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1권 사실은 이거 이세계물입니다(4)
* * *
"근데 왜 굳이 익명, 아니 가명으로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많은 거야?"
"아, 그건 아버지가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어. 그림은 결국, 마법 연구나 연습을 하던 마법사들이 휴식할 때나 하는 취미 생활이잖아?"
그래서 마법사지만 굳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하긴 그림에 신경 쓸 시간에 마법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
그림 그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근데 자기 본명으로 활동하면, 내가 지금 놀고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아...?"
"그래서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화가명을 따로 두는 거야."
확실히 그건 바로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결국 화가로 활동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본업이 아니라 취미 활동이고 노는 거라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긴 같은 수준의 화가보다는 마법사로서 활동하는 것이 더 페이가 강하다고 들었으니까 당연하려나?
그래서인지 그림을 경매보다는 그냥 출품만 하고 다시 되돌려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기 취미 활동으로 만든 걸, 자기가 직접 소장하고 싶은 거네?"
"뭐, 그렇지. 요즘은 마법으로 사본을 만들거나, 사진을 찍는다든가 하는 경우도 생겨서. 실질적인 판매율 자체는 좀 올랐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해."
로자리아를 따라서 거대한 미술관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자,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전시된 수많은 그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본적으로 인기를 기반으로 해서 전시관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본 전시관이 따로 있는 걸 보니까 그것 외의 기준도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림 문화가 잘 발달해 있는 것 같은데?
"사본은 다 원본 위치가 적혀 있구나."
"너무 먼 지역 작품을 사본도 보지 않고 찾아가는 건 힘드니까, 인기몰이하는 것들은 다른 지역에도 사본을 통해서 전시하고 있어. 이미 팔린 건 매너상 전시하지 않아서 전시된 건 전부 그 위치가 적혀 있는 거고."
"신기하네."
랭킹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기몰이하는 것들은 모아서 전시해둔 시스템이 굉장히 보기 편한 느낌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이 정도로 시스템을 잘 구현해놨다는 것 자체가, 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다른 것보다....
"와, 이건 진짜 미쳤다."
가장 나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이곳에 전시된 그림들의 퀄리티였다.
아무래도 수도에 있는 전시관이라 그런지,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의 원본이 아주 많았는데.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감탄을 참기가 어려웠다.
본래 중세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적은 색의 안료로 이루어진 투박한 그림이 대부분이다.
가장 많이 보이는 유화나 수채화는 물론이고 내가 처음 보는 종류의 안료로 그려진 그림들도 많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그림이 마법사들의 취미인 만큼, 안료의 발달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된 모양이었다.
이건 진짜 불행 중 다행인 부분이네.
하여튼 작품들을 관람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 바로 안료와 작품의 결과물 상태에 대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것에 관한 생각은 금방 지워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그림들 자체에 있는 흡인력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와...."
이 세계의 그림은, 그나마 내가 아는 시대의 그림 중에서는 고전주의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고전주의와 성격이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표현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특정 부분을 자연스럽게 과장하는 것으로 일부 이미지를 부각해서 의미를 담아낸다.
하지만 그것이 고전주의처럼 고대의 소재를 이용하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담는다는 점에서 전혀 달랐다.
어떻게 이리 비슷한 색채로 다른 감정을 전달해 오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 이거 론도 교수님 작품이네."
"론도 교수님?"
"내가 입학하는 그라베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님! 우리 할아버지의 제자기도 해."
"풀네임이 론도? 흐음, 실력이 좋으신 모양인데. 왜 작위가...."
"일부러 거절하셨을걸? 엘프거든."
"아, 엘프...."
여기서 엘프 이야기가 나오니까 정신이 확 드네.
이게 마법이라고 해도, 칼리로 살아온 기억 때문인지 그냥 특별한 과학 기술처럼 느껴졌는데.
칼리의 삶에서 다른 종족이 그다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엘프라는 말에서는 여기가 이세계라는 감성이 물씬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게 엘프가 그린 그림이라고?
엘프 교수인 론도가 그렸다는 '문 안의 세계'라는 작품을 본 첫인상은, 이 사람의 그림이 굉장히 세련되었다는 점이다.
유화를 사용했음에도, 무서울 정도로 작품의 입체감이 죽어있었고.
선의 마감은 사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마법을 이용한 카메라가 이미 개발이 된 상태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이 작품이 유채화라는 점과 일반적인 카메라로는 찍을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사진 작품이라고 속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풍이 독특했다.
"와, 진짜 미쳤네."
최근 카메라가 발명되었기에, 현실을 깔끔하게 재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리라.
그렇기에 본래에 느끼던 재현의 아름다움을 사용하면서도, 그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입체감과 특별함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오늘 본 인기작들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같은 감성을 표현한 방식이 완전히 달랐는데.
오히려 사진이랑 착각할 정도로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고의로 죽였다.
하지만 절대로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이게 사진이랑 뭐가 다르냐는 말을 할 수는 없으리라.
문을 제외한다면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 재현도가 높은 현실적인 그림이지만.
열려있는 문 내부는, 평범하게 건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피가 흐르고 불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냉혹한 전쟁터가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굉장히 평범해 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집인데, 그 집의 내부에 아주 현실적인 야외 전쟁터가 구현되어 있다는 거다.
'카메라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사진 편집 기술은 없을 거야. 그리고 사실 아무리 그런 기술이 있어도 디지털이 아닌 이상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되긴 어렵지.'
합성이 아니라 애초에 이런 식으로 생긴 세계를 사진에 담은 것 같은 느낌.
처음부터 모두 작가의 손에서 그려졌기에 가능한 연결성.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진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진과 최대한 가깝지만 그림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그려냈다.
기술이나 아이디어에서 완벽하게 이 시대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선두주자라고 볼 수 있었다.
'괜찮은 거 맞나?'
확실히 이런 대단한 그림들을 보니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감동하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비실사 만화체 정도로 정의할수 있는 씹덕 그림만 그릴 줄 안다는 거다.
그걸 시발 지금 이 아름답게 빛나는 시장에 투하하는 것이 맞는 건가?
"허, 쓰레기 같은 그림 올라왔다고 진심 고로시 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고.
또한 이곳에 출품도 할 생각이다.
이상한 씹덕 그림 좆같다고 고로시 당하고 외면당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대중에게는 외면받더라도, 지금은 이 세상에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 믿으면서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
"아, 진짜 아쉽다. 원래 계획처럼 하루만 일찍 도착했어도, 내가 초상화도 그려주고 그림 그리는 것도 알려주고 했을 텐데."
"일정이 밀린 건 어쩔 수 없지. 기숙사 짐 정리할 것도 많을 텐데, 빨리 가 봐."
"정말로 내가 더 안 도와줘도 괜찮겠어?"
솔직히 가장 중요한 것들을 다 해준 터라, 이 이후로는 나 혼자 해도 충분했다.
이제 할 것이라고는 로자리아가 알려준 미술용품 가게에서 쇼핑한 뒤에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솔직히 수도까지 데려와서 작품 관람 도와준 거랑 가장 좋은 가게 알려준 것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괜찮다니까. 나도 보고 싶을 테니, 방학 되면 와서 놀아주기나 하세요. 나는 리아 없으면 친구도 없으니까."
"응...!"
로자리아와 헤어져서, 아까 그녀에게 들었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건물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 때문에, 내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많은 재료와 도구들이 끝도 없이 나열된 아름다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나는 한동안 그곳에서 어떤 것들이 있는지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왠지 그림들의 퀄리티가 높더라니...."
수많은 종류의 물감과 고품질의 캔버스는 물론이고, 마력을 이용해서 색을 만들어내는 펜이나 특별한 기능을 가진 붓과 나이프 등.
무시무시한 물건들의 향연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중세시대에 색상을 코드 비슷한 것으로 분류하고, 보조제의 종류도 이렇게 다양하게 나와 있는 거지?
진짜 감탄의 연속이네.
다만 직원의 설명을 들어보니까, 이것들이 기본적으로 마법사를 위한 것이다 보니.
특별한 기능이 있는 도구들은 마력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동작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법사가 아니면 그림도 편하게 못 그리는 세상이었다는 점에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워낙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제품들이 많아서 견딜 만했다.
"이러면 뭘로 시작할지가 고민인데."
아무래도 내가 어떤 재료를 써야 내 평소 그림체를 현실에서 재현해내기 유리한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림체의 그림을 거의 컴퓨터랑 타블렛으로만 그리던 내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턱이 없지.
그럼 결국 내가 실제로 해보면서 어떤 게 좋은지 알아내야 한다는 거네...?
"아, 그냥 최대한 여러 종류로 다 사자."
생각해보니까 지금 나는 금수저잖아?
그냥 다 사버리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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