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과거 : 레티시아 (1)
* * *
“버러지 같은 것.”
촤악!
내 머리를 뒤집어 쓰는 뜨거운 액체. 금빛 머리카락을 타고서, 얼굴과,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검은 물방울들…….
시선을 위로 올리면, 표독스런 얼굴로 내게 찻잔을 들이밀고 있는 여자가 보인다.
꽤 아름다운 얼굴이다.
일그러진 얼굴마저도, 매력적인 요소로 보일 정도로.
그녀가 바로, 전생의 게임 속 스칼렛 체페슈로 환생한 나의 어머니다.
“역사상 다시 없을 재능? 우스운 소리……! 시키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시키는 것.
나의 누님, 레티시아 체페슈의 특성……. 나의 공(?)의 반대점, 형(?)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 그녀를 혹사시키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완숙한 나와 달리, 어린 그녀는 아직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까.
혹사시킴으로써, 가진 바 재능을 개화해 가문을 위해 그 힘을 쓸 수 있게끔, 나의 부모는 그녀의 동생인 내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년의 힘만 있다면, 체페슈의 가세도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단 말이야. 듣고 있는 게냐, 스칼렛?”
“으음. 부인,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레티시아는 아직 어린 아이이거늘.”
옆에서, 어머니의 말을 거드는 남자.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체페슈의 가주.
그가 옆에서 어머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어머니의 옆에서 묻어가려는 우유부단한 태도. 갓 눈을 떴을 때에만 해도, 그것이 유약한 그가 기가 센 어머니에게 휘둘리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우유부단한 태도가 나나 누님이 마음을 놓을 상대를 필요로 할때, 우리의 마음 속에 파고들어 우리가 의존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가면임을 지금은 알고 있다.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크흠. 스칼렛, 그래도 네 어머니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체페슈의 가세가 많이 기울어버린 지금, 레티시아의 힘은 많은 도움이 될테니.”
그래, 그렇다. 이들이 누님의 힘을 원하는 것은 어떤 대의가 있어서도, 어떠한 간절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망쳐버린 가문을,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자신들의 노력이 아니라 어린 딸아이의 힘을 착취하려 드는 것 뿐.
이렇게나 놀라울 정도로 역겨운 인간 군상이 하필 새로 태어난 나의 새로운 부모님이라니.
하필이면, 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됐다. 가보렴!”
축객령이 떨어졌다.
허리를 숙이고, 방에서 나왔다. 등 뒤로 적잖게 짜증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나마 밥값은 하는 놈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말로는 뭐라고 할지언정 내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일이 최근 들어 잘 없었는데.
오늘은 꽤 조급했는지 평소 같았으면 안 할 말들도 해댄 걸 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다.
‘자기들이 다 망쳐놓고선.’
나는 알고 있다. 원래의 ‘체페슈’가 얼마나 위대한 가문이었는지.
처음에는 기억 속 체페슈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몰랐다.
에서 체페슈의 입지는 미묘하다. 여주인공, ‘루나 테일러’가 자작가문 출신임을 감안했을 때, 공작가라는 범접할 수 없는 위치의 가문임에도.
그것이 악역 영애인 내 누님, 레티시아가 가문 내에서 충분한 관심을 못 받아서인지.
아니면 체페슈의 힘이 황가나 다른 공작가에 비하면 약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사건건 여주인공을 괴롭히려 들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항상 힘이 빠져 물러가는…… 쉽게 말해 그냥 여주인공과 다른 남주인공들을 엮어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가문.
나는 원래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실제의 체페슈는 에서 나왔던 모습들과 달랐다.
정확히는, 달랐었다.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 중 하나. 제국을 양분하는 지배자 중 하나…….
그런 것도 다 옛말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체페슈는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내 아버지, 그람 체페슈가 그리 만들었다.
체페슈는 더 이상 가장 위대한 가문도, 대륙을 양분하는 지배자도 아니다. 남은 것은 명목상의 지위 뿐.
그나마 나와, ‘까마귀’가 대륙 곳곳에서 암약한 덕분에 이 정도다.
제국에서는 아르카디아 황실과 크로이체프가 견제하고, 프리드리히가 조금씩 발을 빼낸다.
밤의 세력 중에서는, 체페슈의 힘이 기울었음을 눈치 챈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가 조금씩 야욕을 드러내는 와중이다.
당장 제국 삼공과 밤의 세 가문의 자리에서 이름을 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이가 다름 아닌 나의 양친…….
마음 같아선, 아예 연을 끊어버리고 싶지만.
“스칼렛, 괜찮니…?”
…나는, 환생자다.
다시 태어난 내게, ‘새로운 가족’이라는 건 아무래도 낯설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특히나 부모가 그런 작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나에게 항상 힘이 되어준, 나의 누님.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론 이 세계─ 의 악역 영애인, 레티시아.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 뺨에 손을 얹으며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겨우 커피를 좀 끼얹은 것 가지고.”
“그치만.”
레티시아가 목이라도 매인 듯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나 때문이잖아…….”
서글픈 목소리다. 괜히 듣고 있는 사람마저 우울해질 것만 같은.
“됐어.”
그렇게 말하며 뺨을 어루만지는 손을 떼어내자, 레티시아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한층 어두워졌다.
“……꼭 누님 때문만은 아니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속이 답답해져서,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누님의 발끝도 못 따라오는 재능이야, 두 사람 모두. 열등감에 괜히 신경 써주지 마. 욕은 내가 먹으면 되니까.”
“…그, 그런 말 하지마!”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 어려서 그런가. 내가 한 말이 부담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내 얘기가 부모에게 새어나갈까 싶어 겁을 먹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이 들으면 어떡하려구 그래! ……그, 그리고, 내 일인데 스칼렛이 자꾸, 혼나는 것도 싫어!”
둘 다인가.
하여튼 성격 좋은 꼬맹이 같으니. 이런 녀석이 어쩌다 나중에 극악무도한 악역영애가 된 걸까.
“누님.”
“정말이지, 스칼렛은 똑똑하고 대단하지만 이런 점은 누나가 보살펴줘야…… 응? 왜?”
“누님은 내가 지켜줄게.”
“……어어? 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레티시아는 내 누님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유일한 나의 가족.
그러니 그녀가 엇나가지 않도록, 내가 옆에서 잘 챙겨줘야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여도 만일 그녀가 ‘악역’이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 믿지?”
“…그, 응, 어. 믿지! 응!”
어떤 풍파가 일어도, 그녀가 내게 그러했듯, 나 역시 그녀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그럼, 스칼렛. 오늘도 그거 해?”
“응? 해야지, 그럼.”
레티시아가 내 소매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거’라면, 매일 그녀의 방에서 함께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내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본 레티시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
굳게 닫힌 문, 햇빛을 차단한 암막 커튼…. 그리고 꺼진 등불까지. 어둑한 방 안에서, 색색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헥, 흐으, 스칼렛, 이제 그만…….”
“무슨 소리야. 엄살 부리지 마.”
“누나 이제 한계야 정말…….”
“조금만 더. 할 수 있지?”
“아 진짜….”
뚝…. 턱선을 타고 떨어지는 땀방울. 고운 팔이 목과 턱선을 훑으며 땀을 대충 훑어냈다.
지친 기색 가득한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뺨에 달라붙어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떼주자, 누님이 샐쭉 날카롭게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이렇게 챙겨져봤자야.”
“왜.”
“누나가 힘들댔는데, 억지로 더 시키고.”
“어쩔 수 없잖아. 부모님의 욕망과는 별개로, 누님은 자기 속성을 좀 더 잘 활용해야 할 필요가 있어.”
“으, 잔소리.”
궁시렁대면서도, 막상 또 착실하게 내 지시대로 「형(?)」의 마력을 움직인다.
그렇다.
나는 이렇게 시간을 종종 내어 누님을 지도해주곤 했다. 부모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이 몸의 양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레티시아 본인을 위해.
나의 「공(?)」만큼은 아니지만, 레티시아의 「형(?)」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힘이다.
그러니 이렇게 옆에 붙어, 그녀의 방에서 단 둘이 일대 일 밀착 과외를 해주는 것이다.
“──누님. 한 번만 더 하자.”
“누나 이제 진짜 못해애……!”
정작 한계까지 재능을 혹사한 레티시아가 우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나는 이게 엄살이란 것을 알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당장 양친에게서 레티시아를 혹사시켜서 뭐라도 좀 뽑아오라는 말을 듣고 그토록 경멸한 게 불과 얼마 전이거늘, 설마 정말로 한계까지 혹사시킬리가.
그냥 레티시아가 스스로 느끼기에 ‘이제 한계야!’라는 지점까지 닦달할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건 헬스장 트레이너가 ‘회원님 하나만 더! 하나만 더! 거 봐요, 할 수 있죠?’하는 것과 비슷하다.
부모가 시킨 건 정말 말 그대로 골수까지 빨아먹게, 운동하다 탈수로 쓰러지도록 만들라는 거고.
차이가 크다.
그걸 아니까 레티시아도 칭얼대면서도 잘 따라오는 거고.
“……역시 조금 더 가능할 것 같은데.”
“무리래도?!”
음.
그런가. 무리인가.
“…웃겨? 누나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스칼렛은 지금 이게 웃기니?!”
“아, 미안.”
근데 진짜 웃겨서.
다른 게 아니라, 그냥, 가족이랑 함께 있다는 기분이 드니까 웃음이 나왔다.
……가족.
누나는 어떻게 됐으려나. 동생이 자기 구하겠다고 뛰어들었는데, 무사히 살았을까.
그럼 동생이 대신 죽었다고 엄청 충격 받았겠지. 안 그런 척 해도 마음 엄청 약한 편이고.
……그래도 기왕이면 살았으면 좋겠다. 나야 죽어도 이렇게 환생했다지만, 아무튼 죽는 것보단 이승에서 구르는 게 백배 나으니까.
……보고 싶긴 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