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8화 (8/229)

〈 8화 〉 2권 ­ 제 야짤이 범죄가 아니라 명작이라는데요?(2)

* * *

"내가 캔버스 들고 가서 그림 전시 요청을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캔버스에 그려진 일러스트를 볼 때마다 자꾸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이 녀석 빼고 모든 캔버스를 망쳤을 때는, 결국 연습 시간이 더 길어지겠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 녀석이 이렇게 제대로 나와 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시우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잘 뽑았다며 전체 공개로 자랑했을 만한 퀄리티다.

"예, 스승 심부름입니다. 화가명은 '시우'라고 등록해 달라고 하시던데요."

"처음 등록하는 이름이네요.... 혹시 그림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직원은 잠시 그림의 붓질 상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될 것 같다고 답했다.

다만 최소한의 실력만 파악하고 모든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기에, 오랜 시간을 전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물론 관람자가 추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서 추천 수가 많을수록 전시 기간이 길어지고, 일정 이상 추천 수를 받으면 전시장도 더 상위로 이동한다고 했다.

"작품 경매의 경우, 시작 가격에 따라 최소 추천수 조건이 있고요. 조건을 달성하고, 전시 시간을 모두 소모하면 자동으로 경매 날짜가 잡힙니다."

"경매는 생각 없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아두겠습니다."

작품명은 '수백화'라고 적어서 제출했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고 여기 그려진 캐릭터의 이름이 수백화였기 때문이다.

이쪽 세계에서라면 '백화 드 수'라는 이름이 되긴 하겠지만, 그건 좀 별로잖아.

아마 이름 설정은 나중에 다시 짜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진짜 잘 만들어 놓긴 했네.'

아무리 마법사들의 취미라지만, 익명까지 받아주는데 이렇게 쉽게 작품이 걸린다니.

추천을 전혀 받지 못하면 하루 만에 작품이 내려간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모든 작품이 무료로 전시될 기회를 받는다는 것이 좀 신기했다.

하긴 여길 운영하는 대표인 '샤론 흐 마기우스'는 그림에 항상 진심이라고 했으니까 당연하려나.

애초에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그림을 배출하려는 목적으로만 운영하니까 이런 것이 가능하겠지.

"아, 그리고 손님 자체가 적어서 작품이 내려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소 기간 말고 관람자의 수도 최소로 정해진 것이 있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어우...."

"어, 괜찮으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잠을 거의 못 자서요."

사실 오는 동안에 잤으면 좋았을 텐데.

이 그림을 껴안고 있으니까 불안해서 그럴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아마 이걸 등록하고 나면 숙소에 돌아가서 푹 자고 돌아오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았다.

"많이 안 바라니까, 하루만 넘게 버텼으면 좋겠다."

진짜 철저하게 외면받는 결말이 가장 슬프니까 말이다.

물론 시장이나 메타에 맞지도 않는 내 기준에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고, 이게 잘 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참 도둑놈 심보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실사체 그림을 그리는 건 더 싫었던 데다, 지금 나는 대박이 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가 내 그림을 긍정해주고 공감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하루도 필요 없어.'

단 하나.

내 그림을 긍정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건 다시 그림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원동력이니까.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와, 진짜 미쳤네. 거의 하루를 통으로 잤는데?"

그림을 마무리하던 날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림을 전시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리했더니.

정작 그림이 전시된 모습은 보지도 못하고 잠만 자는 불상사가 생긴 셈이다.

아마 지금 바로 달려가도, 연장이 되지 않았다면 그림이 내려갔을 거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연장되어서 하루 정도는 더 올라가 있겠지.

그런 식으로 정신 승리를 하면서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숙소를 나왔다.

갈수록 전시 기간을 늘리는데 필요한 추천 수가 늘어나는 걸 생각하면, 처음 하루 늘리는 성공을 했을 거다.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하며 도착했지만, 역시나 내 작품이 걸려있던 자리에는 다른 신작이 올라가 있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만화를 비롯한 아무런 서브컬쳐 기반이 없는 곳에다가 씹덕 일러스트를 던졌는데, 그게 먹히는 게 더 이상하지.

너무 기대가 컸다고 자신을 비웃으며 한 명이라도 추천을 눌러줬길 기대하며 직원을 찾았다.

수도에 오래 있을 필요도 없겠지, 오늘 그림 받으면 연습할 도구 더 구매해서 별장에 돌아가자.

꾸준히 그림을 전시하다 보면 조금 정도는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길 거라고 믿는다.

"아, 오셨어요? 저는 그림만 제출하시고 스승분에게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네? 아, 결과는 봐야 하니까요."

"아직 확인 안 하셨어요? 아, 하긴. 어디 있는지를 말씀을 안 드렸구나."

"네?"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건, 아직도 전시되어 있다는 뜻인가?

난 당연히 그림 돌려주려고 안내해줄 생각에 저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나를 끌고 간 곳은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로자리아와 함께 감탄하며 구경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여긴...."

최근에 가장 인기몰이를 하는 작품들이 전시되는 곳.

진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물론이고, 대작이라고 생각한 '문 안의 세계'라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아, 그것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전시되어 있네.

"여기로 이동했거든요. 사실 여러 번 이동하긴 했는데, 너무 추천수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서 깜짝 놀랐어요."

"네, 네?"

그 쟁쟁하고 아름다운 작품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씹덕 그림 하나가 반짝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발 지금 내 그림이 여기서 전시되는 중이라고?

대체 왜?

"아니, 어.... 여기 올라올 추천수가 되나요? 안될 것 같은데...?"

"아, 모르시는구나. 추천수도 숫자로 올라가는 것이 있지만, 하루 추천수로 올라가는 제도도 있거든요."

"아니, 그럼 진짜 정상적으로 추천수를 만족해서 여기 왔다고요?"

"네, 시우라는 화가분 대단하신데요? 좋은 스승을 두셨네요. 저도 신비롭고 좋은 작품이라 생각은 했는데, 제 눈이 틀릴 때가 너무 많아서 조심스러웠는데.... 이번엔 맞았네요."

너무 많이 자서 생긴 두통인지,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라서 생긴 두통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머리가 너무 아팠다.

지금 그러니까 내 작품인 수백화가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이 전시되는 곳까지 올라갔다고?

다름 아닌 관람자들의 추천수로?

"...스승님이 놀라시겠네요."

"그래요? 저렇게 좋은 실력이면 자신 있게 출품하셨을 것 같은데."

"작품에 대한 자신이야 있으셨는데, 워낙 기존 그림들의 스타일이랑 다르잖아요."

저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씹덕 캐릭터가 헐벗은 채로 누워있으니까 너무 인지 부조화가 오는데?

나 지금 워낙 결과를 기대한 나머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 아니야?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허허, 이번에는 자네 생각이 틀렸을걸? 수백화라는 이름은 물 위에 피어오른 새하얀 꽃을 의미하는 거라니까."

"아뇨. 이건 스승님이 틀렸습니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건 분명 불타오른다는 개념을 표현한 겁니다. 즉, 물 위에서 타오르는 새하얀 불을 의미하는 거죠."

심지어 내 그림을 앞에 두고 노인과 미녀 엘프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니 둘 다 아니고 백화는 그냥 그 캐릭터의 이름인데?

그리고 대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걸로 싸우고 있는 거야.

"저기, 조금만 목소리를.... 아, 죄송합니다. 원로님과 론도 교수님이셨군요."

"목소리 높여서 미안하네. 여기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오랜만에 좋은 그림을 봐서 흥분해서 그래."

"아닙니다.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좀 부끄럽네요."

원로라는 호칭에 론도라는 엘프 교수가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면.... 샤론 흐 마기아!?

제국을 대표하는 마도사이자, 로자리아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또한 이 미술관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당사자기도 하다.

뭐 하는 할아버지인가 했더니 엄청난 거물이었잖아...?

"그쪽은...?"

"아, 안녕하십니까."

"호오, 자네도 화가구먼."

"예?"

"몸에서 짙게 밴 기름 냄새가 느껴지거든. 허, 이 정도로 찌들려면 한 달 넘게 유화만 건드려야 할 텐데."

대체 그걸 냄새만 맡고 어떻게 구분하는지도 신기했지만.

이렇게 말이 걸린 상태에서 도망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만난 적은 없어도 로자리아의 할아버지인데다, 마법학회 쪽에서는 원로로 취급받는 거물이라서 쉽게 모른 체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건 그냥 정공법으로 대답하고 넘어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네.

"예, 유화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신기해."

"네?"

"분명 진한 마력인데, 이렇게까지 성격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마력이라.... 그 정도로 유화 냄새가 날 정도로 연습했다면, 혹시 마법사 지망인가?"

"그, 그렇습니다?"

"아, 별건 아니네. 손녀가 딱 비슷한 나이대라서. 그런데 이 정도 차이라...."

"그, 대체 무슨 말씀을...?"

혼자서 알 수 없는 소리만 중얼거리던 샤론 흐 마기아는 빙그레 웃더니 나에게 펜을 하나 내밀었다.

아니,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솔직히 지금 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최대한 빨리 별장으로 돌아가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다.

"아마 스승이 있는 모양인데, 조금 괴짜인가 보오, 제자가 이렇게 많이 성장했는데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

내 손에 그 펜이 닿는 순간, 이상하게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들려온 펜을 제대로 잡으라는 그의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펜을 그림 그릴 때처럼 쥐었고.

그것과 동시에 펜촉에서 희미한 빛이 떠오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파아앗!

아니, 빛이라기보다는 허공에 그려지는 색채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은 표현이리라.

떨리는 손의 궤적에 따라서 이리저리 하늘을 수놓는 마력의 선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는 그 황홀한 광경에 넋을 놓고야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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