활동하는 가문만 해도 꽤 됐다.

정작 인간과 가장 교류가 깊을 체페슈는 달리 제국에서 활동하는 작위를 수여받은 흡혈귀가 없다는 게 아이러니.

그 빈틈을 노스페라투가 잘 파고들어서 제국에 영향력을 뿌리내렸으니, 어쩌면 체페슈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노스페라투의 본가가 소멸됐을 때, 제국 곳곳의 이름 있는 혈족들이 어찌 행동하든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해두겠습니다.”

“그래. 너 뿐 아니라 크로이체프, 프리드리히…, 황가에도 얘길 전해두었으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말도록.”

“……예!”

로건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본인과 블랙우드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만큼 다행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고, 정작 한 편으론 내게 온전히 신임 받지 못해 다른 가문과 일을 나누려니 아쉬워 보이기도 했다.

“…나중엔 내 사돈이 될 가문이니 표정 풀도록.”

“예? 아, …예? ……예!”

조금 대답이 느린데.

확실히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긴 하지. 제국의 꼭대기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하나로 뭉친다는 거니까.

“그, 그러면, 제 딸아이는…….”

“당연히 내 사랑스런 부인이 될 예정이다만.”

“…….”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물을 때엔, 혹 사랑스러운 딸이 소박 맞는 신세가 될까 걱정하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만.

내 확언을 듣고 나니 곧바로 풀어져선, “그럼 우리 블랙우드가 체페슈의 사돈가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몇 대나 이어져 온, 가문의 딸을… 종종 본가의 딸을 보내어 체페슈의 주인을 모시게끔 했던 블랙우드다.

드라쿨레아나, 노스페라투라면 모를까.

선대의 체페슈는 대대로 한 명의 아내만 들였던 모양이므로. 지금껏 체페슈를 모셨던 블랙우드의 딸은 첩실의 자리까지는 올랐을지언정 단 한 번도 체페슈의 안주인이 된 적은 없던 모양이다.

그야, 부인을 단 한 명만 들인다면, 혈통을 중요시하는 체페슈의 입장에선 권속이자 인간인 블랙우드의 여자를 정실로 들일 수는 없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나를 제외한 이야기다.

나는 이미 내 여자를 모두 부인으로 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애초에 내 생물학적 친누님인 레티시아를 따먹고 내 여자로 들인 순간 전통이고 뭐고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데이지도 내 부인이다. 일말의 재고할 여지조차 없다.

“크흑……! 데이지, 너란 아이는……!”

그런 단호한 나의 태도에 감명이라도 받은 듯 눈시울을 붉히는 로건.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는 취미는 없어서, 이만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크흐흑……!!”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부담이다.

*

데이지와 에일린은 눈치 빠르게 짐을 챙긴 상태였다. 아마 곧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만.

“조금 기다려.”

“네? 그치만, 지금은 무척 서둘러야 하는 게…….”

“올 사람이 있다.”

두 여자 모두 “올 사람?”이라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아, 루나 아가씨인가요?”

“아니.”

“그럼 누구죠? 아니, 그보다 루나 아가씨는 또 누구예요. 당신 여자가 도대체 몇 명이야!”

받아들여라, 에일린. 나 같은 남자한테 코… 아랫입이 꿰인 여자의 슬픈 숙명이다.

“죽어!”

….

이런 헤프닝이 있었지만.

아무튼 로건에게 당장 떠날 것처럼 얘기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불러둔 사람이, 곧 여기에 도착할 예정이니.

“필요한 사람이다. 노스페라투만 상대라면 모를까, 그곳엔 시트리까지 있으니.”

“아…. 그 대악마 말씀이시죠.”

“……큿.”

시트리에 대해선 말로만 전해들었던 데이지와, 직접 그녀를 상대했던 에일린의 반응이 갈렸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 꽤 자부심 있을 에일린에게 그 날은 꽤나 굴욕적인 기억일테니.

“그렇다는 건, 새로 부른 일행분은?”

“그래.”

대충 눈치 챈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지.

그렇다.

악마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건 통상적으로 ‘법칙’에 일정 부분 관여할 수 있는 ‘마스터’ 이상.

예외적으로 아이리스, 안나, 에일린, 루나…. 네 명의 ‘메인 캐릭터’에겐 경지와는 별개로 악마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특별함’이 존재한다.

그 외에도 한 가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가장 왕도적인 힘.

신성력.

마치 아이리스가 ‘용사’로서, 여신의 힘을 빌어 악마를 멸하듯, 신성력을 부리는 성직자들 역시 가진 신성력에 비례해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다.

다만, 기본적으로 ‘악마’라 불리우는 이들이, 가진 힘의 상성을 제쳐놓고서라도 마스터 클래스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악마의 군단을 상대하는 정도의 도움밖에 안 된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

그 유일한 예외가 바로.

“……성녀님?”

그렇다.

성국의 성녀. ‘용사’ 아이리스를 빼면, 가장 막대한 신성력과 가호를 몸에 품은 여인….

누나에게 속아넘어가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푸른 장미 정원’ 속에서도, 성녀만큼은 남자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그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형은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아이리스의 은발과 비슷한 백발. 아이리스의 은발이 화려하다면, 그에 대조되는 고요하고 깨끗한 순백색의 머리카락.

머리색과 같은 새하얀 눈동자. 여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풍만하고 예술적인 곡선의 육체.

언제 어디서든, 신실한 신앙심과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는, ‘용사’와 마찬가지로 여신을 대리하는 유이한 존재.

“때마침 왔나.”

또각.

발굽 딛는 소리. 블랙우드의 저택 안, 허락 받지 못한 이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

여느 때라면 낯선 이의 기척에 경계부터 했을 데이지조차, 조금 긴장했을지언정 무기를 꺼내려는 기색조차 없다.

아마, 내게 사정을 듣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빛살이 들어온다. 아이리스와 같이 찬란하진 않으나, 마치 그 자리를 영원토록 밝히고 있을 것 같은 아득한 순수함.

“안녕하시어요.”

꾸벅. 조금의 노출도 없이 꽁꽁 싸맨, 흔히 얘기하는 옆트임이나 은근하게 보이는 가슴골 따위 없는, 그야말로 진짜 ‘성직자’ 같은 복장을 한 소녀가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이름은 아델라. 과분하게나마, 여신님의 가호를 받아 교단에서는 ‘성녀’라고 불리고 있답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이가, 마지막 피스로써 이곳에 찾아왔다.

그녀야말로, 내가 쓸 수 있는 히든카드 중의 히든카드, 내가 고른 조커 카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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