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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95화 (195/199)

〈 195화 〉 과거 : 데이지 (1)

* * *

시간은 또 유수와 같이 흐르고.

나는 체페슈의 옥좌에 앉았다.

‘마스터’가 된 지는 이미 한참. 부모에게는 비밀로 한 채 힘을 모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나를 충직한 도구로 보고 있었으니까. 충실한 도구로써 신뢰를 유지한 채, 그들 몰래 ‘까마귀’들의 충성 맹세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는 굳이 가주의 자리를 찬탈할 생각은 없었다.

까마귀들의 충성을 얻어낸 것도, 그저 최악의 순간을 대비한 것 뿐. 그때라면 정말 남는 방법이 가주 찬탈밖에 없을테니까.

내 목표는 레티시아를 지키는 것. 가주가 된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굳이 가주가 되지 않아도 레티시아를 지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스칼렛……. 나, 너무 아파. 누나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부족한 걸까?”

“아냐, 아냐. 그런 거…. 누님이 뭐가 부족해.”

구슬피 울던 레티시아의 모습. 내 욕심 탓이지만, 그럼에도 그람─ 나의 아버지에게 인정 대신 냉대 받음에 서러워 하던 내 누이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랐기에.

“누님. 나 믿지?”

“……응.”

음.

레티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마찬가지로 레티시아가 아프지 않길 바란다면.

뭐든 해야지.

그것이 패륜이라 하더라도.

일단 저지른다. 원래 용서는 허락보다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 결심이 선 순간 나는 곧바로 움직였다.

찬탈의 날.

─스칼렛, 네놈이 어찌…!

─꺄아아악! 아들아! 어미다, 네 어미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다오…!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 처절한 절규.

생긴 건 곱게 생긴 사람도 최후의 순간만큼은 그렇게나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날이었다.

내가 부모를 죽이고 가주의 자리를 빼앗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 레티시아는 화를 냈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녀의 하나밖에 안 남은 혈육임과 동시에, 지난 수십년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온 당사자이거늘.

…….

“미안해, 미안해 스칼렛…. 누나가 너무 못나서….”

됐다.

다 지난 이야기다. 이제 와 떠올릴 필요도 없겠지.

다시금 현재.

“삼대 가문 회담…?”

저택으로 날아온 초대장을 확인한 레티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삼대 가문.

체페슈, 노스페라투, 드라쿨레아로 구성된 밤의 지배자들.

가주의 자리를 빼앗고, 양친을 그림자 속에 처박은 뒤 수백년간 쌓았을 모든 힘을 빼앗은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까마귀들을 이끌고서 대륙을 일주했다.

제국과 같은 이름을 지닌 이 대륙은 무척이나 넓어서, 한 바퀴 도는 데에만 몇 년을 써야만 했다.

─그대를 어찌 믿겠소? 지난 백년, 대수림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그대는 알고 있소?

우선 대수림과의 교역을 안정시켰다.

선대의 연달은 헛발질과 무례함에, ‘체페슈’란 이름을 들으면 기함부터 하는 숲의 엘프들을 설득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다.

─허허, 거 유쾌한 친구구만! 자네의 선대에 있었던 일들은 다 알고 왔는가?

그 다음은 산맥의 드워프들이었다.

대수림과의 교역을 재개한 것은 좋았으나, 정작 오랜 시간 썩어문드러진 체페슈는 교역할 물품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체페슈는 여전히 돈이 많았다. 게다가 원래부터 체페슈는 대수림과 산맥의 사이에서 그들의 거래를 중개해주는 역할이기도 했다.

딱히 체페슈의 역할이라기보단, ‘삼대 가문’ 중 필두가 나서서 하는 일이었기에, 주도권을 빼앗겼던 선대의 시절엔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가 서서히 선을 넘으며 멋대로 자신들의 라인을 만들긴 했으나.

어찌 됐든, 결코 산맥의 대장장이들과는 직접 거래하지 않는 대수림의 숲지기들이었다. 그 점을 이용해 산맥과의 교역을 틈과 동시에 대수림의 수요 역시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설원의 늑대들의 부족을 하나로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공고히 다진 기반을 발판 삼아, 제국에서의 입지 역시 새롭게 다졌다. 제국을 양분하는 가문의 위상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에 또 시간을 쏟아부었다.

수십 년을 들여 거기까지 성공하고 나니, 체페슈의 위세는 과거를 잊고 다시 드높아져 있었다.

처음 대륙을 일주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은근히 나를 깔보고 무시하던 대수림의 귀쟁이나 산맥의 난쟁이들도, 감히 나를 무시하지 못해 두려움에 떨게 될 정도로.

그래.

지금까진 어린 가주라고 철저히 나를 무시하던 다른 밤의 지배자들이, 참지 못하고 자신들의 영역에 날 초대하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리라.

“……갈 거야?”

“가야지.”

지금의 나는 수십 년 전 갓 가주의 자리에 오른 풋내기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달라진 것은 나를 보는 이들의 시선 뿐.

그러니 가기로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는 내가 가주가 된 이후 한 번도 나와 만나본 적이 없으니, 지금의 내가 어떤지 소문이 아닌 실체를 마주하고 싶을 터.

마찬가지다.

나 역시 놈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누님은 여기 있어.”

“또? 항상 스칼렛은 혼자만 나가고….”

레티시아가 불퉁한 얼굴이다. 부풀린 뺨이, “나 삐졌어!”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미안해. 안아줄게.”

“또, 또 그런 걸로 넘어가려 하구.”

그래도 순순히 안겨 온다. 꼬오옥, 품에 달라붙은 레티시아가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내 품에 안긴 주제에, 나를 품에 가둬두려 한다.

그녀도 알고 있다. 내가 밖에 나서는 것이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돈.

내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오는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나에 대해선 대륙 곳곳에 알려진 이후이니까.

체페슈의 영지가 시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대륙의 중심부를 꿰차고 있는데 모르는 편이 이상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투정이다.

죄책감이 뒤섞인. 내가 누굴 위해… 헌신이라고 표현하려니 낯부끄럽지만, 확실히 나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까, 레티시아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겠지.

“……나도 데려가면 안 돼?”

“그럼 여긴 누가 지키고.”

“…….”

꾸욱! 으스러져라 허리를 끌어안지만, 겨우 이런 걸로 허리가 끊이거나 꺾이는 일은 없다.

말마따나, 사실 그녀가 굳이 영지를 지킬 필요는 없다. 대륙 곳곳에 파견한 까마귀를 제외하고서, 영지를 지키기 위한 까마귀의 숫자도 충분하니까.

그저.

“우리 누님 예쁜 얼굴, 그놈들한텐 별로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

“……으. 그럼, 다른 때엔? 데려가줄 거야?”

“어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응.”

그람이 한때 레티시아를 노스페라투에 시집보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적어도 이번만큼은 정말 그녀를 데려가기 싫었다.

그래도 나를 올려다보는 애절한 표정을 보면 안 된다고 하기도 그래서.

……나중에 황궁이나, 북부에 갈 때 데려가면 되겠지.

“블랙우드의 가주랑 함께 하기로 했어. 로건은 세 가문이 모인 회담에 참석해본 적 없으니까.”

“그래? ……그러는 스칼렛도 처음이잖아.”

“내가 가주가 되고 나선 처음이지.”

선대, 그람일 땐 몇 번 참석했었다. 참석할 때마다 본 게 내 아버지란 작자가 다른 가주들한테 수치를 당하는 것 뿐이라 좋은 기억은 없지만.

그리고 내가 가주가 된 이후엔 아예 소집이 없었고.

“괜찮아. 걱정하지 마.”

“……가서 다 죽일 건 아니지?”

“날 뭘로 보고.”

내가 가서 화를 입을까봐 걱정한 게 아니라 사고를 칠까봐 걱정한 거였나.

아니. 표정을 보면 그냥 너무 걱정하는 티를 내면 내가 역으로 신경 써줄까봐 일부러 농담을 한 것 같지만.

“다녀올게.”

모르겠다.

짜증나게 굴면 진짜로 엎을지도 모르지.

*

요란하게도 지어뒀군.

노스페라투의 성채를 본 나의 첫 감상이었다.

“…여기가 노스페라투의 본성이군요.”

나를 수행하기로 한 블랙우드의 가주, 로건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가의 가주인 그조차도 이곳에선 한낱 인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딱히 실속은 없으니.”

“……그렇습니까?”

마치 ‘여기가?’라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만, 그래도 내 말에 안심한 듯 빳빳하게 굳었던 기세가 풀렸다.

로건 블랙우드.

조금 푼수끼가 있긴 해도 실력과 나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믿을만한 녀석이라 데리고 왔다.

실제로 내 괜찮다는 말만 믿고서 긴장을 풀었으니.

그의 검사로서의 본능은 절대 긴장을 풀지 말라고 하고 있을테지만, 로건은 나에 대한 충성심을 더 우선으로 한 거다.

확실히 블랙우드는 믿을만 하다.

“오오, 스칼렛! 오랜만이구나!”

속으로 로건을 비롯한 블랙우드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하고 있을 때, 낯선 목소리 주제에 불쾌하게도 아는 척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기억하느냐? 모리스다! 모리스 드라쿨레아!”

친히 자기소개까지 해주는 걸 보면 어차피 자기도 내가 기억하리라곤 생각하진 않은 모양이지.

그래놓고서 태도는 퍽 친근하다.

“자아, 모리스 삼촌이라 불러보거라!”

수작이 뻔하다.

“음.”

나는 잠깐 턱을 매만지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누구시라고?”

분위기가 싸해졌다.

“……커흠! 오랜만에 봤더니 어색한 모양이군. 백년 전만 해도 네 아비, 그람과 함께 와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던 것이 엊그제 같으니 원…….”

“미화가 심하시군. 그리고, 언제부터 나와 그리 친했다고 반말이신가? 말을 높이시게. 아니면 나도 말을 놓아도 되겠는가, 모리스?”

“……어허, 이놈이?”

“됐다. 여기서 말씨름할 필요도 없겠지. 로건, 들어가지.”

분위기가 싸해지다 못해 얼어붙었다. 긴장을 풀었다가 바짝 굳어버린 로건이 내 명령과 함께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과연, 그 와중에도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하고 있었나.

역시 블랙우드는 믿을만…….

“음?”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척이 그림자의 기감에 잡혔다.

위치는…… 내 그림자 속.

그림자 속?

뭐가 들어 있더라, 여기.

느껴진 기척을 좀 더 자세하게 읽어봤다.

이건, 블랙우드의 파장인데. 고개를 돌려 로건을 보았다. 서른 중후반의 사내는 여전히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그리고 출검의 영역에서 절묘하게 나를 빗긴 채 내게 다가오는 적을 향해 휘두를 게 있게끔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로건.”

“……예.”

“딸아이가 있었지?”

“…예? 예, 누구 말씀이신지.”

“누구인지까지는 모르겠고.”

한 명, 앙큼하게도 우리를 뒤따라 온 모양이다.

어디에 숨었나 했더니, 회담의 선물이라고 가져온 상자 안에 숨어있었나.

그림자 속에서 상자 하나를 불쑥 꺼냈다.

벌컥! 상자가 열리더니, 분홍빛 머리를 한 소녀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왕자님!”

이런.

제국 안에서 했다면 불경죄로 잡혀갈 발언인데.

과연 로건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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