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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92화 (192/199)

〈 192화 〉 노스페라투 (18)

* * *

전투의 양상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딸랑, 울리는 종소리.

차르륵, 페이지를 넘기는 책장.

그리고 어둠, 그림자, 핏빛 날개와, 마법.

신화적인 격전 사이에서, 이제 갓 꽃봉오리를 피운 소녀의 검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엔 미약했다.

그럼에도.

「……대체.」

착실하게, 차근차근, 위대한 대악마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미약한 힘으로, 데이지는 주인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이게……?」

그리고 그 궤적 하나하나가 쌓여서, 비로소 마침내 대악마의 종소리─, 형태 없는 파동을 베어내는 데에 성공했을 때.

동시에, 바사고의 표정에 파문이 일었다.

「역시, 대적자여. 여기서 너를 처리해야겠다. 왕의 뜻이 그것과는 다르다 하더라도……!」

왕의 뜻이라.

스칼렛은 그 단어에 괜히 신경이 쓰이면서도,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왜, 데이지가 재능을 개화한 게 꼭 내 탓인 것 같나?”

「그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으니……. 내 권능을 알고 있는 그대가, 혹시 저 아해의 재능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아닐 건 없지.”

「뭐라?」

과연 그 말에는, 바사고는 물론이고, 내심 그 말이 옳다 여기던 데이지까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데이지 본인조차 자신이 마스터가 된 것은 전적으로 스칼렛의 덕분이라고 여겼으니까.

사랑하고, 한 생을 다 바쳐 충성할 주인님이 없었다면, 데이지가 이토록 절절하게 다음의 경지를 갈구할 일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 모든 것은 스칼렛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주인인 덕분에라고.

데이지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칼렛의 말에 데이지는 일종의 충격을 느꼈다.

어째서?

그런 건 싫어요, 주인님.

스스로의 재능으로 올라선 경지보단, 주인님의 은총을 받아 해낸 쪽이 더 좋다.

무(?)를 추구하는 이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지만, 데이지조차 검을 다루는 명가의 출신이니만큼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뒤틀린 것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이룩한 경지가 주인님과의 연결고리이길 바랐다.

그러니까.

“주인님──.”

“기특해 죽겠어, 아주.”

─!

데이지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바사고의 어이가 없다는 눈길에 수치심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주인님이, 기특하다고 하셨는데.

“주, 주인님.”

“혼자 해낼 줄은 알았어. 올곧고, 강한 아이니까. 그래도… 트라우마라는 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스칼렛의 눈이 데이지를 향했다. 기특한, 사랑스러운 여인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길에 데이지의 귀가 빨개졌다.

“음. 지난 번에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긴 했지만, 결국 그게 완전한 치료를 뜻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은 것 같으니 시간을 들여 잊게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거든.”

“주인님……. 저는.”

“알아. 조용히 하렴.”

“흡.”

주인님이, 스칼렛이 바란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무엇이든 저지를 각오가 되어있던 데이지였다.

비록 트라우마에 관련해서는,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몸에 힘이 빠져서 어쩔 수 없었지만.

지난 번 블랙우드에서의 일로 그것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스칼렛이 바란다면 언제 어디서든,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이라도, 어금니가 부서져라 악무는 한이 있어도 무엇이든 기꺼이 해내리라─.

그렇게 말하려던 데이지였지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스칼렛의 제지에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지?」

전투는 꽤 지루하게 이어졌다.

권능과 권능.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에 개입하는 아득한 무형의 힘을 겨루는 와중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원래라면 스칼렛이 일방적으로 밀려야 할 그림임에도, 마치 그의 손발이라도 된 양 아무 말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적절히 상황에 개입하는 데이지의 덕분에, 기묘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상황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간이 뒤틀릴 정도로 거대한 힘이 어느 한 쪽이 힘이 빠지길 기다리며 삐걱거리는 중이다.

그렇기에 바사고는, 스칼렛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데이지와 우스운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는 것도, 묵묵히 지켜보았다.

“데이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랑스럽다고. 이만큼 사랑스러운 메이드가 세상에 어딨겠어? 아마 데이지는 주인님을 위해서일 뿐이라고 하겠지만. 오히려 그게 또 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점이지.”

“흣……!”

데이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주인님께서, 그녀에게 “자랑스럽다”라고 해주셨다.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을까.

+++++

「■■의 마음(A)」 → 「꽃의 마음(A+)」 → 「영원의 꽃(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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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피고 질, 찰나를 상징하는 꽃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영원토록 피기로 했다.

비록 그것이 영원한 박제라고 하더라도.

앞으로 끝없이 피어나게 될 다른 길들을 포기하고서,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남긴다.

그것이 데이지가 비로소 자신을 완성시킨 방법이면서.

동시에 영원토록 지지 않을 한 송이의 꽃이 된 방법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칼렛이기에, 그는 데이지가 한 없이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또 미안하면서도, 기특했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의미 없는 논쟁이었군.」

다만,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스칼렛의 말을 귀담아 듣던 바사고는, 결국 스칼렛의 말이 권속의 자랑일 뿐이라는 데에 생각이 닿자, 잠자코 들어주던 태도를 달리 했다.

바사고의 기색이 달라졌다.

더 이상 들어줄 것도 없다. 이대로 두었다간, 또 무언가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 저 검사처럼.

그러니 이제 끝낸다.

가진 바 모든 수를 사용해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장낸다. 그것이 동귀어진으로 인한 자신의 소멸이라 하더라도 상관 없다고─ 그리 여긴 바사고가 힘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저물거라, 대적자여. 이 바사고가 너와 함께──.」

“준비 됐어, 에일린?”

스칼렛의 말이, 바사고의 말을 끊었다.

─?

바사고는 의아해졌다.

에일린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그만큼 바사고에게 있어 스칼렛 외의 존재는 날벌레와 같은 존재라는 뜻을 함양하기도 했으나, 중요한 것은 바사고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에 시간이 꽤 걸렸다는 것이다.

에일린이라면, 대적자가 진즉에 피난시켜둔 마법사가 아닌가?

그제야 바사고는 에일린이 스칼렛의 그림자 속으로 대피하기 전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무언가를 노림수로 숨겨두고 있었다는 뜻이란 말인가?

바사고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숙한 마법사였다. 진리의 편린을 엿보는 것조차 스스로의 힘이 아닌 저 진조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한, 아직 못다 핀 재능이 아까운 이.

그렇기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권능’을 사용해 볼 생각조차 않았다.

하지만.

「…….」

자존심이 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당장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그야말로 기적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눈 앞에 있지 않은가.

비록 쉬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기적이 기적이라 불리는 것일테지만. 바사고는 허투루 넘어가기엔 상황이 영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수를 준비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친히 나의 권능을 사용해주마.」

차르르륵─.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바사고의 권능이 발현한다.

권능의 힘은 유한하지 않다. 한 번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준비해둔 스톡이 순식간에 깎여나간다.

그럼에도 바사고는 지금 이 순간, 권능을 써야겠다는 본능적인 직감을 느꼈다.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권능’을 쓴다.

대악마의 권능이 시간의 갈래로부터 그녀의 행위를, ‘과정’을 지켜보고, 그 각각의 ‘결과’를 확인한 뒤, 원하는 결과를 ‘결정’한다.

바사고의 권능이 강대한 이유는, 언제 어디서든,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단 점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면, 얼마든지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대악마의 눈동자에, 수없이 많은 갈래들이──.

「……뭐라.」

바사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이건….」

분명히 존재해야 하는 ‘결과’들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게 흘러가야 할 시간의 흐름이, 비틀어져, 엉켜 있다.

이럴 순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건, 그리 가벼운 뜻이 아니다.

세계를 구성하고, 바른대로 이끄는 섭리 그 자체. 바사고의 권능조차도,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갈래의 방향을 이끄는 힘일 뿐. 섭리에는 감히 간섭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왕, 단 한 존재 뿐.

「대체 무슨 짓을……!」

격양된 목소리로 외친 대악마가, 감히 섭리에 간섭한 진조를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도망, 갔다고?」

눈 앞에 보이는 건, 덩그러니 놓인 검은 구체 뿐이었다.

*

꽤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내 기억을 찾기 위한 조건들.

우선 첫째가, 시간의 신전에서 받아온 성물이다.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차곡차곡 내 안에 쌓아준 그것.

덕분에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무의식적인 부분에서 조금씩 그리운 기억 같은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곤 했다.

다만.

이 방법만으론 기억을 찾을 수 없다.

잊은 게 아니라 잃은 것이기 때문에.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것들을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합쳐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여신은 내게 적성을 주었다.

단순히 시공간 마법의 적성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실제론 초월자라 불리는 이들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은, 섭리에 간섭하는 힘.

시간이 없으니까.

원래 예정 되어 있던 시간의 흐름보다도 훨씬 빨라져서, 지체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원래라면 나 역시 넘보지 못했을 힘을, 여신은 그렇게 설명하며 내게 주었다.

잘못 사용한다면 마왕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세상을 멸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한없이 열화시킨 방식으로 몇 개의 마법을 만들어냈다.

블랙우드에서의 탐색 마법.

노스페라투에서의 대결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본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때가 되었다.

준비물은 모두 갖춰졌다.

힘을 쓰기 위한 리소스 역시, 다행스럽게도 충분했다. ‘마왕’을 소환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소환술식. 비록 바사고를 소환한다고 대부분을 소모하긴 했을테지만.

그 바사고가 권능을 잔뜩 사용해준 덕분에, 이 공간 자체가 일종의 ‘신전화’가 진행 되었으니, 정당한 ‘힘’의 집행자로서 신전 내부에 가득 찬 권능을 리소스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시전자는 나와 에일린.

대상은 일행 전부.

기준은 나.

그녀들은 ‘과거의 나’와 처음 만났던 시점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나는.

───가장 최초의 순간.

내가 잃어버린, 이 세계에 ‘스칼렛 체페슈’로 태어나 눈을 떴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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