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97화 (197/199)

〈 197화 〉 과거 : 데이지 (3)

* * *

나는 정기적으로 블랙우드에 전달하는 서신을 보낼 때, 까마귀를 통해 데이지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언제쯤 시간이 날테니 만나도록 하자, 라는 내용을 담아서.

편지를 보내고, 약속 장소로는 까마귀가 데이지를 데리고 왔다.

“왕자님!”

하고, 그때 만난 데이지가 웃을 때는 기분이 묘했다. 나이를 먹을대로 먹긴 했지만, 그동안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딸이 생긴 기분이라.

편지를 보낸 것도 꼭 멀리서 일하는 기러기 아빠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내도 없는데 딸이라고 하면 좀.

그래서 딸이 아니라 동생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나는 전생의 누나도 레티시아도 있지만, 동생은 여지껏 없었으니까.

“데이지 만나러 와줘써!”

“그래, 여기 데이지다.”

그렇게 첫 만남 때 받았던 데이지를 돌려줬더니, 데이지가 또 헤어질 때 골똘히 고민하다가 새로운 데이지 꽃을 가져오더라.

“다음에 또 돌려주러 와야해!”

“…그래.”

그렇게.

데이지와 나의 만남은 이후로도 종종 이어졌다.

대여섯살. 소녀보단 그냥 꼬맹이가 더 어울리는 나잇대이던 데이지가, 어느덧 열살이 되어서, ...그래도 여전히 꼬맹이인 것은 똑같지만.

아무튼.

“스칼렛 님!”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꼬마 아가씨가, 더 이상 나를 “왕자님!”하고 부르지 않게 된 것은, 문득 내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라고 느끼게 했다.

정작 데이지 본인은 겨우 열살 주제에 사춘기마냥 부끄러움이라도 타는지 “제가 언제 그랬어요, 기억 안 나요!”라며 시치미를 뗐지만.

어른스러워진 척 해봐야 이제 겨우 열살 꼬맹이다.

제 딴에는 훌륭한 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눈에 다 보인다.

아무튼 요 몇년 사이 데이지와 종종 만나긴 했지만, 로건은 그 사실을 몰랐다.

“아빠가 알면 질투할테니까 안돼요!”

불과 여섯 살 꼬맹이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역시 블랙우드의 유전자에는 무언가 심어져 있는 게 아닐까.

만남의 장소까진 항상 까마귀가 데이지를 데려왔다.

이젠 자기를 데려다주는 까마귀랑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 모양이었다.

역시 안전을 위해서라면 블랙우드의 영지에 내가 직접 방문해 만나는 편이 훨씬 나을테지만, 나는 이상할 정도로 이 어린 꼬마아이에게 약했다.

레티시아를 상대로 하는만큼은 아니지만.

그건 레티시아가 내게 있어 논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서 백년이란 세월을 살면서, 나는 뜨겁기보단 차가운 인간상에 가까워졌다고, 스스로에 대해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스칼렛 님, 안아주세요.”

“그래.”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생명체. 지난 몇 년간 몰라보게 컸다고한들, 그럼에도 여전히 품에 들어오는 꼬맹이였다.

나는 살인자다. 백년 전,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이후의 나였다면 고뇌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살인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을 자격이 있을까?’ 같은.

결론은 이미 한참 전에 내렸다. 레티시아가 흘렸던 눈물과 함께, 나는 내 안의 무언가를 버렸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온 한 인간의 도덕성 같은 것이리라.

이미 이 손에 묻힌 피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어디 전쟁터에서 사람을 학살한 것도 아닌데, 그와 비견할 정도의 목숨이 내 손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람, 나의 아버지라면 굳이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 행위의 책임조차 타인에게 전가했을테지만. 오히려 그런 자를 아버지로 두고서 살아온 나였기에, 나는 내 책임을 져버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고작 죄책감 따위엔 무너지지 않는다.

내 어깨에 올려둔 것 중 무거운 것은 레티시아의 미래 뿐이다.

“스칼렛 님 좋아. 우리 다음엔 또 언제 만나요?”

“글쎄다. 안 그래도 요즘 할 일이 많아.”

“…그럼 못 만나요?”

쿵!

...이 꼬맹이도 조금 무겁다고 쳐둘까.

“아니. 그건 아니고…. 정확히 언제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는 뜻이지.”

“왜요?!”

충격을 잔뜩 받은 얼굴로 올려다 보기에, 나는 다정히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자유분방하다시피 한 블랙우드에서 자라난 덕분인지, 데이지는 귀족답지 않게도 감정표현에 꽤 솔직했다.

그냥 어려서 그런가.

“최대한 시간을 내보마.”

“언제?!”

“그건.”

언제 시간이 날 지는 그야 나도 모른다.

최근 대륙이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북부와 중앙이야 크로이체프랑 황가가 꽉 틀어쥔 상태인만큼 신경을 덜 써도 되겠지만, 그 외는 아수라장이나 다름 없다.

프리드리히는 마탑을 비롯한 자기들 영역 밖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남은 건 체페슈 뿐.

‘다른 공작가문이 도움이 안 되네.’

처음 제국에서 체페슈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제국의 일곱 기둥이니 어쩌니 하며 일곱 공작가문을 비슷한 급으로 표현하는데.

괜히 프리드리히, 크로이체프, 체페슈가 황가와 대등한 취급을 받는 실세가 아니다.

‘황실 핏줄 말곤 아무것도 없는 것들.’

여신의 축복.

그러니까, 정통을 이은 황제의 자식들에게만 이어지는 ‘마스터’의 자질. 황실을 비로소 대륙의 유일무이한 황가로써 존립시킬 수 있는 이유.

그 중 황제가 되지 못했을 뿐 제국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 그에게 내린 공작위가 대대로 이어져, 지금의 공작 가문으로 남았다.

다만 현재는 속 빈 강정이다.

시조가 대단했던 것은 여신의 축복이 있어서니까. 그 축복이 옅어진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들의 시조가 제국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영웅이었다는 사실 뿐.

즉.

“도움이 안 돼.”

“응? 데이지, 스칼렛 님한테 도움 안돼요?!”

“아니, 네 얘기가 아니야.”

“그럼 누구! 데이지가 혼내줄게요!”

귀엽군.

씩씩거리는 분홍색 단발을 헝클어뜨렸다. “익. 하지마요. 머리 헝클어져. 이이익!” 쪼그만 털뭉치가 손발을 휘적대긴 하지만, 쉽게 닿지도 않고 맞아도 안 아프다.

“그런 게 있다.”

그러고 말았다.

확실히 블랙우드가 다른 공작가문들보단 더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꼴에 공작이라고 가문의 힘 자체는 블랙우드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지만, 대신 블랙우드는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세간살이를 싹 다 팔아치워서라도 나를 도우려 할테니까.

음.

역시 그 정돈 필요 없다.

“내가 미안하다. 이제 쓸데 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은 뭐하고 싶으니.”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스칼렛님이랑 산책할래요!”

솔직히 즐거웠다.

*

그 뒤로는.

말했던대로, 무척 바빠져서 데이지를 만나러 가지 못했다. 보통 보름에 한 번쯤, 늦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났었는데.

혹시 몰라 로건에게 지금까지 몰래 데이지와 만나 놀아줬다는 사실을 서신으로 보내뒀다.

딸아이를 꾀어낸 괴한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데, 답장에는 왜 자기한테 말 안 하고 둘이서만 놀았느냐고 돌려서 질투하는 내용만 가득했다.

진짜 블랙우드 이상해….

그보다 중년아저씨한테 이런 식으로 질투 같은 것 받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잘 얘기해뒀으니, 혹시 데이지가 내가 보고 싶다고 밖으로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대륙의 정세가 점점 나쁘게만 흘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곳곳에서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아니, 끔찍하다기보단, 괴이한 사고.

사람이 실종되거나, 갑작스럽게 몬스터가 들끓는다거나 하는 건 예사 일.

심지어는,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보통 일은 아니구만.”

크음, 침음을 삼킨 북부대공─ 니콜라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주름이 깊게 패인 노인의 눈동자엔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고요히, 언제든 타오를 준비를 마친 채 잠들어 있었다.

“제국 전체에 불길한 기색이 감돌고 있다. 그런데 영 진척은 없으니.”

말을 받은 것은, 옥좌에 등을 기댄 채 짧게 신음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

그는 니콜라이와는 달리 정정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곧 죽을 노인네 같은 얼굴을 한 니콜라이가 기어코, 억지와 편법을 통해 반쪽이나마 벽을 뛰어넘어 다시 한 번 젊음을 되찾고, 반대로 아직까지 팔팔해 보이는 황제가 머지 않을 미래에, 찾아올 수명을 뛰어넘지 못하고 노화해 죽게 된다는 것을.

“……흐음. 스칼렛 자네는, 뭐 아는 거 없나? 너는 옛날부터 기묘하게 아는 게 많았단 말이지.”

굳이 따지자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그들의 엇갈린 운명에 괜히 기분이 착잡해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고깔 모자를 쓴 노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하여튼, 영감탱이 눈치는 빨라서.

덕분에 황제도 대공도 모두 내게 시선을 집중한 터라, 나는 한숨과 함께, 내가 추측한 것들을 털어놓았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딱 한 가지 있었으니까.

악마.

“…악마?”

“이건 또 생뚱 맞은…….”

“그야 생뚱 맞은 상황이니 이유도 생뚱 맞아서 오히려 이상할 건 없다만.”

마왕 강림의 전조.

내가 기억하는, 이제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 속 에서의 묘사를 떠올려 보자면,

마왕 바알이 강림하기 전에는 몇 가지의 전조가 발생한다.

우선 마왕이 강림할 수 있을 정도로 마계와 현계 사이의 장벽이 약해지고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기에, 곳곳에 ‘공간 소실’이 발생한다.

그리고 헐거워진 차원장벽을 넘어서, 약한 마물부터 하나둘 차례대로 넘어오기 시작하고.

마물의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이 날뛰어댄다.

“허어.”

“그럼 마왕이 당장 강림할지도 모른단 얘기인가?”

“아니, 애초에 마왕이란 존재가 실존한다는 얘기도 이제야 알았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인줄 알았다만.”

여기까지 들은 세 남자의 반응은 침착했다.

다만.

“아직. 마왕이 넘어오려면 멀었다.”

“네 말만 들으면, 우선 도시가 소실된 것들이 바로 ‘공간 소실’의 예시이고, 몬스터들이 갑자기 들끓는 것도 마물들이 넘어와서 그런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의자는 꽤 고급스런 소재로 만들어졌는지, 끼익, 하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내 무게를 받아낸다.

“차원 장벽은 아직 튼튼한 편이야. 아주 문제가 없진 않은데, 이 정도는 괜찮다.”

얼마 전에 조사해봤다. 혹시나 싶어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여튼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얘길 꺼낸 거 아니냐.”

그래.

그 말대로, 마왕 강림까지는 아직 멀었다. 시기상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악마지.”

마왕의 수하.

조금 의아하긴 하다. 마왕 본인이 강림하는 것도 아닌데, 대륙에 이토록 혼란을 일으킬 수 있나?

‘공간 소실’ 자체도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다.

차원 장벽의 상태를 보면, 그 정도로 크게 일을 벌일 수 있는 악마가 넘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일텐데.

“……이렇게 머릴 싸매고 있어봐야, 아는 게 없으니 진척되는게 없구만. 나는 돌아가 마탑의 기록을 뒤져봐야겠어.”

“그럼 나도 황실의 서고를 오랜만에 열어보마.”

“북부는…….”

“거 거기에 책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다고.”

“뭬라?”

시끄럽구만.

*

“전하! 데이지가 사라졌습니다!”

“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