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과거 : 데이지 (2)
* * *
꼬맹이의 이름은 데이지.
이제 갓 다섯에서 여섯 살쯤 됐을까.
모르는 이름이었다. 내 기억에 없는 이름이란 것은 의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뜻인데.
하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얘기다.
이 세상이 단순한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쯤은, 이미 레티시아를 통해 깨달은 지 오래이니까.
그래도 역시, 한 번쯤은 ‘등장인물’을 보고 싶긴 하다.
“그, 제, 딸아이가 무척 실례를…….”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머리 속에서 무슨 장면들이 지나갔는지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로건이 더듬더듬 말했다.
“음? 음, 괜찮다만.”
만일 이곳이 제국이고, 듣는 귀가 많았다면 아무리 그래도 왕자 운운은 조금 많이 나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아마 그랬어도 괜찮지 않을까. 황자도 아니고 왕자라면 어찌어찌.
아니지. 오히려 왕이 아니라 왕자라고 부른 게 문제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소녀를 벌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도 이런 꼬마가 혼자 나와있으면 위험하니 그림자 속에 있는 게 좋을 것 같군.”
스륵.
그림자를 일으켜서, 너무 갑자기 확 덮치면 겁을 먹을지도 모르니 이불을 덮어주듯 살짝 감싸 그림자 속에서 보호시키려던 찰나.
“싫어! 왕자님하구 있을래!”
“헙……!”
음.
분홍 머리 꼬맹이가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지켜보던 로건은 아까처럼 파랗게 질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그림자 속은 싫으냐.”
“아늑하구 좋았어요! 그치만 왕자님 옆이 더 조아!”
그런가.
솔직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어린애란 존재는 어렵군.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피로 물든 삶 속 레티시아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던 내게, 순수하게 호의를 표하는 꼬맹이의 존재가 꼭.
……결혼도 안 했는데 딸이라고 표현하려니 기분이 묘하다. 그냥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것으로 할까.
“그래.”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
다만 가문 회담이 직전이었다. 회담장까지 이 꼬맹이를 데리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라, 꼬맹이를 번쩍 들어 로건의 품에 안겼다.
“으앙! 아빠 싫어! 왕자님이랑 있을래!”
“이, 이 녀석.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리 우느냐, 울긴? …공작 전하가 물론 무척 멋있으시지만은! 그래도, 블랙우드의 딸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울어대면 전하께서도 싫어하실 거다!”
딸아이를 다그치면서도, “그래도 내 딸이 보는 눈은 있구만. 핏줄은 못 속인다고, 공작 전하한테 찰싹 달라붙는 게 참…. 허허.” 같은 소릴 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누가 블랙우드 아니랄까봐.
“들어가지.”
소란을 피워서인지, 이쪽을 보는 시선이 꽤 노골적이다.
쿵!
발을 내딛으며 진득하게 마력을 뿌려주자, 그제야 시선이 하나둘 거두어진다.
“…스칼렛 체페슈.”
회담장.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의 좌석을 제외하고서 빈틈 없이 채운 채, 늙수구레한 노인이 나를 반겼다.
노스페라투의 장로. 배분만 따지자면 내 선대인 그람보다도 한 세대 위.
그러니까, 내 조부와 같은 세대의 늙은이다.
“늙은이가 굽은 허리로 여기까지 어찌 납셨는지.”
참고로 여긴 노스페라투의 본성이다.
덩달아 자기 집에서도 허리가 아파 쉽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늙은이가 된 노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네와 이런 기싸움을 하자고 부른 건 아니다. 괜한 말씨름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안 넘어오나.
예상은 했다. 이제 막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양가의 가주라면 모를까, 슬슬 기나긴 흡혈귀의 삶도 끝자락에 다가선 늙은이가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성을 낼 것 같진 않았으니까.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 그리고 체페슈……. 우리 세 가문 사이의 교류가 지난 백 년간 끊기다시피 했었지. 새롭게 가주가 된 너를 기념하여, 다시 활발한 교류를 시작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일단 내가 가주가 된 게 백년 전이다.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기보단, 이제야 나를 진짜 자신들과 같은 급이라고 쳐주겠단 뜻이겠지.
피곤한 놈들이다. 솔직히 오기 싫은 자리였다만, 그래도 역시 한 번쯤은 봐둘 필요가 있어 굳이 여기까지 왔다.
결론은,
‘……작정한다면 동귀어진.’
이곳, 노스페라투의 성채에 있는 모든 인원을 상대로 해도, 최악의 경우, 놈들에게 숨겨진 수가 있다는 가정 하에 공멸.
그런 게 없다면 아슬아슬하게 승리.
좀 더 사전준비를 마치고, 한 번에 상대하는 게 아니라 나눠서 격파한다면 깔끔하게.
‘완승.’
애초에 흡혈귀에게 아슬아슬한 승리따윈 없다.
죽지 않으면, 그렇게 해서 일단 이기기만 한다면, 어떤 치명상도 재생할 수 있는 흡혈귀에게는 완승이나 다름 없는 법.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이 더 이상 숨겨둔 수가 없다면.
이들이 현재 체페슈를 제외한 두 가문의 최대전력이라면.
‘크게 걱정할 거리는 아니겠어.’
지난 백 년, 어떻게든 체페슈의 위상을 되살려냈다. 그 과정에서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 두 가문과 마찰은 꽤 있었다만, 큰 분쟁은 없었다.
내가 적당히 나서서 무마하기도 했고.
다른 두 가문 측에서 굳이 일을 키우려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차피 이미 망해가는 배, 굳이 건드리지 말고 알아서 망하게 두자……라는 생각이었을 거다.
실제로도 체페슈는 명백히 다른 두 가문에 비해 많이 약해졌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지나간 말.
결국 이들은 가문의 힘으로도, 그리고 개개인의 힘으로도 나와 체페슈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까지 돼버렸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직접 여기까지 왔다.
확인하고 싶은 건 다 확인했으니, 적당히 때를 보다 돌아가면 되겠지.
“아, 스칼렛. 생각해보니 슬슬 네 누이도 짝을 찾을 때가 아니──.”
“생각 없다.”
그냥 여기서 다 죽일까.
*
아쉽게도 실천하진 못했다.
회담은 그 뒤로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그대로 끝났다.
애초에 정말로 나랑 친목하고 싶어서 나를 초대한 것도 아닐테고, 나도 놈들이랑 딱히 친목할 생각은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나로서는 목표를 달성해 만족스러운 결과이긴 하나, 놈들은 영 미묘한 결과에 내 뒤만 물끄러미 보며 나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어쩔 거야, 내가 간다는데.
그렇게 로건과 데이지를 데리고 복귀했다.
“왕자님~! 가지마~!!”
꼬맹이가 겁도 없지.
다시 내 허리춤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체페슈령으로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안 놔주는 데이지에 로건이 되려 안절부절 못하는 중이다.
그렇게 말해도 가야한다.
레티시아가 기다리고 있거든. 아마 지금도 넓은 체페슈의 저택 어디에도 가지 않고 내 방에 콕 박혀서 청순가련한 공주님마냥 “스칼렛… 언제 오니….” 하고 처량하게 어깨를 떨고 있을걸.
“데이지, 전하는 이제 돌아가셔야 한다! 어서 떨어지거라!”
“아니, 괜찮다만…….”
그보다 부럽다는 얼굴 하지 말라고, 수염 난 아저씨가.
실제론 나보다 어리긴 하지만, 액면가만 따지자면 그쪽이 나보다 두 배는 더 나이 들어 보인다고.
나는 떨어질 줄 모르는 꼬맹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올렸다.
“와아!”
낯을 가릴 줄 모르는건가.
“얘가 워낙 소심하고 낯을 심하게 가리는데, 전하한테는 그러질 않으니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아니군.
블랙우드의 유전자에는 정말로 뭐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먼 선대의 체페슈는 유전자를 다루는 권능이 있던 게 아닐까?
“왕자님 가지마!”
“가야하는데.”
“울 거야!”
애가 이제 협박까지 하는군.
어린애를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살짝 당황했다.
“……꼭 가야해요?”
“그래?”
“……힝.”
하지만 자기도 언제까지고 고집을 부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어린 아이라고 해도, 눈치는 있는 법이니까. 특히 영특한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데이지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고개를 번쩍 들곤 블랙우드의 저택으로 도도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앗.”
그러다 이쪽을 돌아보더니.
“왕자님, 아직 어디 가면 안 돼요~! 아빠, 아빠가 잘 보고 있어야 돼, 알았지?!”
“허허허…….”
막중한 임무를 맡은 로건은 허허로이 웃기만 했다.
과연 꼬맹이가 뭘 찾으러 갔을까 궁금해진 나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졸졸 따라다니는 애가 귀엽기도 했으니.
그렇게 몇 분을 기다렸더니.
“왕자님!”
한 쪽 손에 꽃을 든 데이지가 도도도 달려왔다. 혹시 넘어질까 싶어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연, 이것도 무가의 자질이란 건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도 절묘하게 제동을 걸어 내 앞에 멈춰 선 꼬맹이가, 손에 들고 온 꽃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얇고 가느다란 꽃잎이 촘촘하게 나 있는 새하얀 꽃.
“데이지야!”
데이지가 내게 데이지꽃을 주었다. 슬쩍 받아주었더니, 데이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받았으니까, 왕자님 다음에 또 와야해!”
“그래?”
“응! 데이지가 데이지를 줬으니까, 다음에 와서 데이지 돌려줘야 해!”
“음.”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중간에 논리적인 비약이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 하여튼 선물한 데이지를 나중에 돌려줘야 하니까 자길 다시 만나러 오라는 거겠지.
“그럼 지금 돌려주면?”
쿠궁!
마치 벼락이라도 친 것 같이 굳어버린 데이지가, 그건 생각 못했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어, 그, 그러엄.”
“그렇지만 꽃이 무척 예쁘구나. 다음에 돌려주어도 되겠니?”
“……네!”
그래도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해둘까. 작게 웃으며 벚꽃잎을 닮은 머리칼을 쓸어주자, 소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와 데이지의 묘한 만남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이어지게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