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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99화 (199/199)

〈 199화 〉 과거 : 루나 (1)

* * *

나는 왜 스칼렛 체페슈가 되었나.

이 세계에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엇을 위해서?

어쩌다 내가?

하지만 그런 의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으니, 나는 늘 그것을 마음 속에 담아두기만 했었다.

그렇게, 백 년 하고도 십수 년.

나는 레티시아를 위해 살기로 했다.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그녀가 행복하게 웃어주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 여겼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레티시아 외에도 소중하다고 할 법한 사람이 몇몇 생겼다.

데이지.

나를 따르는, 귀여운… 아이. 최근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하긴 했지만, 지난 번 그녀가 납치당한 이후엔 일부러 시간을 내 몇 달에 한 번쯤은 만나는 편이었다.

혹시 모르니 까마귀도 붙여놓고.

노스페라투의 쪽에서는,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곤 했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줄 순 없었다.

한 번 얕보이면, 언제 어디서 뒷통수를 맞을 지 모르는 세계니까.

착실하게, 내가 잃을 뻔 했던 것의 무게만큼, 그들에게서 값을 치뤘다.

그리고 또.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떠돌면서 만나게 된 사람.

루나 테일러.

이 세계의 주인공….

그리고, 나의 누나.

레티시아가 아니라. 그러니까, 전생의 누나.

‘설마 나랑 똑같이 환생했을 줄은.’

지난 백 년 동안 혹시 몰라 찾아보다 포기했던만큼, 재회 했을 때… 가슴이 무척 따끔거렸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나쁜 의미일지도.

누나가 생각하는 나와는 이미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버렸을테니.

그런 나를, 누나가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땐 무척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뭐.

‘나름.’

전생에서의 회포도 풀고.

나보다도 더 이 세계에 대해 잘 알던 누나다. 그야 백 년씩이나 이곳에서 살았으니 세밀한 부분에서는 내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을테지만.

누나의 지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역시 히든 피스를 비롯해서, 숨겨져 있는 것들.

함께 여행을 다니며, 대륙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데에 힘썼다. 그러면서 숨겨진 요소들을 찾아서 나누기도 했고.

「그랜드」의 벽 역시 뚫었다.

이건 히든피스나, 기연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하게 나 혼자서.

애초에 그런 요소에 기대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으니까.

─씁.

─왜?

─아니. 그냥, 고생 많이 했구나, 싶어서.

그랜드의 벽을 넘었을 때.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누나의 얼굴은, 뭐, 이해는 한다.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을 때 누나의 표정을 보고, ‘내가 변했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으니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이렇게 돼 버린 것을.

돌아갈 순 없다. 이미 너무 많이 지나버렸으니.

그리고, 지금.

“야. 누나 힘들다.”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고, 이 자식아. 누나가 힘들다는데.”

이 여자.

처음에는 그렇게 날 어려워 하더니. 어느새 적응해버려서는.

그래도 보기엔 좋다. 꼭 지난 생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묘한 향수도 느껴질 정도다.

어쩐지, 레티시아와 있을 때보다도 더더욱, 나도 분위기가 풀어져 버리기도 하고.

“뭐 해줄까.”

“으으응…. 업어줘라.”

꽤 오래 걷긴 했다.

“자.”

“그럼, 실례…….”

읏차.

귀여운 기합을 넣으며 등 위로 올라탄 누나를 업은 채 일어섰다.

추욱─ 늘어져서, 내 등에 뺨을 기대고 있는 게 느껴진다.

“하아아아. 이제야 좀 느긋해지나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등 뒤에서 축 늘어진 채 한탄하는 목소리.

최근 몇 년, 누나와 둘이서 대륙을 몇 년간 들쑤시고, 몇 개나 되는 대형사고를 막아낸 덕분인지.

혼란스럽던 대륙의 상황도 많이 안정 되었었다.

그래도 여전히, 불길한 징조가 몇 남아있어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야, 이거 뭔가 좆된 것 같은데?

─음.

─아직 분명 뭔가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하루만에 사라져?

혹시나 싶어, 북부에 들러 니콜라이에게 물었더니.

─뭐? 네가 한 게 아니었나? ……쓰읍.

같은.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덕분에, 극도로 고요해진 대륙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최근 휴식기간을 가지고 있던 누나와 함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흡혈귀인 나와는 달리, 연약한 인간인 누나의 몸으론 충분한 휴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중간중간 한 달에서 두 달씩 꽤 길게 휴식을 취해왔었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체력적으로 지친 누나가, 지금처럼 칭얼거리며 업어달라거나 하면, 나는 순순히 등을 빌려주곤 했다.

“으으. 이게 무슨 고생이야.”

“그러게.”

앓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렸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그래도 목적지를 두고 움직였지만, 지금은 원인 모를, ‘불길하지 않아서 불길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보니.

정처 없이 움직이는 감이 있었다.

체력적으로 지친 누나에게는 가혹한 일일지도.

“그래도 해야지….”

그래도, 꿍얼거리면서도 내가 달래기 전에 내 목을 팔로 끌어안고 마음을 다잡는다.

기특하구만.

“으그, ……야! 어딜 만져!”

“가만, 가만히 있어. 뭐하냐.”

“네가, 네가 멋대로 엉덩일 만졌잖아!”

“겨우 그런 것 가지고 난동 부리지 마라.”

“성희롱이야 이거──!”

칭찬의 의미로 엉덩이를 손으로 토닥여줬더니,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 든다.

그런가.

엉덩이를 토닥거리면 성희롱인가.

과연…….

“가족끼리라도?”

“가족끼리라도!”

“음. 그렇군.”

몰랐다.

지난 생의 기억이 이젠 너무 희미해져서인지. 아니면 이 대륙에서도 가족끼리 엉덩이를 토닥여주면 성희롱인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역시 내가 전생을 잊은 데에 반해, 누나는 아직 전생의 기억이 잔뜩 남아 있어서, 그런 거겠지. 누나에겐 사과하도록 하자.

“미안하다.”

“아니, 뭐……. 그렇게 사과할 건 아닌데. 앞으론 조심해.”

“그래.”

그래도 사과를 빨리 받아줘서 다행인가.

용서를 받긴 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탓에 누나도 나도 입을 열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이럴 땐,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곤란하다.

다시 만나게 된 누나는, 백 년이나 지나 변해버린 나와는 다르게 아직 파릇파릇한 소녀스러운 감성이 살아있어서, 지금 같은 때에 함부로 말을 걸 수가 없다.

“……야.”

“응.”

하지만 침묵이 길었던 건 누나도 역시 불편한 모양이었다.

별안간 목을 감싸던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꿍얼거리듯 내게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

“뭐냐.”

“……네 누나인 거지?”

“당연한 걸 묻는구만.”

할 얘기가 없었던 건가. 뜬금 없이, 당연한 얘기를 꺼낸다.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덩달아 누나 역시 작게 웃어댔다.

“그래, 그치. 그치…. 짜식아, 좀 그렇게 웃고 다녀라. 응? 맨날 인상 팍 찡그리고, 사람 하나 담글 것처럼 그러구 있지 말고.”

“내가 언제 그랬는데.”

“맨날 그러잖아, 맨날. 어? 실제로 담그지도 않을 거면서.”

“담그냐 안 담그냐를 굳이 따지자면 담그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이 씨. 갑자기 그런 으스스한 얘기 할래?”

소름이 돋는다는 듯 내 목을 꽉 조인다.

하지만 진짜다.

지금에야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지만. 백 년 전만 해도 나는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으니, 그만큼 예민하기도 했었다.

아버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자의 명령으로 고문도, 살인도, 셀 수 없이 저질렀었다.

가주가 된 이후엔, 체페슈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그 때의 버릇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다.

좋게 넘어가기보단,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을 써둔다.

그 편이 내 사고방식에 가깝다.

“……그러지 말라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어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누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 다닐 때면, 자중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싫은 건 아니다? 오해하지 마.”

“알아.”

괜히 내가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기는.

오해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내 편을 들어줄 이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 나는 레티시아와 누나, 그리고 아마, 데이지까지.

세 사람을 끝까지 남겨두겠지.

셋 중에서도 굳이 골라야만 한다면.

……아마 그냥 내가 먼저 죽기를 택하지 않을까.

“…나는, 네가 어떤, 뭐, 씁. 어렵네…….”

“뭐가. 편히 말해라.”

업혀있는 상태라는 건, 어쩌면 속마음을 말하기 가장 좋은 자세일지도 모른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지 않으니 내심을 털어놓기 쉬우면서, 귓가에 가장 밀착한 상태라 작은 중얼거림까지 모두 전할 수 있으니까.

“……네가 개미친 싸이코패스 학살마여도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가급적이면, ……너무 괴물이 되진 말라구. 알겠어?”

“음.”

“뭐, 뭐, 할 말 있음 해라!”

“그래도 양친께서 살아계신데 유일한 가족은 좀. 미안하지 않나?”

“이 씹──!”

왁왁. 귀청이 떨어져라 욕설을 해대는 누나가 등 뒤에서 버둥거린다.

자기가 업어달라 해놓고선.

그래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고맙다.”

“너 이 배은망덕한 샊── 뭐, 어? 어?”

“고맙다고. 나도 누나가 소중해.”

“너, 너 말투. 어?

음.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업혀있는 상태라는 건, 역시 속마음을 말하기 좋은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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